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두듯 상대방 존중하는 정치해야"

임채정 한국기원 신임 총재

  •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입력2019-06-2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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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전남 나주 광주일고, 고려대 법대,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14~17대 국회의원, 17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1941년 전남 나주 광주일고, 고려대 법대,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14~17대 국회의원, 17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이해찬보단 세고 유인태보단 약해.” 

    그는 입꼬리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기사 보고 항의하지 않을까요.” 

    “항의? 내가 제일 많이 둔 게 이해찬인데, 그렇게는 못 할걸.”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은요?” 



    “거긴 나보다 확실히 세.” 

    바둑 팬 대부분이 앓고 있는 ‘자기 기력 과신’ 증상이 아니라면 그는 이 대표에게는 승률이 앞서고 유 사무총장에게는 2점 이상 놓는 것 같았다. 

    국회의장을 지낸 임채정(78) 한국기원 신임 총재와 인터뷰는 실력 확인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몇 급, 몇 단 등 정확한 기력은 밝히지 않는 대신 이 대표에 대한 비교우위를 주장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임 총재는 5월 29일 총재로 취임했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지난해 11월 총재직에서 사퇴한 이후 한국기원은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운영됐으나 사실상 표류했다. 그 과정에서 국내 대표 기전인 ‘KB국민은행 바둑리그’도 8개 팀 중 6개 팀밖에 구하지 못해 5월 시즌 개막을 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임 총재는 그의 말대로 ‘갑자기 등판’했다.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던 윤승용 한국기원 이사가 삼고초려로 모셨다는 얘기가 한국기원 주변에 돌았다.

    갑자기 등판한 구원투수

    5월 29일 한국기원 신임 총재로 취임한 임채정 총재. [사진 제공 · 한국기원]

    5월 29일 한국기원 신임 총재로 취임한 임채정 총재. [사진 제공 · 한국기원]

    한화갑 전 의원에 이어 두 번째 정치인 출신 총재인 그의 앞에 한국기원이 그동안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40년간 정치권에 몸담아온 정무 감각과 균형감을 발휘해 난제들을 풀어갈 수 있을까. 최근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 총재실에서 그를 만났다. 

    언제 바둑을 배웠나요. 

    “배우기는 뭘…. 초등학생 때 아버지가 두는 것을 보고 재미있으니까 동생하고 뒀어요. 정석, 포석 이런 거 다 모르고 그냥 따먹기 놀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러다 중학생 때 조남철 선생의 ‘위기개론’을 봤어요. 완전히 신세계가 열렸죠. 거기 나온 걸 이해하지 못해도 달달 외웠어요. 이후 어딜 가도 바둑 좀 둔다는 얘기를 듣게 됐는데 아직도 동네 싸움바둑입니다.” 

    프로기사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기사가 있나요. 

    “두루두루 좋아해요.” 

    한국기원 총재가 특정 기사를 지목하기가 그랬는지 빙긋 웃으며 능숙하게 질문을 넘겼다. 

    이어 정치인 시절 바둑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없느냐고 묻자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잊고 싶은 과거를 되살리기 싫다는 듯. 이윽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혼난 적이 있어요. 국록을 먹는 의원이 의정 활동은 하지 않고 바둑이나 두고 있어 되겠냐고.” 

    그를 혼낸 사람은 누구였을까. 엄혹하던 시절 바둑을 그저 잡기로 여겼으니 그랬을 법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혼나도 ‘바둑의 무한한 재미’를 임 총재는 포기하지 못했다. 

    [동아DB]

    [동아DB]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바둑이 유용한 점은 무엇일까요. 

    “바둑처럼 유장하면서도 세련되고,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게임이 없어요.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 유산이라고 할 수 있죠. 4000년을 한결같이 이어왔다는 건 ‘불후’라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알파고 이후 인공지능(AI) 바둑프로그램이 인간 실력을 능가하면서 바둑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기계가 인간보다 낫다는 데 실망한 심정은 이해가 돼요. 바둑에 대해 그동안 일방적인 신비감과 경외감을 갖고 있었는데 그게 깨졌으니까요. 하지만 시속 200km 스포츠카가 있다고 마라톤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죠. 만약 인간이 마라톤에서 2시간 벽을 깨면 여전히 경이롭고 충격적인 일이죠. 스포츠카는 15분이면 가는 거리에 불과하지만요. 결국 인간이 하는 것은 인간의 것이고, 기계가 하는 것은 기계의 것입니다. 기계가 두는 바둑은 오직 수읽기와 승률, 승부밖에 없어요. 인간의 바둑엔 희로애락과 인생, 감정이 들어가 있죠. 비교 대상이 아닌 겁니다. 사실 바둑계가 너무 큰소리쳐온 것도 한몫했죠. 기계가 인간을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다고 했는데 그게 깨지니까 부메랑이 돼 돌아온 겁니다.” 

