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7

2015.12.16

김재준과 ‘한신’ 그룹의 탄생

문익환의 ‘토착화론’과 안병무의 ‘민중론’ 파장…‘행동하는 지성’의 본보기 돼

  •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입력2015-12-15 15:35:22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김재준과 ‘한신’ 그룹의 탄생

    1973년 11월 5일 시국선언을 위해 서울 종로 YMCA에 모인 재야인사들. 가운데 태극기 아래 있는 이가 김재준 목사이고 왼쪽에 서 있는 이가 함석헌, 바로 옆 안경 쓴 이가 지학순 주교, 그 옆이 이호철 소설가다. 오른쪽 아래부터 김지하, 계훈제, 법정 스님, 천관우. 동아DB

    해방 후 한국 지성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그룹이 있다. 흔히 ‘한신(韓神) 계열’로 지칭하는 한 무리의 기독교인이다. ‘한신’의 형성은 공식적으로는 1940년 김재준이 한국신학대(현 한신대)의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그렇지만 이미 30년대 초·중반부터 김재준은 한경직, 송창근 등과 함께 한신(아직 학교는 없었다)의 신학적 시각을 조금씩 드러냄으로써 교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한신계라 하면, 좁게는 한신대 신학교수이던 김재준(학장)과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이우정 등을 기본으로 하고 김재준과 직접적으로 인연을 맺으면서 큰 영향을 받았던 인물들, 예컨대 강원용 등을 두루 포괄한다. 말하자면 ‘김재준과 그 제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한신 계열 인사들의 이념 지향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란 무척 어렵다. 이들의 이념은 일반적인 이데올로기의 키워드들, 예컨대 ‘민족’이나 ‘계급’ 같은 용어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문익환의 통일운동이 반미 민족주의로 보일 수는 있다. 물론 당시 문익환의 활동은 좌파 ‘민족해방(NL)’ 계열의 정서를 뒷받침하는 젖줄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 문익환이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한신계의 또 다른 핵심 강원용은 심지어 청와대에 드나들기도 했다. ‘계급’이라는 키워드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70년대 중반 안병무, 서남동을 통해 등장한 이른바 ‘민중신학’은 한완상의 사회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민중신학의 ‘민중’은 물론이고 한완상의 ‘민중’ 개념조차 단순히 ‘노동자 계급’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었다.
    김재준과 ‘한신’ 그룹의 탄생

    장공 김재준(1901~87). 함북 경흥 출신으로 1951년 한국신학대(현 한신대) 초대 학장을 지냈다. 신학 노선 문제로 갈등을 빚다 장로교총회에서 제명돼 1953년 기독교장로회를 설립했다. 교회가 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진보 신학자다. 동아DB

    한신 그룹은 이렇듯 단색의 집단이 아니지만, 이들을 빼놓고 오늘날 한국 사회를 말하기는 어렵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친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한신의 인물들이 수행한 구실은 엄청나다. 또한 한신의 대표자들이 한국 기독교 3대 교파 중 하나인 기독교장로회(기장)를 태동시키고 이끌어왔음도 잘 알려져 있다.
    한신의 핵심 인물들도 해방 후 월남한 기독교인에 속한다. 흔히 월남 기독교인들의 성향을 하나로 묶어 ‘친미, 반공, 보수’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런 생각은 말 그대로 ‘대략적인 사고’일 뿐이다.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배경을 좀 살필 필요가 있다.
    1885년 미국 장로교 언더우드와 감리교 아펜젤러로 시작된 한국의 개신교 선교에서 외국 교회들의 ‘선교지역 분할협정’이 있었다. 이에 따라 평안도와 황해도의 서북지역(관서지역)은 미국 북장로교가, 함경도와 간도의 관북지역은 캐나다장로회가 맡는 방식으로 선교지역을 분할했다. 함경도와 북간도 출신의 월남 기독교인들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지역인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배경 하에서 성장했다.

