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40

2014.06.02

‘국정 2인자’ 자리가 뭐기에

안대희 前 총리 후보자 낙마, 국정 공백 장기화 우려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14-06-02 09: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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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 2인자’ 자리가 뭐기에

    5월 28일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에서 총리 후보자 사퇴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 숙인 안대희 전 총리 후보자.

    “헌법과 법률에 따라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 국가가 바른길, 정상적인 길을 가도록 소신을 갖고 대통령께 가감 없이 진언하겠다.”

    위풍당당했다. 5월 22일 총리 지명 수락 기자회견을 할 때만 해도 그는 박근혜 정부 2기 내각 수장으로서 명실상부한 책임총리제를 이뤄낼 거라는 기대감을 줬다. 2012년 대통령선거(대선)에서 새누리당 정치쇄신위원장으로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막겠다며 정치쇄신안을 만든 것도 그였다.

    멍석도 깔렸다. 새 총리는 세월호 참사로 단행될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국가안전처와 행정혁신처를 흡수하는 가장 강력한 위상을 부여받은 상황. 그러나 ‘총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5개월간 변호사를 하면서 16억 원 수입을 올린 사실이 드러났다. 국가 개조 적임자로 내정된 인사가 법피아(법조+마피아)를 상징하는 전관예우 논란의 한복판에 서면서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하겠다’는 ‘강골 검사’는 총리 지명 엿새 만에 고개를 숙였다. 안대희 전 총리 후보자 얘기다(상자기사 참조).

    ‘명실상부한 2인자’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을 꿈꾼 안 전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문턱도 넘기 전 사퇴하면서 ‘2인자’ 자리가 세간의 관심사다. 국무총리는 조선시대로 따지면 영의정. 임명직 가운데 최고위직이지만 실제 위상은 그때그때 달랐다.

    헌법은 ‘국무총리는 국회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헌법 제86조),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헌법 제87조)는 조항으로 총리 위상을 규정한다. 내각제적 요소를 가미해 권력 일부를 분산한 것.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상

    총리는 이처럼 정부조직법상 2인자 위치이지만, 현행 헌법 체계에서 그 구실은 사실상 ‘대통령 손바닥’ 위였다. 임면권을 가진 대통령 아래에서 개념조차 분명하지 않은 ‘통할(統轄)’ 구실을 제대로 하려면, 대통령의 권력 분산 의지와 두둑한 배포가 필수였다. 수틀려 사표를 던지더라도 대통령 허락 없이는 사표가 곧 항명이요 반란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헌정사에서 총리가 제 목소리를 내고 행정 각부를 통할하는 모양새를 보인 총리는 김대중(DJ) 정부 때 김종필(JP), 김영삼(YS) 정부 때 이회창, 노무현 정부 때 이해찬 전 총리 정도다.

    ‘DJP연합’으로 정권을 가져온 JP는 ‘창업공신’이면서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지분을 바탕으로 국민연금 파동 등 굵직한 국정 현안을 적극 중재하며 국정 2인자의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었다.

    이회창 전 총리는 총리 지명 당시 안 전 총리 후보자와 닮은꼴이었다. 그는 1993년 10월 서해훼리호 사건과 두 달 뒤 우루과이라운드(UR) 쌀시장 개방 파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YS 정부 초대 황인성 총리가 사임하자, 민심을 다독이면서 강력한 개혁을 이끌 총리로 낙점됐다.

    ‘국정 2인자’ 자리가 뭐기에

    2013년 12월 3일 오후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전직 국무총리 만찬에 앞서 기념촬영하는 총리들. 왼쪽부터 정홍원 총리, 고건 노신영 현승종 정원식 이현재 이홍구 이한동 이수성 정운찬 김황식 한덕수 장대환 전 총리.

    이 전 총리는 1988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 재선거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장으로 노태우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선거법 위반을 경고하면서 ‘대쪽 판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93년 7월 감사원장으로 있으면서 율곡비리와 관련해 “성역은 없다”며 전직 대통령들을 조사하는 등 ‘소신과 강단’ 이미지를 쌓았다. 당시 2인자였던 최형우 내무부 장관을 면전에서 호통 치는 강단도 보였다. 총리 권한을 찾으려는 총리와 권력 정점과의 잦은 마찰은 결국 ‘4개월 단명(短命) 총리’로 귀결됐지만, 당시까지 당연시되던 ‘얼굴마담 총리’를 넘어 책임총리상(像)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대선후보가 된 것도 그러한 정치적 자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의도 정가에서는 안 전 후보자가 총리가 되면 이 전 총리처럼 소신과 강단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 대선후보로 직행할 거라는 관측도 나왔다.

