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변심

친중에서 친미로 급선회…중국의 티투섬 포위 전략에 발끈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19-04-22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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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이 실효지배 중인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제도의 티투섬(왼쪽). 필리핀 어민들이 마닐라의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CSIS, rappler]

    필리핀이 실효지배 중인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제도의 티투섬(왼쪽). 필리핀 어민들이 마닐라의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CSIS, rappler]

    티투섬은 면적이 0.33km2밖에 되지 않지만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제도(중국명 난사군도, 베트남명 쯔엉사 군도, 필리핀명 칼라얀 군도)에 있는 섬들 가운데 두 번째로 크다. 필리핀이 실효지배 중인 이 섬에는 주민 60여 명이 살고 있고, 초등학교도 있다. 또 필리핀 해안경비대 병력 20여 명이 주둔 중이다. 필리핀명으로 파가사섬, 중국명으로 중예다오(中業島)로 불리는 이 섬은 동쪽으로 480km 떨어진 필리핀 서부 팔라완주에 속해 있다. 특히 이곳에는 길이 1300m의 활주로가 자리하고 남중국해 상공을 지나는 항공기들을 추적할 수 있는 장비도 설치돼 있다. 이 때문에 이 섬은 남중국해의 전략 요충지라는 말을 들어왔다. 
     
    또 이 섬은 중국이 스프래틀리 제도에 미사일을 배치한 3개의 인공섬 가운데 하나인 수비암초(중국명 저비자오, 필리핀명 자모라)와 거리가 12해리(22km)밖에 되지 않는다. 베트남이 실효지배 중인 사우스웨스트카이섬(베트남명 송뚜따이섬, 중국명 난즈다오)과는 38.4km 떨어졌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티투섬을 비롯해 스프래틀리 제도에 있는 모든 섬과 암초 등을 자국 영토라고 주장해왔다.

    중국 어선들의 ‘양배추 전략’

    티투섬 인근 해상에는 현재 중국 선박 수백 척이 몰려와 포진하고 있다. 중국 어선들은 1월부터 티투섬 주변을 둘러싼 채 고기잡이도 하지 않고 교대로 며칠씩 정박하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필리핀 어선들은 이 지역에서 조업을 못 하고 티투섬에 접근할 수도 없다. 군사 전문가들은 중국 어선들이 인민해방군에 소속된 ‘해상 민병대’라면서 이른바 ‘양배추 전략(cabbage strategy)’을 구사하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양배추 전략이란 상대 국가의 해상 자유를 제약할 목적으로 분쟁지역 해상에 자국의 비군사적인 어선들을 포진시키는 것을 말한다. 

    중국의 이런 전략은 지난해 말부터 티투섬에서 활주로 및 부두 시설 보강 공사를 벌이는 필리핀 정부를 저지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 중국 어선들의 방해(?)로 필리핀 정부는 장비와 자재 등을 티투섬에 보내지 못하고 있다. 필리핀 외교부는 “파가사섬은 필리핀이 주권과 관할권을 갖고 있다”며 “이 섬과 스프래틀리 제도에 있는 다른 섬 근처나 주변에 중국 선박들이 출현하는 것은 불법일 뿐 아니라 필리핀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면서 중국 정부 측에 어선들을 철수시킬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티투섬은 자국 영토라며 필리핀 정부의 요청에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중국 정부가 이처럼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입장을 보이자 필리핀 국민의 반중(反中) 정서가 크게 고조되고 있다. 연일 시민 수백 명이 수도 마닐라의 중국대사관 앞에서 중국을 규탄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필리핀을 팔 수 없다” “중국을 필리핀 영해 밖으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들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반미·친중 행보를 비판했다. 필리핀 여론조사 전문회사 ‘소셜 웨더 스테이션’이 1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4%가 ‘필리핀이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에 반대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답했다.

    국익을 위한 선택

    미국 해군 강습상륙함 와스프호가 남중국해를 항해하고 있다(왼쪽).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오른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악수하고 있다. [미국 해군 7함대, 필리핀 대통령궁 홈페이지]

    미국 해군 강습상륙함 와스프호가 남중국해를 항해하고 있다(왼쪽).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오른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악수하고 있다. [미국 해군 7함대, 필리핀 대통령궁 홈페이지]

    중국에 대한 국민 여론이 갈수록 악화되자 두테르테 대통령은 4월 4일 “중국은 티투섬에서 손을 떼라”며 강력하게 경고하고 나섰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중국이 파가사섬을 건드리면 군에 자살 임무를 준비하라고 지시할 것”이라며 “파가사섬은 우리 영토이고 중국이 이 섬을 점령하는 행위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6년 6월 취임 이후 지금까지 반미·친중 노선을 걸어온 두테르테 대통령이 중국 측에 강경한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 정부는 그의 친중 노선에 대한 대가로 지난해 필리핀에 150억 달러(약 17조 원) 규모의 자금을 투자했다. 게다가 중국 정부의 배려 덕분에 지난해 필리핀을 방문한 유커는 126만 명에 달하면서 2015년보다 300%나 늘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중국에 대해 강경 입장을 보이는 것은 5월 13일 치르는 중간 선거를 의식한 행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선 상원의원 절반과 하원의원 전원, 지방자치단체장을 선출한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패할 경우 남은 임기 동안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야당들은 두테르테 대통령의 지나친 친중 정책과 안보 무시 정책 때문에 자칫하면 영토마저 빼앗길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결국 발등에 불이 떨어진 두테르테 대통령으로선 미국 정부에 ‘SOS’를 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됐다. 필리핀 정부는 미국 정부 측에 해군 함정들을 남중국해에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테오도로 록신 필리핀 외무장관은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하는 세계 유일한 강국”이라며 “미국은 우리의 유일한 군사동맹으로 남을 것이고 우리는 다른 어떤 동맹도 필요하지 않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중국을 견제하고자 필리핀 정부의 요청을 수용하는 등 적극 포용하고 나섰다. 미국 정부는 항공모함 등을 보내기로 하고 일단 최신예 강습상륙함 와스프호를 필리핀으로 급파했다. 길이 257m, 폭 32m, 배수량 4만1000t인 와스프호는 F-35B 스텔스 전투기 20여 대를 비롯해 수직이착륙기 MV22 오스프리와 각종 헬기 등을 탑재할 수 있으며, 1100명의 승조원 외에 해병대원 1600명을 수송할 수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남중국해에서 필리핀이 공격을 받으면 미국은 1951년 체결된 상호방위조약을 발동해 필리핀을 지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의 안보 위협에 맞서려는 두테르테 대통령은 그간 거리를 뒀던 미국과 다시 손을 굳게 잡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두테르테 대통령의 변심(變心)은 국익을 위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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