    함경도와 북간도에 뿌리 내린 진보적 기독교

    분단 후 한국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월남 기독교 세력은 대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평양신학교와 미국 북장로교 계열 교회들이었다. 이 교회들이 후일 한국 기독교 최대 교파인 예수교장로회(예장)를 형성했다.
    그런데 이들 월남 보수 기독교 세력이 아직 북에 있던 일제강점기 이들에게 대항하는 두 지점이 형성돼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앞서 봤던 김교신과 함석헌 등의 ‘성서조선 그룹’이었다. 다른 하나가 바로 함경도, 북간도를 배경으로 캐나다연합교회의 지원을 받아 형성되고 있던 한신 그룹이었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이들은 아직 하나의 ‘집단적’ 역량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북간도 룽징(龍井) 은진중 학생으로 김재준과 인연을 맺고 훗날 한신의 핵심 세력이 된 강원용,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등은 1930년대 말 약관의 나이를 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김교신과 함석헌이 30년대 초반 이미 ‘성서조선’을 통해 장로교회와 평양신학교 쪽의 확실한 ‘눈엣가시’가 돼 있었다면, 김재준은 이들과 동갑인 1901년생이었음에도 여전히 ‘제도권’ 안에서 ‘작은 소란이나 피우는’ 존재에 불과해 보였다. 이때까지 한신 그룹의 폭발력은 잠재 상태로만 존재했다.
    김재준과 ‘한신’ 그룹의 탄생

    1984년 1월 김영삼 씨의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민주화선언서를 읽는 문익환 목사(1918~94)(오른쪽). 문 목사는 만주 간도 출신으로 민주화·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동아DB

    한신의 중심인 김재준은 함북 경흥군 아오지에서 태어나 유년기에는 한문 교육을 받았으며, 나이 스물에 송창근의 인도로 기독교에 입문했다. 20대 초반 서적을 통해 접한 성 프란치스코와 무소유주의자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로부터 평생을 일관하는 강력한 정신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했으며 신정통주의 신학자 카를 바르트(K. Barth)로 졸업논문을 썼다. 20대 후반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웨스턴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는데, 이때 공부한 신학사상이 1930년대 보수적인 평양신학교와 서북 장로교회로부터 비판받게 되고 후일 소위 이단 시비로 53년 기장의 분립을 가져왔다.
    예장과 기장의 분립은 그 배후가 미국 장로교와 캐나다연합교회의 노선 차이로 이해될 수도 있다. 김재준에 대한 캐나다연합교회의 지원은 해방 후에도 지속됐다. 1952년 한국 장로회 총회에서 김재준이 파직된 것에 격분한 캐나다연합교회는 새로 분립한 기장의 강력한 후원자가 됐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마자 김재준은, 제자들로 구성된 선린형제단 집회에서 ‘기독교의 건국이념’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이 강연 원고는 해방기의 ‘나라 만들기’ 과제와 관련해 한신의 초기 정치적 구상이 자세히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서다. 특히 한신이 60년대 중반 이후 반정부 진영의 선두에 설 수밖에 없었던 많은 논리적 근거를 일찍부터 보여주고 있어 의미가 크다. 이 글은 ‘조선’의 현실과 관련된 당면 목표를 제시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재준과 ‘한신’ 그룹의 탄생

    1985년 11월 23일 서울대 시국토론회에서 연설을 하는 문익환 목사. 동아DB

    “우리는 우선 신앙과 예배의 자유, 사상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 개인양심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부만 수립하면 감사할 것이다. 우리는 당면한 문제로 소위 공산주의 운동을 몹시 우려하는 경향이 있음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과학으로 경제기구의 실상을 검토하며 더 좋은 재건을 기획하는 점에 있어서 존경할 것이며 그것이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객관적 사실을 드러낸 것인 한 우리는 그것을 수락할 의무가 있다. (중략) 즉 상술(上述)한 제 자유만 확보한다면 공산주의 기타 여하한 정부라도 조선의 현실에 비추어 우선 감사히 수락한다.”(김재준의 ‘기독교의 건국이념’)
    물론 이 시기는 해방기 북에서 기독교 우익과 공산주의 세력 간 쟁투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던 때이긴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미 서북 장로교인들이 철저한 반공주의를 표방했던 점을 고려할 때 매우 색다른 관점이라 할 만했다. 이 글에서 김재준은 국가체제의 기본 바탕을 언급한 뒤, 구체적인 정책 구상을 제시했다. 외국 자본의 침투를 방지하고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불허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교통·통신의 국영화, 누진세 부과, 상속세 강화, 대재벌 세습 방지,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교육·의료의 절대 보장 등 사민주의로 분류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김재준의 생각이 다소 ‘오른쪽’으로 이동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기본적으로 이 글에서 천명된 주요 원리의 근간이 크게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1950년대에도 김재준은 당대 지식사회의 자유민주주의론의 큰 테두리에서 동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후일 이념적 진보성이 야기할 긴장과 갈등의 여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김재준과 ‘한신’ 그룹의 탄생