    지금 바둑 기전이 많이 사라져 프로기사가 뛸 무대가 없어지고, 그만큼 바둑 팬의 흥미도 끌지 못하게 되면서 바둑계가 전체적으로 침체기를 겪고 있습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그것 때문에 저를 부른 것 아닙니까. 저도 돕고 싶어서 응했는데 생각보다 심각하긴 합니다. 일단 KB국민은행 바둑리그는 급한 불은 껐어요. 2개 팀을 추가해 8개 팀으로 구성될 것 같습니다. 다만 시작 시점을 언제로 하느냐는 고민거리예요. 7월부터 시작하자는 의견과 늦어진 김에 스포츠 비수기인 11월에 출발하자는 의견이 있어요. 중지를 모아봐야죠.” 

    인구조사를 해보면 바둑 인구가 700만 명이라고 하는데 그에 비하면 바둑 인기를 체감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야구나 축구는 ‘관중’이라는 기초재원이 있습니다. 바둑은 둘 줄 아는 사람은 많은데 관중은 별로 없어요. 그러다 보니 스폰서가 붙지 않는 거죠. 결국 돈 내고 경기 구경하거나 물건을 사는 사람이 없다는 구조적 약점을 가진 셈이에요. 원론적으로는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요. 이 점을 어떻게 메워나가느냐가 바둑 발전을 위한 기본 전제 조건인데 많은 노력과 아이디어가 필요해요.”

    “바둑 두듯 정치해라”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오른쪽)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임채정 한국기원 총재. 문 대통령은 아마 3단 실력으로 알려져 있다(왼쪽). 임채정 총재는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와 가장 많이 바둑을 뒀다고 했다. [동아DB]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오른쪽)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임채정 한국기원 총재. 문 대통령은 아마 3단 실력으로 알려져 있다(왼쪽). 임채정 총재는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와 가장 많이 바둑을 뒀다고 했다. [동아DB]

    ‘바둑 진흥법’이 만들어져 정부 차원의 지원이 쉬워졌다고 하던데요. 

    “스폰서가 붙는 수익 재원이 확보돼 있지 않기 때문에 생활체육처럼 정부 지원이 필요한 건 맞아요. 법을 좀 들여다봤더니 일반 원칙만 있고 특별한 방향이나 어떻게 하겠다는 세부항목은 별로 없어요. 이것도 결국 한국기원이 만들어갈 수밖에 없죠.” 

    바둑 보급을 위해선 바둑의 효용성을 강조할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같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유장한 바둑이 잘 안 어울릴 수 있어요. 하지만 반대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바둑이 갖고 있죠. 게임 중독에 대한 효과적 대안이 될 수도 있고 수리능력, 사회성, 집중력 같은 것을 키우는 데도 상당히 효과적이에요. 인성개발 측면에서도 활용할 수 있고요. 이것을 잘 어필해 바둑 교육의 제도화에 나서볼 생각입니다.” 

    아마추어 바둑 단체인 대한바둑협회(대바협)와의 역할 분담이나 조직 통합도 바둑계의 현안인데요. 


    “한국기원은 프로, 대바협은 아마로 분류하는데 서로 관장하는 업무가 애매한 것 같습디다. 또 바둑이 스포츠로 분류돼 있으니 엘리트체육, 생활체육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다른 종목에선 최근 둘을 합치는 추세입니다. 정부 지원을 받는 문제 등도 조정해야 하고요. 서로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데 바둑 발전을 위해 분리된 상태가 맞는지는 따져보겠습니다. 바둑 채널도 2개가 있는데, 시장이 작은 상황에서 2개씩 있을 필요가 있는지도 검토해보려고요.” 

    진부한 질문이지만, 요즘 어지러운 시국을 바둑에 빗대어 한 말씀해달라고 했다. 그는 “끝까지 고문한다”며 손사래 치다 우문에 현답을 내놓았다. “바둑 두듯 정치하면 됩니다.” 

    상대가 있어야 바둑을 둘 수 있는 것처럼, 바둑판 앞에 앉지 않거나 바둑판을 박차고 나가지 않는다면 상대와 상대의 수를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인터뷰가 끝나고 사진 촬영에 들어가기 전 좀 더 강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그가 이렇게 말했다. 

    “인공지능 바둑과 사람의 바둑을 절대 비교하면 안 돼. 혼이 없어, 혼이…. 그게 진짜 바둑이라 할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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