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1일 기준 러시아월드컵 득점 순위 1위(6개)인 잉글랜드 축구대표팀 해리 케인. [동아DB]
이번 대회는 유독 이변이 많았다. 남미 축구 강국들이 토너먼트 초반 연달아 쓰러졌다. 특히 아르헨티나는 16강, 브라질은 8강에서 짐을 쌌다. 디펜딩챔피언이자 토너먼트 최강팀이던 독일이 조별리그에서 고꾸라진 것도, ‘티키타카’로 세계 축구 트렌드를 주도한 스페인이 8강 문턱을 못 넘은 것도 예상 밖이었다. 세계 축구 패권이 제3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분석도 무리는 아니다.
짚어볼 만한 이슈가 여럿 나왔다. 먼저 △에이스 판도가 요동쳤다. 리오넬 메시(FC 바르셀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유벤투스 FC)가 아닌 또 다른 지배자가 등장할 여지를 남겼다. △경기력 측면에서도 변화가 따랐다. 절정에 달한 볼 점유가 승리를 보장하지 않았다. 흠씬 두들겨 패다가도 결정적 한 방에 녹다운되는 게 2018년 현 축구였다. △처음 도입한 VAR(비디오판독시스템)는 또 어땠나. 축구에 신기술을 이식해 판정 만족도를 높이려던 이 제도도 결국 사람의 손을 탔다. 여전히 주심이 경기를 결정했다.
세계 축구는 새로운 왕을 기다려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명실상부 에이스인 킬리안 음바페. [동아DB]
최근 10년간 견고하던 메시-호날두의 양강 구도에 균열이 일었다. 그해 최고 선수에게 시상하는 발롱도르를 5 대 5로 양분한 둘이지만, 처진 어깨에 묻어난 세월의 흔적마저 못 본 체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단, 모든 걸 해결할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님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월드컵 우승만 생각하면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이를 이루기 전까지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떠나지 않겠다”던 메시의 각오가 조금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마법의 효력을 4년 뒤 대회까지 가져갈 수 있을까.
시간이 흘렀고, 시대가 바뀌어간다. 신(神)계에 도전할 또 다른 인물에게로 시선이 향한다. 신이란 칭호는 아무에게나 붙이는 게 아니다. 한 세대에 한 명 나오기도 어려운 그런 존재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우리는 메시와 호날두가 함께 뛰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눈높이는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여간해서는 성에 차지도 않을 터다. 네이마르를 포함해 그 경지에 다다른 듯하던 인물도 결국엔 ‘인간계 최강’에 그치기 일쑤였다.
이번 월드컵 기준으로는 잉글랜드 주포 해리 케인(토트넘 홋스퍼)이 두드러졌다. 조별리그 해트트릭을 포함해 유력한 득점왕 후보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호나우두가 기록한 최다골 8개를 깰 수 있을지 주목됐다. 벨기에도 만만찮다. 황금 세대가 들어섰다. 에덴 아자르(첼시 FC), 케빈 더브라위너(맨체스터 시티), 로멜루 루카쿠(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 20대 중·후반인 이들이 시대를 선도할 수 있다. 프랑스 팀 내 최다 득점자 앙트완 그리에즈만(아틀레티코 마드리드)과 킬리안 음바페(파리 생제르맹 FC)도 지켜봐야 한다. 물론 이들 모두 당장은 아니다. 다만 메시와 호날두가 바람을 타면서 무섭게 올라섰듯, 신계까지 상승곡선을 그릴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패스 축구.’ 세계가 이에 사로잡혔다. 200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조류가 시작됐으니 딱 10년이다. 스페인은 유로 2008부터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 유로 2012까지 메이저 대회 3연속 제패란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했다. 압도적으로 많은 패스가 비결이었다. 볼 점유를 기반으로 적군 진영을 가늠하고, 순식간에 치고 나가 결정까지 지었다. 스페인 대표팀 영광의 주역은 소속팀 FC 바르셀로나에서도 일을 냈다.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등으로 세계를 호령했다. 스페인식, 바르셀로나식 패스 축구가 하나의 표본이 됐음은 물론이다.
볼 오래 갖고 있는 것이 능사는 아니더라
하지만 이 축구가 시들해졌다. 패스를 기반으로 한 축구는 계속될지라도, 해당 스타일로 세계를 이끌던 시절은 이제 과거가 됐다. 스페인과 독일이 대표적이다. 볼 점유율 순위로는 스페인이 69%로 1위, 독일이 65.3%로 2위다. 실제 경기를 봐도 상대를 중앙선 아래 몰아놓고 주도했다. 하지만 웅크렸다 대형을 펴는 상대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2010년대 들어 줄곧 정상권에 있던 이들이 한두 차례 역습에 휘청했다. 허겁지겁 뒤따라가던 모습이 도통 익숙지 않았다.명성보다 기본에 충실한 팀이 실리를 챙겼다. 부지런히 수비하고 재빨리 공격하는 축구가 의외로 좋은 성과를 냈다. 재미를 깎아먹는 수비 축구란 선입견도 있었으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꾸준히 구현해내며 결국 갈채를 받았다. 이란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상대로 잘 싸웠듯 말이다.
축구계에서는 말도 안 되는 판정이 종종 나오곤 한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며 속을 삭여야 하는 일도 심심찮게 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월드컵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랬던 축구에 VAR 바람이 불었다. 경기 흐름을 끊을 수 있다는 지적에도 일단은 억울한 일을 줄이고 봐야 했다.
한국이 치른 조별리그를 기준으로 보자. 결과는 꽤 긍정적이었다. 조별리그 F조 1차전 한국과 스웨덴의 경기 결과를 가른 결승골. 주심은 김민우의 태클에 VAR를 적용,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스웨덴으로선 응당 얻어야 할 기회를 누렸다.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에서 선제골에도 VAR가 시행됐다. 골망을 흔든 김영권의 슈팅에 대해 부심은 기를 들어 오프사이드를 알렸지만 주심은 VAR 이후 골을 인정했다.
다만 이 모든 것도 결국 주심이 결정했다. 아무리 호소해도 주심이 VAR를 거치지 않겠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조별리그 2차전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에서도 석연찮은 상황이 있었다. 주심은 기성용이 당한 거친 플레이에 휘슬을 불지 않고 그대로 경기를 진행해 결국 골이 터졌다. 그 밖에 VAR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에게 유독 불리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월드컵도 ‘공놀이’이기 전에 ‘돈놀이’다. 더 큰 관심을 끌 수 있는 팀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다.
4년에 한 번 오는 축제가 막을 내린다. 여느 대회만큼 파격적인 일들로 시끌벅적했던 건 아니지만, 그 속에서도 잔잔한 변화는 감지됐다. 다음은 카타르로 간다. 또 다른 누군가가, 또 다른 스타일로, 또 다른 제도 속에서 세계 축구를 이어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