지난 12월말 발표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4강국 대사 내정자에 다소 의외의 인물이 들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정치인도, 외교관도 아닌 고려대 최상룡교수가 주일대사로 전격 발탁된 것. 하지만 김대중(DJ)정부 출범 이후의 몇 가지 일들을 떠올려보면 그것은 예상 밖의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98년 10월 DJ가 일본을 국빈 방문했을 때 최교수는 5명의 ‘특별수행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DJ가 숙소인 영빈관에서 오랜 일본의 지인들을 만났을 때도 바로 옆에 있었다.
99년 3월 방한한 오부치 게이조 일본총리가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특별강연을 했을 때 그는 사회자였다. 그는 오부치 총리 부부의 금실이 매우 좋으며 부부가 취미생활(미술감상)과 기호(술), 혈액형이 같다는 사실까지 언급해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최교수는 DJ정부 출범 과정에서도 이기주전외무차관과 함께 주일대사 후보로 거론됐었다.
그는 국내의 대표적인 ‘일본통 학자’로 꼽힌다. 그는 일본 도쿄(東京)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초빙교수도 지냈고 미 하버드대 일본연구소에서 연구활동도 했다.
그의 일본정치 강의는 유명했다. 그가 80년대에 ‘전후 천황제 연구’를 강의했을 때 주한일본대사관 직원들까지 대학에 와 빠지지 않고 청강했다는 에피소드가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일본내 지인들이 많다. 정계의 대표적인 일본통인 자민련 박태준총재나 한나라당 김윤환의원보다 많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최교수는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당수, 가토 고이치 전 자민당간사장 등 야당 수뇌부들은 30년 친구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매우 왕성한 활동력을 자랑한다. 남북대화자문위원과 통일부 통일정책평가회의 위원, 외교부 자문위원,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 한일포럼 위원,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 한국정치학회장, 한국평화학회장,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등의 직함을 이력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계에서도 그의 ‘인기’는 높았다. 특히 97년 당시 여당의 대선후보 경선과 대선 국면에서 이회창 이한동 이수성 이홍구후보 진영은 앞다투어 그를 ‘후보가 정책자문을 구하는 학자’로 꼽았다.
이에 대해 최교수는 “특정후보와 가깝게 지낸 일이 결코 없는데 일방적으로 내 이름을 언론에 흘렸다. 나는 당시 정치학회장으로 회원에게 약속한 품격과 지조를 지켰다. 이회창후보 진영에서 큰 모임에 연사로 날 초대한 적도 있지만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DJ와의 인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김대통령은 야당 때부터 알고 지냈고 내가 관계한 큰 세미나에 와주었다. 그러나 국사를 놓고 얘기하기 시작한 것은 98년 9월경부터다. 김대통령은 방일 전 나를 두 번 불러 한-일 관계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그의 말처럼 그는 DJ의 방일 준비단계에서 과거사 문제와 관련, DJ의 자문역할을 했다. 99년 여름에는 DJ의 집권 2기 청사진을 담은 것으로 평가받은 ‘8·15 경축사’의 틀을 만드는 작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정도전을 ‘조선 최대의 이데올로그이며 발군의 경세가’ ‘14세기 서양이나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정몽주가 이념형, 이방원이 권력형이라면, 정도전은 권력과 이념의 통합형’이라는 그의 주장에는 학문과 현실의 ‘통합’에 대한 ‘갈구’가 담겨 있는 듯하다. 그가 주일대사라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도 정도전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98년 10월 DJ가 일본을 국빈 방문했을 때 최교수는 5명의 ‘특별수행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DJ가 숙소인 영빈관에서 오랜 일본의 지인들을 만났을 때도 바로 옆에 있었다.
99년 3월 방한한 오부치 게이조 일본총리가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특별강연을 했을 때 그는 사회자였다. 그는 오부치 총리 부부의 금실이 매우 좋으며 부부가 취미생활(미술감상)과 기호(술), 혈액형이 같다는 사실까지 언급해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최교수는 DJ정부 출범 과정에서도 이기주전외무차관과 함께 주일대사 후보로 거론됐었다.
그는 국내의 대표적인 ‘일본통 학자’로 꼽힌다. 그는 일본 도쿄(東京)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초빙교수도 지냈고 미 하버드대 일본연구소에서 연구활동도 했다.
그의 일본정치 강의는 유명했다. 그가 80년대에 ‘전후 천황제 연구’를 강의했을 때 주한일본대사관 직원들까지 대학에 와 빠지지 않고 청강했다는 에피소드가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일본내 지인들이 많다. 정계의 대표적인 일본통인 자민련 박태준총재나 한나라당 김윤환의원보다 많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최교수는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당수, 가토 고이치 전 자민당간사장 등 야당 수뇌부들은 30년 친구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매우 왕성한 활동력을 자랑한다. 남북대화자문위원과 통일부 통일정책평가회의 위원, 외교부 자문위원,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 한일포럼 위원,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 한국정치학회장, 한국평화학회장,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등의 직함을 이력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계에서도 그의 ‘인기’는 높았다. 특히 97년 당시 여당의 대선후보 경선과 대선 국면에서 이회창 이한동 이수성 이홍구후보 진영은 앞다투어 그를 ‘후보가 정책자문을 구하는 학자’로 꼽았다.
이에 대해 최교수는 “특정후보와 가깝게 지낸 일이 결코 없는데 일방적으로 내 이름을 언론에 흘렸다. 나는 당시 정치학회장으로 회원에게 약속한 품격과 지조를 지켰다. 이회창후보 진영에서 큰 모임에 연사로 날 초대한 적도 있지만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DJ와의 인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김대통령은 야당 때부터 알고 지냈고 내가 관계한 큰 세미나에 와주었다. 그러나 국사를 놓고 얘기하기 시작한 것은 98년 9월경부터다. 김대통령은 방일 전 나를 두 번 불러 한-일 관계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그의 말처럼 그는 DJ의 방일 준비단계에서 과거사 문제와 관련, DJ의 자문역할을 했다. 99년 여름에는 DJ의 집권 2기 청사진을 담은 것으로 평가받은 ‘8·15 경축사’의 틀을 만드는 작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정도전을 ‘조선 최대의 이데올로그이며 발군의 경세가’ ‘14세기 서양이나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정몽주가 이념형, 이방원이 권력형이라면, 정도전은 권력과 이념의 통합형’이라는 그의 주장에는 학문과 현실의 ‘통합’에 대한 ‘갈구’가 담겨 있는 듯하다. 그가 주일대사라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도 정도전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