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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은 새 부대에, 이 술은 이 잔에

[명욱의 술기로운 생활] 술맛 돋우는 술잔 이야기

  • 명욱 주류 문화 칼럼니스트 blog.naver.com/vegan_life

새 술은 새 부대에, 이 술은 이 잔에

회식이나 모임이 거의 사라진 요즘, 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이 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술을 즐길 때 한층 더 기분 좋게 마시는 방법은 뭘까. 바로 좋은 술잔을 고르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으며 술을 따르고 입술과 맞닿는 잔은 주류 아이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굿즈(goods)라고 할 수 있다.


사발 같은 고대 그리스 와인 잔

고대 그리스 와인 잔 킬릭스(kylix). 볼처럼 넓은 잔은 술을 따르기도, 다양한 향신료를 섞기도 편했다. 마치 화채처럼. [위키피디아]

고대 그리스 와인 잔 킬릭스(kylix). 볼처럼 넓은 잔은 술을 따르기도, 다양한 향신료를 섞기도 편했다. 마치 화채처럼. [위키피디아]

와인 잔의 가장 큰 특징은 스템(stem), 즉 다리(손잡이)가 달렸다는 점이다. 이러한 형태의 잔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있었다. 그리스인은 우리와 달리 침대나 테이블 등에서 와인을 즐겼는데, 주로 서 있는 상태에서 술을 따라주곤 했다. 그렇다 보니 키가 작은 잔보다 큰 잔이 훨씬 편했다. 다양한 허브를 넣어 마시는 경우도 많아 섞기 편한 넓은 잔이 유용하게 쓰였다. 


카라바조가 그린 와인의 신 바쿠스(디오니소스) 역시 넓은 와인 잔을 썼다. [위키피디아]

카라바조가 그린 와인의 신 바쿠스(디오니소스) 역시 넓은 와인 잔을 썼다. [위키피디아]

유리에 담긴 와인은 15세기부터 조금씩 상업화되기 시작한다. 다만 당시에는 목재로 열을 내다 보니 높은 온도를 낼 수 없었고, 표면이 자꾸 깨져 상용화되지 못했다. 1600년대 목재가 아닌 석탄을 때면서 고온으로 유리를 가공할 수 있었고, 점차 강도 높은 유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1700년대 들어서는 강한 탄산의 내압을 버틸 만한 유리가 나오면서 샴페인이 등장할 수 있었다.

지금보다 작았던 와인 잔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 나온 와인 잔. 지금보다 볼이 훨씬 넓었다.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 화면 캡처]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 나온 와인 잔. 지금보다 볼이 훨씬 넓었다.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 화면 캡처]

당시 와인 잔은 지금보다 현저히 작았다. 유리에도 세금이 붙었기 때문이다. 1745년에는 아예 유리잔 세(Glass Tax)를 부과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두꺼운 유리 손잡이가 얇아지거나 속이 빈 상태로 출시됐다. 

1800년대 와인 잔은 지금보다 작기도 했지만 표면에 장식이 많았다. 디자인도 지금처럼 입구가 좁은 달걀형보다 입구가 넓은 나팔형이 많았다. 특히 샴페인은 넓고 얕은 잔에 따라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입구가 넓으면 탄산이 빨리 사라져 트림 등을 유발하지 않아 좀 더 우아하게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투명한 달걀 모양의 와인 잔은 언제부터 나왔을까. 의외로 역사가 짧다. 1950년대 오스트리아 유리제조사 리델이 처음 제조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이탈리아로부터 기존 제품과 달리 와인이 많이 들어가는 잔을 제작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민하던 리델사는 유리의 두꺼운 느낌이 술맛을 방해할 수 있어 잔을 얇게 제작했다. 디자인 역시 향이 모아지도록 입구를 좁게 만들었다. 동시에 지역별 와이너리와 협업해 생산자가 추구하는 맛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도록 했다. 

그렇다면 어떤 잔에 어떤 와인이 가장 잘 어울릴까.


