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지도 적지도 않게 여행을 다녔다. 1년에 한두 번씩은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다시 한 번 꼭 가고 싶은 나라를 꼽으라면 영국이다. 먹거리가 빈약하고 물가도 비싸지만 다시 가고픈 이유는 당시 거의 한 달을 영국 음악도시 기행을 테마로 잡고 여행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고생깨나 했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추억이다.
런던과 에든버러, 리버풀과 맨체스터, 브리스톨, 그리고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을 방문했다. 영국 대중음악사에서 중요한 흐름이 발생한 도시들이다. 그곳을 직접 방문해 왜 그때 그런 음악이 생겨났는지 몸으로 느껴볼 작정이었다. 안 느껴지면 현지인을 붙잡고 따져 물어보기라도 할 각오였다. 그러나 작정과 각오는 필요 없었다.
런던의 첫인상은 지저분하고 탁했다. 하지만 하루가 채 되지 않아 그 안에 빼곡히 들어찬 문화 콘텐츠에 압도되고 말았다. 특히 가난한 젊은 아티스트가 몰려 있는 이스트 런던에서 마주친 온갖 새로운 형태의 음악과 전시에, ‘모든 멋진 것은 변방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절감했다. 벼룩시장으로 유명한 브릭레인 마켓을 헤매다 우연히 당도한 뒷골목. 젊은이 몇몇이 허름한 건물 앞에 모여 있었다. 안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귀를 잡아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세상에! 어느 아티스트가 자신의 작업실을 통째로 이용해 전시를 하고 있었다. 그건 일반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살인 사건 현장을 보는 듯한 자극적인 요소가 벽과 바닥을 메우고 있었다. 그 에너지가 엄청났다. 기성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내셔널 갤러리나 현대미술을 다루는 테이트 모던에서도 느낄 수 없던 에너지다. 이것이 바로 변방의 힘이구나, 새로운 기운은 변방에서 솟구치는 법이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힘이 시대를 바꾸고 질서를 만드는 법임을, 그 허름한 건물의 작은 전시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맨체스터에서 경험도 소중했다. 맨체스터의 좁은 시내를 벗어나면 곧 쇠락한 변두리가 드러난다. 1970년대 후반 자본주의의 요람에서 자본주의의 무덤으로 몰락했을 때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하루아침에 몰락한 노동자 계급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음악밖에 없었다. 그래서 맨체스터의 음악은 90년대까지 영국을 지배할 수 있었다.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가 어린 시절을 보낸 리버풀 교외는 마치 영원히 1960년대 모습을 간직할 각오라도 보여주는 듯 평화롭기만 했다. 비틀스 노래 가운데 어린 시절 추억을 담은 ‘Penny Lane’ ‘Strawberry Fields Forever’ 같은 곡이 왜 만들어졌는지 설명이 필요 없었다.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역 공기와 분위기가 그 도시의 음악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뭐랄까, 마치 농작물처럼 음악이 땅에서 열리는 느낌이었다.
이쯤 되면 ‘우리도 언젠가는…’이라는 결의가 생겨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서울, 그것도 홍대 앞을 제외하면 라이브클럽 개수를 꼽는 데 열 손가락이면 충분한 한국의 현실이 즉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문화의 다양성을 부르짖는다. 공허하다. 밭이 오직 한 곳뿐인데 어찌 여러 종의 작물을 거둘 수 있으리. 과실을 탐하기 전 밭부터 갈아야 하는 건 농사나 문화나 마찬가지일 텐데. 그래도 가끔 한숨을 쉬게 된다. 열흘에 이르는 추석 연휴를 맞이해 여행 중 보고 느끼고 경험한 온갖 것에 대한 그리움이 피어오르는 게 그 이유의 전부는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