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사람은 대부분 낯설게 느낀다고 한다. 평소 자신의 목소리보다 가볍게 들린다는 것이다. 두개골을 타고 울리는 진동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온 까닭에 스피커를 통해 듣는 목소리는 생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자신의 목소리를 법정에서 음성 파일로 듣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장담컨대 유쾌하지는 않을 테다.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기술 덕에 일반인도 마음만 먹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녹음이 가능한 시대가 됐다. 서면이나 반대 증거가 부족한 분쟁 당사자는 녹음 유혹에 쉽게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상대방이 ‘쥐도 새도 모르게’ 발언한 내용이 녹음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7월 24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국정원)장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의 파기 환송심 마지막 재판에서 원 전 원장의 발언 내용이 담긴 녹취록이 증거로 제출됐다. 박근혜 정부 시절 법원에 제출할 당시 보안상 이유로 삭제된 부분이 복원된 것이다. 녹취록이란 사전적 의미로 녹음한 것을 글로 옮겨 적은 것이다. 따라서 형사재판의 엄격한 증거주의에 비춰 녹취록은 증거능력이 없다. 이에 원자료인 음성 파일의 해당 부분이 법정에서 음성으로 재현됐을 것이다. 실제로는 녹음 파일이 증거인 셈이다.
항소심 마지막 재판에 출석했던 피고인으로서는 자신의 육성을 법정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당황했을 법하다. 더욱이 그 내용이 자신을 옥죄는 것이라면 말이다. 대법원이 파기 환송 결정을 하면서 원 전 원장의 유죄를 입증할 각종 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던 관계로 검찰로서는 이른바 국정원 심리전단의 대선 개입을 입증할 만한 직접적 증거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녹취록에는 원 전 원장이 선거에 적극 개입하고 온·오프라인에서의 대국민 심리전을 지시한 정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지방단체장 선거가 11개월 남았는데 우리 지부에서 후보를 잘 검증해야 한다. 1995년 선거 때도 구청장 본인이 원해서 민자당 후보 나간 사람 없고 국정원에서 다 나가라 해서 한 거지.”(2009년 6월 19일 회의)
“현재도 하고 있지만 보다 더 강화되어야 한다. 심리전이란 게 대북심리전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에 대한 심리전이 꽤 중요해요.”(2012년 4월 20일 회의)
원 전 원장의 의도만큼은 명백히 드러난 셈이다. 그러나 녹취록은 피고인의 혐의를 뒷받침하는 정황증거 내지는 방증(傍證)에 불과하다. 항소심 재판부가 녹취록의 증명능력을 어디까지 인정할지, 심증을 어떻게 형성할지 오리무중이다. 8월 30일 선고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복원된 녹취록이 원 전 원장이 연루된 현 재판에서는 간접증거로 그칠지언정, 앞으로 이뤄질 적폐청산 작업에서는 그 가치가 전혀 다르다. 과거 정권이 정치적 목적으로 국정원을 이용해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국민의 심리를 조정하고 조작하려 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스모킹건(smoking gun)이기 때문이다. 녹취록 복원은 국정원개혁발전위원회 산하 적폐청산 태스크포스가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국내 정치 개입 의혹이 불거진 사건들을 자체적으로 조사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나온 첫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 파괴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