깊은 향과 진한 향 느끼기 좋은
보르도 타입 와인 잔

보르도 
타입 와인 잔. [사진 제공 · 리델코리아]

보르도 타입 와인 잔. [사진 제공 · 리델코리아]

와인을 담는 부분을 볼(bowl)이라고 한다. 볼이 깊고 클수록 향을 맡기 좋다. 와인 표면에 닿는 면적이 넓을수록 휘발성 물질이 증발하며 향을 더 일으키고, 코를 가까이 대고 향을 맡기도 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최대한 끌어낸 게 보르도 타입 와인 잔이다. 튤립 스타일로도 불리는 이 잔은 입구가 좁은 스타일로 향을 오래 머물게 하며, 잔 자체가 긴만큼 스월링(잔을 흔들며 향을 돋우는 것)이 쉽고 다양한 향을 맡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보르도 타입이라고 부르지만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해당 포도 품종을 블렌딩한 제품이라면 국적과 상관없이 잘 어울린다.


부드러운 향을 즐기기 위해 볼이 짧고 넓은
부르고뉴 타입

부르고뉴 
타입 와인 잔. [사진 제공 · 리델코리아]

부르고뉴 타입 와인 잔. [사진 제공 · 리델코리아]

짙은맛을 자랑하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달리 섬세한 산미와 과실 맛을 원한다면 프랑스 피노누아 품종을 언급할 수 있다. 이러한 와인에 가장 잘 맞게 설계된 것이 피노누아 주산지 부르고뉴 타입의 와인 잔이다. 보르도 타입보다 면에 닿는 면적이 넓은 둥근 형태지만 볼 자체는 다소 짧아 부드러운 맛과 향을 느끼기 좋다.


대중적인 화이트 와인 잔

화이트 
와인 잔. [사진 제공 · 리델코리아]

화이트 와인 잔. [사진 제공 · 리델코리아]

화이트 와인 잔은 보르도 타입과 비슷하나 다소 작다. 이렇게 작은 이유는 화이트 와인의 음용 온도가 레드 와인보다 낮기 때문이다. 레드 와인을 주로 상온 상태로 마신다면, 화이트 와인은 10도 전후로 차갑게 마시는 경우가 많다. 즉 조금만 따라 차가울 때 빨리 마시기 위해 크기를 조절했다고 볼 수 있다. 범용성이 높아 레드 와인은 물론 전통주, 사케, 샴페인 잔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파티를 위해 폭이 좁아진 샴페인 플루트 잔

샴페인 
플루트 잔. [사진 제공 · 리델코리아]

샴페인 플루트 잔. [사진 제공 · 리델코리아]

샴페인 잔은 일반적으로 플루트(flute) 잔이라고 한다. 플루트와 같이 긴 형태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 잔은 주로 스탠딩 파티에서 쓸 용도로 고안됐다. 샴페인 자체가 파티나 축제에 어울리는 것도 있지만, 파티 테이블 자체가 워낙 좁다 보니 넓고 큰 잔을 많이 놓기 어렵기 때문이다. 잔의 폭이 좁은 만큼 기포가 뭉쳐서 집중적으로 올라오고, 이로 인해 아름다운 기포가 눈에 잘 띄기도 한다. 다만, 폭이 너무 좁은 나머지 스월링이 잘 되지 않아 최근에는 볼이 조금 넓은 달걀형 샴페인 잔이 선호되기도 한다.


다리 없는 와인 잔과 빈티지 샴페인 잔

스템리스 잔(왼쪽). 빈티지 잔. [사진 제공 · 리델코리아]

스템리스 잔(왼쪽). 빈티지 잔. [사진 제공 · 리델코리아]

와인 잔의 스템이 번거롭다고 느끼는 소비자 사이에서 최근 스템 없는 와인 잔이 인기다. 또 폭이 넓고 얕은 빈티지 잔은 향을 빨리 배출시켜 숙성 향이 과한 와인에 잘 어울린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와인 잔에 비판적인 의견도 있다. 와인 맛이 달라지는 건 플라시보 효과이며, 일종의 마케팅이라는 것. 이는 개인이 판단할 몫이며, 잔 선택 또한 꼭 이 기준에 따를 필요는 없다. 핵심은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것이다. 엄경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학과장은 “같은 와인이더라도 각기 다른 와인 잔으로 맛본다면 또 한 번 와인의 세계가 넓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간동아 1279호 (p54~55)

명욱 주류 문화 칼럼니스트 blog.naver.com/vegan_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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