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사회에서 이혼을 바라보는 시각이 무척 너그러워졌다. 부부가 한번 결혼하면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살아야 한다는 명분이 꽤 사라진 덕이다. 전반적인 다양화의 물결, 타인의 처지를 배려하는 소통문화의 정착에 힘입어 이혼자에 대한 차가운 시선이 많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황당한 일이 있다. 우리 민법 제844조 2항은 이혼한 날로부터 300일 이내 출생한 자식은 전남편이 아버지인 것으로 추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혼은 이미 오래전부터 파열의 요소가 복합돼 혼인관계의 의미를 흩어버리고 난 뒤 일어난다. 자연히 법적 이혼 날짜 전에 다른 사람과 애정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이혼 후 300일 내에 낳은 아이의 아버지가 전남편이 아니라면 아이의 출생신고를 못하고, 주민등록번호도 주어지지 않으며, 양육수당은 물론 신생아를 위한 국가 필수 예방접종 혜택도 받기 어렵다.
아이의 아버지를 전남편으로 정한 이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헌재)는 2015년 4월 30일 위헌결정을 내렸다. 그럼에도 재혼 여성이나 아이들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먼저 헌재의 책임 회피가 어른거린다. 헌재는 위헌결정을 하며 이 법률 조항의 효력을 국회가 개정 입법을 마련할 때까지 계속 적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위헌입법의 계속적인 적용 명령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로 한정돼야 한다. 이는 헌법재판 제도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확립한 이론이다. 재혼 후 낳은 아이 아버지를 법률이 마음대로 전남편으로 정해버리는 민법 조항이 과연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는지 의문이다.
다음으로 국회의 입법 지체가 문제다. 2년 반 전에 위헌결정이 내려졌음에도 국회는 대체입법을 마련하지 않았다. 헌재의 위헌결정이 나면 국회는 즉각 위헌성을 제거한 새로운 입법을 해야 한다. 헌재의 위헌결정이 기속력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국회는 헌재의 법률 위헌결정에 미적거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늑장 대응으로 정비되지 않고 있는 법률조항이 수십 개에 이른다. 이로 인해 국법질서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법무부는 4월에야 위헌결정의 취지를 반영하는 개정안을 마련했고, 9월 29일 국회에서 통과됐다.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것으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새로운 법률의 내용이 문제다. 가정법원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아이가 전남편의 자식이 아니라고 출생신고를 할 수는 있는데, 이 경우 가정법원은 혈액형 및 유전자 검사와 장기간 별거 등 제반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뒤에야 허가할 수 있다. 이 허가를 받으려면 재혼 여성은 전남편과 법정에서 만나야 해 자신의 재혼 사실과 아이의 출생이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혼의 아픔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하는 것이다.
이혼은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더욱이 국가가 제도적으로 부끄러움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남녀평등의 시각에서 재혼 여성의 인격권과 사생활 보호를 충족하는 내용을 담은, 더욱 충실한 개정 법률이 마련되기를 촉구한다. 이것은 새로 태어나는 아기가 축복 속에서 첫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 법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