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철 기자]
“중학생 때 영어듣기평가를 준비하는데 잘 들리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원인 불명으로 청력이 상실됐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후 고주파 소리는 잘 들리는데 저주파 소리는 들리지 않아 사람의 음성을 제대로 구별할 수 없게 됐습니다. 제 음성도 잘 안 들려 말이 살짝 어눌하게 들리실 거예요. 그래도 상대방 입 모양을 보면 의사소통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멀쩡하던 청력을 사춘기 소녀 시절에 상실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구김살 없는 웃음을 짓는다. 내면의 단단함이 느껴졌다. 탄탄한 과학적 상상력 위에 수놓인 비애의 감수성이 어디서 왔는지 어슴푸레 알 것 같았다. 청각장애가 작품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물었다.
“글을 쓸 때 소수자의 관점을 더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제가 여성이자 장애인으로서 겪은 ‘소수자로서의 삶’, 대상화되는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점들을 조심하고 있어요. 작중 인물들이 고유한 특성으로 타자화, 대상화되거나 평면적으로 묘사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는 올해 초 포항공대 화학 전공 석사 과정을 졸업한 과학도다. ‘유전자탐침을 이용한 바이오센서’를 만들었다고 했다. 특허권도 신청할 예정이라니 흔한 석사는 아닌 듯했다.
“우리 몸에 병이 생기면 특정 단백질의 농도가 높아져요. 혈액에서 그 단백질이 검출되면 어떤 병에 걸렸는지를 알 수 있어요. DNA는 합성이 가능한데 해당 단백질에 반응하는 DNA를 합성하면 그 단백질 탐침이 가능하죠. 저는 황열, 뎅기열, 치쿤구니야 같은 열대 전염병에 걸리면 농도가 짙어지는 단백질을 탐침할 수 있는 바이오센서를 개발했습니다.”
얼핏 들으면 생물학 영역 같은데 화학 전공이라니. 양자가 결합한 하이브리드 영역이라고 했다. 실제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화학뿐 아니라 뇌과학과 우주여행, 생체공학에 대한 지식이 잔뜩 등장한다. 평소 전공서적 외 과학서적을 많이 탐독한 결과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했고, 중학생 시절 우연히 과학책들에 빠져 과학을 전공하게 됐습니다. 화학을 택한 건 제가 실생활의 화학물질과 약물을 특히 좋아했기 때문인데, 물론 다른 과학 분야도 좋아했어요. 대학에 들어가서도 틈틈이 과학과 관련된 글을 썼습니다. 3년 전 소설 습작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과학소설을 쓰게 됐죠. 세부 분야는 다르다 해도 전체를 관통하는 과학적 관점과 사고방식이 있다 보니, 그 경험을 다른 분야와 관련된 글을 쓸 때도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살아 있는 기억을 마주할 때
대상 수상작 ‘관내분실’은 사람 뇌세포 속 기억을 컴퓨터에 저장하는 ‘마인드 업로딩’이 가능해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기억을 보관하는 도서관에서 죽은 엄마의 기억이 분실된 사실을 알고 찾아나서는 딸의 이야기다. 소설에선 죽은 사람의 기억만 업로딩하지만 ‘특이점이 온다’의 저자 레이 커즈와일은 2040년 무렵이면 인간의 기억을 기계에 업로딩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가까운 사람의 기억이 데이터로 보존된다면 그걸 마주하는 당신은 어떤 기분이 들까. 그걸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영혼이라는 것은 일종의 비유와 같은 개념이고, 실제로는 인간의 뇌가 작용함으로써 나타나는 물질적 현상이 의식이자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뇌의 작용과 현상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그것을 인간의 정신과 구분할 수 없다고 봐요. 다만 뇌를 제외한 신체도 인간의 의식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보정할 것인가에 따른 차이는 있을 듯합니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을 테고, 기술적 이유로 구현에 실패할 수도 있겠죠. 소설 속 기술 수준은 실질적 구현으로 가는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하며 썼습니다. 과도기라 오히려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더 혼란스러워할 것 같아요.”
