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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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음악에서 발견한 生의 기쁨, 死의 찬미

파스칼 키냐르의 ‘음악 혐오’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7-08-21 17:4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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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에 관한 많은 글, 아니 대다수 글은 말하자면 연애편지다. 자신이 사랑한 음악에 대한 찬사다. 혹은 애정 어린 분석이다. 왜 음악은 우리를 사로잡는지에 대한 고찰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음악 혐오’를 집어 든 건 제목에 혹해서다.

    그는 300년간 오르간 연주자를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오르간,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익혔다. 영화화돼 그를 널리 알린 책 ‘세상의 모든 아침’도 바로크 음악의 미학을 다뤘다. 1992년에는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지원으로 베르사유 바로크 음악 페스티벌을 기획했고 ‘르 콩세르 데 나시옹’ 오케스트라를 주관했다. 그런 인물이 왜 부정적 냄새가 물씬 나는 책을 썼을까.

    하지만 책을 넘기면서 나는 이내 후회했다. 제목이 준 호기심에 이끌려 이 책을 열었던 것을. 저자가 과거와 현대, 동양과 서양, 종교와 신화를 넘나들며 꺼내놓은 이야기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듯 끊기고 널뛰었다. 일반적 서사에서 벗어나는 편린 덩어리다. 읽기 쉽지 않다. 누벨바그 시절의 프랑스 영화를 보는 듯하다. 쇤베르크 이후의 현대음악을 듣는 것 같기도 하다.

    자료를 찾아보니 키냐르는 음악가로서, 소설가로서 정점을 찍다 1994년 음악과 저술 활동을 전면 중단했다. 96년에는 급성폐출혈로 사경을 헤맸다. ‘음악 혐오’는 그사이에 쓴 것이다. 활동을 멈춘 2년간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핏속에 새겨진 음악으로부터 왜 도망쳤던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며 추론해본다.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공백기와도 같은 시간 동안 키냐르는 음악의 근원으로 회의적 사유를 떠난 것이라고.

    그 사유 여행을 통해 키냐르는 음악의 힘이란 마치 칼과 같은 것임을 성찰했고, 이 생각을 역사와 신화로 제시한다. 두부를 종잇장처럼 얇게 써는 주방장의 칼솜씨 같은 음악의 쾌감에 우리가 넋을 놓고 있을 때, 1980년 5월 광주의 학살자들은 총검으로 무고한 시민을 찔렀다.



    음악 또한 이러한 양면성을 가졌다. 저자는 ‘오디세우스’의 세이렌을 통해 음악이 주는 아름다움은 곧 죽음에 이르는 덫임을 논한다. 아우슈비츠에 이르러 마침내 음악은 죽음의 전조 곡으로 신화에서 현실에 당도했다. 수용소 병원에 갇힌 유대인은 가스실로 끌려가기 전 병실에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공연을 강제로 봐야 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던 홀로코스트 현장에는 활이 현을 그어 만들어내는 선율이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음악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징발된 유일한 예술 장르다’. 인류 최초의 현악기 ‘리라’가 사냥과 전쟁에서 다른 생명을 죽이는 데 사용된 활의 떨림에서 착안해 만들어진 악기임을 떠올리면 음악과 죽음이 공유하는 시원의 궤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키냐르는 과연 음악을 ‘혐오’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을 볼 때 비로소 달의 전체를 인식할 수 있듯, 키냐르는 음악의 양면성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결국 음악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것은 온전한 깨달음의 순간이며, 음악 안에서 음악 밖으로 우리를 이끄는 매개의 발판이 된다. ‘음악 혐오’ 이후 쓴 ‘부테스’에서 키냐르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이끌려 바다로 뛰어든 부테스를 통해 음악은 인간의 의지를 뛰어넘는 유혹이라고 말한다. 결국 ‘음악 혐오’는 음악이 ‘생의 기쁨’일 뿐 아니라 ‘사의 찬미’이기도 하다는, 사고의 직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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