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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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잃어버린 30년’ 답습 기로에 선 한국, 출구는 없나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고래 된 한국, 한미일 협력해도 중국·러시아 버리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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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경 기자

    hklee9@donga.com

    입력2023-10-1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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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국을 꿈꾸며 한 번씩 해외로 팽창할 때마다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를 흔들어놓은 나라가 일본입니다. 첫 번째가 임진왜란이고, 두 번째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대륙 침략과 태평양전쟁이죠. 그리고 현재 세 번째 시작된 일본의 대외 팽창은 미·중 패권전쟁으로 비화하고 있으며, 한국은 또다시 직접적 피해국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원장. [박해윤 기자]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원장. [박해윤 기자]

    일본과 다른 길 걸어 만든 ‘세계화의 기적’

    국내에서 일본 경제를 심층 연구하는 석학인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원장이 최근 펴낸 책 ‘일본이 온다’가 화제다. ‘일본의 부상, 한국 경제의 위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에서 그는 “일본이 새로운 대외 팽창을 시도하며 국제 질서의 판을 흔들고 있다”고 분석한다. 또한 그는 미·중 패권전쟁으로 국제 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또다시 아시아 패권국을 꿈꾸는 일본과 세계 10위 경제대국이자 세계 7위 통상대국인 한국의 관계를 진단하고, 한국이 일본을 넘어서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제안한다.

    김 원장은 서울대 경영대학 학사를 마친 뒤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1996년 일본 게이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쓰쿠바대 부교수를 거쳐 2002년부터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대 일본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저성장 시대 기적의 생존 전략’ ‘세계 최고기업은 어떤 전략으로 움직이는가’ 등 40여 권의 책을 발표했으며 그중 일부는 영어,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어로도 출간됐다.

    책 제목 ‘일본이 온다’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흔히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표현하는데 실제 우리는 바로 옆 나라인 일본에 대해 잘 모른다. 일본은 대(對)한국 전략을 오래전부터 세워 계승하고 발전시킨 반면, 한국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을 때만 연구해야 된다고 강조할 뿐 이내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역사 흐름 속에서 일본이 대한국 전략을 파노라마처럼 연결해오고 있다면, 우리는 스냅 사진 몇 장으로 일본을 이해하는 식이다. ‘일본이 온다’는 은유적 제목으로, 좀 더 정확히 설명하면 ‘일본이 한반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 20세기 초 식민지화를 통해 한반도에 밀려왔는데 현재 또다시 세 번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부제로 표기된 ‘일본의 부상’은 정치외교적 부상을 의미한다. 일본은 2012년부터 치밀하게 세운 세계 전략에 따라 한국, 중국, 미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그렇다면 일본은 왜 2012년부터 달라졌으며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일본 시각에서 설명하고, 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등을 책에 담고자 했다.”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른 데는 일본의 도움도 있었다.

    “한국 경제발전사는 일본과의 관계 안에서 봐야 한다. 우리가 경제개발을 시작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30년간은 일본과 함께했기에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미국과 소련이 대결하던 냉전시대에 일본·미국의 힘을 빌렸기에 최빈국에서 벗어나 개발도상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이 개방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일본과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며 ‘세계화의 기적’을 이뤘다. 탈냉전시대를 맞아 일본·미국에만 의존하는 대신 이념을 다 버리고 전 세계로 뻗어나가 경제 영토를 늘림으로써 선진국 대열에 오를 수 있었다. 나는 ‘한강의 기적’보다 ‘세계화의 기적’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데, 최근까지 개발도상국 지위에 오른 나라는 130여 개국에 이르지만 선진국이 된 사례는 30여 개국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 흐름을 봐야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있다.”



    한국이 ‘세계화의 기적’을 이루는 동안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보냈다.

    “전후 펄펄 날던 일본 경제는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장들이 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에 모여 달러화 약세를 유도하기로 한 합의. 달러 가치를 내리고 엔화 가치를 높인다는 것이 골자)를 받아들이면서 악순환의 첫 단추를 끼웠다. 당시 일본이 ‘노’라고 말하지 못한 배경을 알려면 일본과 미국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원래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했을 때 필리핀 같은 농업국가로 개발될 예정이었지만 6·25전쟁이 터지면서 기지국가로 거듭나 경제성장을 이뤘다. 그러면서 일본은 안보는 전적으로 미국에 의지하고 모든 돈을 경제개발에 쏟아붓는 선택을 했다. 그러다 보니 플라자 합의 당시 일본 정치인들이 지경학이 아닌, 지정학적 판단에 따라 미국 측 제안을 받아주는 실수를 했고, 또 엔화 절상으로 수출이 망가질 수 있다는 판단에 갑작스럽게 내수 부양 정책을 쓰는 실수를 또 한 번 하면서 주식과 부동산에 버블이 발생해 장기침체로 가버린 것이다.”

    일본이 노리는 것은 ‘재팬 프리미엄’

    일본이 장기침체에 빠져 헤매는 동안 한국은 일본을 추격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를 ‘역사의 분기점’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앞서 플라자 합의를 받아들인 일본의 정치적 선택이 이후 30여 년을 바꿔놓았듯이, 지금 한국도 그와 같은 변곡점,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뜻이다. 미·중 패권전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선택을 요구받고 있으니 말이다. 북한 핵 위협 때문에 한미일 협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외교 안보적 선택이지, 경제적 선택은 다를 수 있다. 한미일 협력을 하면 마치 중국과 러시아는 버려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안 버릴 수 있다. 그것이 내 메시지의 핵심이다. 세계가 블록화되는 와중에도 얼마든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와도 거래할 수 있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이고, 그래야만 경제위기에 직면하지 않을 수 있다.”