소설에서 딸이 엄마의 기억을 찾으려는 이유는 자신도 곧 엄마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낳고 난 뒤 심한 우울증으로 ‘자기만의 방’에 갇혀 살다 쓸쓸히 죽은 엄마의 심리를 알기 위해. 하지만 엄마의 기억이 도서관 내부 데이터에서 분실됐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것을 되찾고자 엄마의 흔적을 좇던 딸은 비로소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마인드 업로딩이 가능해진 미래 과학기술 자체보다 그것에 직면한 인간의 심리적, 윤리적 문제를 짚어내고 우아하게 풀어낸 점이 돋보였다. 특히 ‘관내분실’이란 독특한 개념이 눈길을 끌었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책을 도서관 밖보다 안에서 분실했을 때 더 찾기 어렵다는 사서분의 글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그래서 그런 상황을 일컫는 개념이나 용어가 있는지 검색해봤는데 없더라고요. 그래서 메모했던 것을 제목으로 먼저 삼고 그에 걸맞은 이야기를 구성해본 건데 다들 특이한 상상력이라며 좋아하시더라고요.”
5편의 가작 가운데 하나로 뽑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SF에서 익숙하게 봤던 우주여행 기술이 등장한다. 우주선을 둘러싼 공간을 4차원으로 일그러뜨려 거리를 단축하는 워프 항법, 오랜 여행시간을 견디게 해주는 냉동수면기술 딥프리징, 우주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고차원의 벌레구멍’을 통한 웜홀 항해.
소설은 워프 항법으로 다른 행성으로 이주한 가족과 떨어져 사는 여성 과학자 안나의 이야기를 다룬다. 안나가 가족과 만나려고 10여 년에 걸쳐 개발에 매달린 딥프리징 기술을 완성할 무렵 웜홀이 발견되면서 가족이 있는 행성으로 가는 워프 항로가 끊기는 바람에 이산가족이 된다. 그러자 항로가 다시 열리길 기다리며 자신이 개발한 딥프리징 기술로 냉동됐다 깨어나길 반복하는 슬픈 이야기다. 워프 항법과 웜홀 항해, 딥프리징 기술이 등장하는 SF는 많이 봤지만 이들 기술의 경쟁관계에 주목한 점이 독특했다.
“대학원 석사 과정에서 연구를 하면서 많은 논문을 읽었는데요. 저는 센서를 이용한 질병 진단이라는 확고하게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 연구를 하다 보니, 논문들이 단지 결과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비용, 진단 시간, 보관 기한 등을 비중 있게 언급하고 있는 것에 눈길이 갔어요. 정작 제가 연구하면서 가장 재미있고 관심 갔던 부분과는 다른 것들이었죠. 현대 과학연구라는 건 결국 실용성과 활용 가능성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들이 소설로 직접 연결됐다기보다, 안나의 연구가 주목받고 또 관심에서 멀어지는 과정을 쓰면서 반영됐던 것 같아요.”
우주여행 시대의 상실감과 소외
[조영철 기자]
4편의 과학적 소재가 모두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과학기술 자체보다 그것이 초래할 윤리적 문제나 인간 소외에 초점을 맞췄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의 SF에 대해 우아하다거나 섬세하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거기 있다. 그가 좋아하는 SF 작가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옥타비아 버틀러(1947~2006·‘킨’ ‘야생종’ ‘블러드 차일드’가 대표작)와 김보영 작가입니다. SF 하면 백인 남성 작가를 많이 떠올리는데 버틀러는 최초 흑인 여성 SF 작가로 흑인과 여성이라는 소수자 시점에서 SF의 지평을 넓혔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관점과 정체성을 소설에 적극적으로 녹여내면서, 동시에 ‘양가적 감정’, 나쁘다 좋다로 구분할 수 없는 복잡한 심리를 잘 그려내 늘 감탄하면서 읽게 됩니다. 김보영 작가는 고등학생 때 단편집인 ‘멀리 가는 이야기’와 ‘진화 신화’를 처음 읽고 한국 SF에 애정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신 분입니다. 두 분의 작품처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여운이 남는 작품을 좋아합니다.”
김보영 작가는 한국과학문학상 심사위원으로서 김 작가에 대해 “문장과 구성, 아이디어, 장르적 이해, 과학적 정밀함 모두 탁월하다”며 “신인이라 믿기 어려운 필력”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김초엽 작가는 “그분이 계셔서 한국 SF계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분의 찬사라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기뻤다”고 했다.
김보영 작가는 출판 전문 격주간지 ‘기획회의’에 발표한 ‘SF작가로 산다는 것’이라는 기고문을 통해 SF 같은 장르소설을 천대시하는 한국 문학계를 비판했다. 수십 개 넘는 문예지 가운데 SF를 실어주는 곳이 없고, 150개 넘는 문학상 중에서 SF 작품을 뽑는 데가 없으며, 전국 25개 일간지에 SF 부문 신춘문예가 하나도 없다면서. 해외 SF 작가는 우러러보면서 몇십 년 째 ‘한국은 SF 불모지’라는 말만 반복한다는 것이다.