    1974년 11월 20일 기독교장로회 기도회에서 안병무 박사가 ‘예수는 자유를 위해 오셨다’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왼쪽). 1975년 1월 7일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가 주최한 ‘민주회복 대강연회’가 열렸다. 연사는 박상래 신부, 백낙청 교수, 천관우 선생, 문동환 목사, 강원용 목사 등이었다. 동아DB


    은진중 제자들, 한신 노선을 완성하다

    김재준과 ‘한신’ 그룹의 탄생

    안병무(1922~96). 평남 안주 출신으로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와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신대 교수로 재직하며 ‘민중신학’을 전파했다. 동아DB

    훗날 한신 그룹의 중심이 된 인물들이 모두 김재준의 중학교 교사 시절 제자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김재준이 일제강점기 북간도 은진중 성경 교사로 근무하던 1936년에서 39년 사이, 한신의 인물 기반이 형성됐다. 김재준이 캐나다장로회 계열의 은진중에 부임한 36년 여름, 강원용은 학생회장이고 안병무는 2학년생이었다. 문익환은 윤동주(시인)와 함께 학교를 떠난 직후였지만 방학 때마다 룽징에 있었고, 동생 문동환이 아직 은진중에 다니던 인연으로 이후 김재준 집에 살면서 조선신학교에 편입해 정식 제자가 됐다.
    한신의 인물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문익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대중에게 비교적 친근한 이미지를 주고 있었고, 문학적 감수성에 예인(藝人)으로서의 풍모도 풍겼다. 학창시절 문학적 재능에서 친구 윤동주에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문익환은 먼 훗날 시집도 냈다.  
    문익환의 통일론이 1980년대 말 이후 좌파 민족주의에 견인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그것은 후일의 일이고 이전의 문익환은 ‘순수한’ 운동가이자 무엇보다 학자였다. 문익환이 한국 최고 구약 신학자였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60년대 후반 신·구교 성서 공동번역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 구약 파트 책임자였다. 특히 그는 구약의 예언자 전승 연구의 최고 권위자였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구약의 예언서에 대한 해석 글 정도를 잡지 ‘기독교사상’ 등에 투고하던 문익환은 60년대 중반 들어 기독교 토착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내놓기 시작했다. 문익환은 기독교가 히브리와 그리스의 기질을 받아 태동하고 자라 오늘날 세계교회의 형식이자 내용이 됐음을 전제한 후, 우리 문화가 이와 같을 수 없으므로 한국 기독교의 토착화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의 근저에는 당대 제3세계 국가들에서 벌어지는 탈식민운동의 흐름이 있었다. 강원용을 통해 한국 기독교계에 보고되고 있던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움직임이 그 통로가 됐을 것이다. 후일 문익환이 통일에서 외세를 배제하고 ‘자주’를 강조할 때 밑바탕이 된 생각이 이즈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한신의 인물들은 대개 민중신학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 신학계에 알려진 ‘학문’으로서 민중신학(Minjung Theology)은 안병무가 수립한 것이다. 안병무는 민중신학이 자기 삶의 주제가 된 계기를,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에 두었다. 전태일로 인해 살아 있는 민중을 보게 됐고, 이 민중 ‘사건’ 안에서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안병무의 ‘삶에서 형성된 학문과정’).
    안병무의 신학에서 민중 사건은 일종의 ‘종교적 체험’이 되는데, 1980년대 중·후반 좌파 운동진영의 시각에서 ‘비과학’으로 비판되던 70년대 민중론은 한신에서 이렇게 종교적 체험론과 결부돼 있었다. 민중신학의 ‘민중’이 ‘체험’ ‘사건’과 결부되는 한 사회학적 계급론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오늘날 기독교 교파로서 기장이 아닌, 지성사적 의미에서 한신의 계보는 다소 애매한 지점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그 옳고 그름을 떠나, 문익환의 ‘토착화론’이나 안병무의 ‘민중론’ 자체가 큰 반향을 일으키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그렇지만 한신 그룹이 한국 지성사에 남긴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들에 대해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지명관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싸우는 사람들이 지식인이니까, 싸우면서 그걸 신앙적으로 설명하려고 그러고, 사상사적으로 설명하려 그러는 시대”였다는 것이다. 이 평가는 한신 그룹 같은, ‘행동하는 지성’들에게 온전히 적절하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