    한국이 어느 한 곳을 선택하지 않고도 존립이 가능한가.

    “그것이 가장 핵심적인 논쟁 포인트인데,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이룬 새우와도 같은 작은 규모의 경제일 때는 미국과 일본만 선택해도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30년 동안 한국 경제는 탈이념화하면서 세계 10대 경제대국, 7대 통상강국으로 커졌다. 이미 새우가 아닌 고래가 된 한국은 글로벌 경제 영토가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지, 특정 지역에 갇히면 왜소해지거나 굶어 죽을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미국이 대러시아 제재를 제안하자 실제 동참한 나라는 몇 개국이 안 된다.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등 한국보다 경제 규모가 작은 나라도 대거 동참하지 않았다. 국익에 따른 선택이었다. 유럽연합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이라서 대러시아 제재에 참여했지만 미·중 패권전쟁 속에서는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잇달아 중국을 방문하자 미국이 화를 냈는데, 두 사람 모두 국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심지어 중국과 대립 중인 일본과 미국도 기업인들이 중국을 방문하는 등 양다리 전략을 취하고 있다. 우리는 전 세계가 대립하면 한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나라들은 싸울 때는 싸우지만 협력할 때는 협력하는 유연한 전략을 갖고 움직인다. 외교는 흑백일 수 있으나 경제는 회색지대가 있기에 굴러간다. 지금 우리는 이걸 놓치고 있다.”

    한미일 협력이 왜 우리에게 득이 될 수 없나.

    “2012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싸고 시작된 일본과 중국 간 갈등에 미국을 끌어들인 것이 미·중 패권전쟁의 시작으로, 미국과 중국이 대립할수록 대만에는 지경학적으로 디스카운트가 발생하는 반면, 일본에는 프리미엄이 생긴다. 이렇게 긴장이 형성된 지역을 전장이라고 하는데, 대만이 전쟁터와 비슷한 상황이 되자 주요 기업들이 대만을 빠져나와 일본으로 가지 않았나. 일본은 전장이 아닌 기지국가이기에 프리미엄을 얻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한미일로 묶이면 한국마저 전장국가가 돼 디스카운트를 당하고, 일본의 프리미엄은 2배가 되는 것이다. 일본이 그려놓은 큰 그림에 잘못 들어가면 우리가 큰 손실을 입을 뿐이다. 일본과는 일반적인 국가로서 대등하게 교역하고 거래하며 협상하는 관계가 적당하다.”

    지루한 싸움 될 미·중 패권전쟁, 판 잘 읽어야

    다시 대외 팽창을 시작한 일본이 그리는 그림은 무엇인가.

    “지난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우리 언론은 ‘미국 대통령이 일본보다 한국을 먼저 방문했다’ ‘한국 첨단기술을 높이 평가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하지만 정작 다음 날 일본을 방문한 바이든 대통령이 뭘 했는지 자세히 보도되지 않아 국민은 잘 알지 못한다. 그곳에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미국이 주도하는 다자 경제협력체) 출범식이 열렸는데, 중앙에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오른쪽에 바이든 대통령, 왼쪽에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앉아 있는 출범식 사진이 아시아 지형, 세계 패권 지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서남아시아 패권국은 인도, 동북아시아 패권국은 일본으로 판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아시아 패권국이 돼 대만 디스카운트, 한국 디스카운트, 경우에 따라서는 차이나 디스카운트 수혜까지 누리는 재팬 프리미엄을 꿈꾼다.”

    최근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고 있는 일본 경제는 부활할까.

    “지금 일본이 누리는 경제 활력은 앞서 말한 지경학적 프리미엄 덕분이다. 하지만 오랜 장기침체 여파가 남아 있어 지정학적 구도를 이용한 지경학적 프리미엄을 빼고 일본 기업과 일본 가계의 힘만으로는 부활하기 힘든 구조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의 힘을 빌려 산업 경쟁력, 반도체 경쟁력 등을 높이려 하는데, 내가 볼 때는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 같다. 미국의 변수 때문이다. 일본이 기초체력이 약화된 상태이듯, 미국도 과거의 미국이 아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여러 전쟁을 치르며 군비를 낭비한 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이제는 소위 동맹국한테 손을 벌려야 할 정도로 약화됐다. 그렇다고 중국에 패권을 넘겨줄 정도냐 하면 그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과거 일본을 주저앉혔던 것처럼 중국을 주저앉힐 힘은 없다. 따라서 미·중 패권전쟁은 대립도 하고 협력도 하면서 지루하게 밀고 당기는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이 1.4%로 전망되면서 “일본을 따라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잘못된 선택과 과정을 밟는다면 그럴 수 있다. 당장 올해 25년 만에 한국과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역전됐다. 미·중 패권전쟁 판을 잘못 읽어 대중 수출에 문제가 생기면서 1차 충격이 왔고, 정부 재정건전성을 지킨다고 내수를 부양하지 않으면서 2차 충격이 오고 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마치 플라자 합의로 충격이 닥쳤을 때 대외 정책에 실패하고 이후 버블 관리에도 실패한 일본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는 기시감을 준다. 지금은 숄츠 독일 총리가 얘기했듯이 대전환기, 변곡점이다. 이제 이 판을 어떻게 읽고 대응할지에 따라 한국 경제의 성패도 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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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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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주간동아 이한경 기자입니다. 관심 분야인 거시경제, 부동산, 재테크 등에 관한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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