“신인작가이다 보니 정확히 문제점을 짚어 말씀드리기 좀 어렵네요. 다만 제가 이번 공모전 당선 이전과 이후에 작품을 실은 지면은 모두 과학 분야에서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단지 소설 습작을 하는 걸 넘어 ‘SF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2016년 한국과학문학상 공모전이 열렸던 것을 본 이후입니다. 한국에선 장르적이라는 수식어가 작품성이 좋지 않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주류 문학에선 사실주의를 강조하는데 우리 시대에 과학을 떼놓고 현실이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한국 SF 작가들은 이런 현실을 바꾸고자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연말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가 출범했다. 김 작가가 운영이사를 맡은 이 단체에 참여한 SF 프로작가는 41명인데 그중 여성이 남성보다 많다고 했다.
“SF가 미래를 다루는 작품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내용이 많아서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봤습니다. 디스토피아를 다룬 작품도 세상이 그렇게 되선 안 된다는 강렬한 저항의식의 산물이라고 봐야 합니다. SF를 남성 중심의 장르라 생각하는 주류 문단의 인식은 그런 의미에서도 잘못됐습니다.”
김 작가는 올해 초부터 국가지식재산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문화예술 분야의 저작권과 과학기술 분야의 특허권 관련 국가 전략을 수립하고 정부 정책을 조율하는 일을 하는데, 민간위원 18명 가운데 1명이 김 작가다. 그만큼 과학과 예술 두 분야에서 전문성을 두루 인정받은 셈이다. 과학과 예술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제 아버지는 음악가세요. 오카리나와 드럼 연주도 하고 무대공연의 음악감독을 하기도 합니다. 아버지와 이야기하다 얻은 결론은 과학과 예술은 모두 세상에 없던 것을 찾아내는 분야라는 점입니다. 과학이 예전에 모르던 것을 새로 알아내거나 세상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내듯이 예술 역시 기존에 없던 것을 창조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작은 차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SF 대중화는 영화나 드라마 제작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요즘 할리우드 대작 영화의 상당수는 SF 작품이다. 반면 국내 SF를 극화하는 경우는 드물다. SF 불모지라는 환경 탓일까, 아니면 좋은 SF 작품이 없어서일까.
“아마 해외와는 다르게 영화에 들어가는 자본의 차이, 그리고 문학계와 비슷하게 현실 기반의 이야기를 주로 만드는 영화계의 분위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한국 관객에게 널리 사랑받았던 ‘인터스텔라’나 ‘마션’ 같은 영화는 어마어마한 투자가 들어간 작품이니 설령 원작이 있어도 영화화가 힘들 테고요. ‘지금 이곳과는 다른 세계’를 구현하는 데 힘을 쏟는 SF의 특성상 그동안은 여러 현실적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국은 SF 불모지’ 타령은 이제 그만
그런 상황에서 ‘관내분실’의 영화화에 관심을 보이는 제작사가 나왔다는 말이 들려왔다. SF 팬들에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영화화가 결정되면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할까. 추후 작품으로 어떤 작품을 구상 중인지도 궁금했다.“영화화가 된다면 러닝타임에 맞게 내용이 추가되고 각색이 들어가겠지만, 제가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제작하는 분들의 판단에 맡길 것 같습니다. 앞으로 장편소설을 준비하면서 틈틈이 단편을 쓰려고 해요. 장편소설은 2편 정도 구상 단계에 있습니다. 하나는 근미래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감정을 다루는 기술의 도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을 다룹니다. 다른 하나는 아주 먼 미래, 먼 우주를 배경으로 인류의 아종이 더 복잡하게 분기한 가운데 아종들끼리의 이해와 공존을 다뤄볼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2의 김초엽 작가를 꿈꾸는 SF 작가 지망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느냐고 물었다. 수줍게 웃으며 “아, 이건 어려운 질문이데요”라고 한참 뜸을 들이던 그는 글쓰기에 재능이 없다는 생각에 작가의 꿈을 포기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제가 소설 쓰기에 도전한 것이 3년 전이라 말씀드렸는데 크게 2가지가 도움을 줬습니다. 글쓰기에 관심 있는 주변 사람들과 글쓰기 워크숍을 하면서 서로의 글에 대해 품평을 나눈 것입니다. 그 와중에 작법서를 새로 읽었는데 제가 어릴 적 읽었던 작법서와 달리 요즘은 실제적 도움을 주는 내용이 많더라고요. 그것을 통해 재능이 없더라도 열심히 하면 걸작은 아니어도 남들이 읽어줄 만한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특히 SF는 글재주보다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 수 있는 장르라는 점에서 많은 분의 도전이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