    이해찬 전 총리는 실질적 2인자였다. 2004년 6월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정국에서 복귀한 후 2기 총리로 ‘동지적 관계’였던 이해찬 의원을 발탁했다.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바탕으로 이 총리는 ‘실세총리’로 내각을 이끌면서 19년간 미결 과제였던 원전폐기물처리장 문제와 공공기관 지방 이전 등을 주도적으로 해결해나갔다. 2005년 중동 순방에 나섰을 때는 공무원과 경제인, 기자 등 수행 인원만 100여 명에 달해 대통령 해외 순방을 연상케 했다. 2인자 책임총리의 관건은 대통령이 총리를 얼마나 신뢰하고 권력을 나누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느냐에 달렸음을 확인하게 한 대목. 하지만 절제되지 않은 직설적 말로 정치권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다 3·1절 골프 파동으로 불명예 퇴진했다.

    ‘권한은 없고 책임만 져라’

    ‘국정 2인자’ 자리가 뭐기에

    제 목소리를 내며 ‘2인자 존재감’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 김종필, 이회창, 이해찬 전 총리(왼쪽부터).

    그러나 ‘권한은 없고 책임만 지는 것이 책임총리제’라는 우스갯소리처럼, 많은 총리가 대통령의 ‘여론 바람막이’로 자신을 던졌다.

    YS 시절 황인성 전 총리는 우루과이라운드 쌀시장 개방 파문 책임을 지고 10개월 만에 하차했고, 이명박 정부 시절 정운찬 전 총리도 세종시 수정안 부결로 10개월 만에 물러났다. 노무현 정부 당시 고건 전 총리도 권력 내부 갈등 끝에 1년 3개월 만에 물러났으며, 현 정부의 정홍원 총리 역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사의를 표명했다. 대통령 직선제 이후 2년 이상 재임한 총리는 김대중 정부 시절 이한동 전 총리(2년 1개월)와 이명박 정부의 김황식 전 총리(2년 4개월) 2명뿐일 정도로, 대부분 국가적 문제가 생기면 대통령을 대신해 사퇴하는 ‘방패막이 총리’로 수명을 다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의 설명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총리는 대통령이 총리에게 재량권을 주고 힘을 실어줄 때나 나올 법한 말이다. 총리는 대부분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기 위해 대통령 측근과 청와대 비서실장의 환심을 사야 하고, 대통령과 국정을 협의하려고 청와대를 방문할 때도 가슴에 이름표를 달아야 한다. 따라서 자리 보전을 위해서라도 총리 구실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처럼 큰 사고가 터지면 물러나게 해서 대통령이 국정운영의 반전 기회로 삼거나, 지역 안배 인선으로 통합의 상징으로 삼거나, 국정 추동력을 얻기 위해 명망가를 앉히는 자리가 총리 아니겠나.”

    그의 말처럼 이홍구, 이수성, 박태준, 정운찬 전 총리 같은 ‘명망가형’도 있었고, YS 정부의 황 전 총리(전북)나 DJ 정부의 JP(충청), 노무현 정부의 고건 전 총리(전북), 이명박 정부의 김 전 총리(전남) 같은 ‘통합형’ 총리도 있었다. 통합형은 대통령의 지역적 약점을 보완하고 야당 공세에 적절히 대처하는 정무형 총리 구실을 병행했다. 대통령 의지에 따라 실세형부터 관리형까지 다양한 생존 모습을 보여온 것이다. 다음은 총리 위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한 대목.

    “1990년대 초 남북총리회담 당시 정원식 총리가 북한 연형묵 총리에 대해 ‘이름만 총리지 당 서열이 10위도 안 된다’고 평한 적이 있다. (국무총리실 서기관으로 참석한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건 남한도 똑같지 않나.’”(정두언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 가운데)

    ‘허울뿐인 영의정’은 업무 추진력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은 사실상 사문화됐고 의전(儀典) 총리, 대독(代讀) 총리 소리를 듣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에서도 이런 한계는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 총리는 세월호 참사 실종자 및 희생자의 가족들 요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불신을 키웠고, 해양수산부와 안전행정부 등 관계부처에 대한 장악과 지휘에서도 이렇다 할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종자 가족들이 무조건 대통령과 대화하겠다고 청와대로 향하는 것도 현재 대한민국 총리의 위상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허만형 중앙대 행정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2인자 키우지 않는 朴 대통령

    ‘국정 2인자’ 자리가 뭐기에

    5월 25일 인사청문회 준비를 위해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으로 출근하는 안대희 전 총리 후보자.

    “국민의 대표성을 지닌 대통령이 지명하는 총리의 권한 행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민간기업의 ‘관리 사장’ 정도다. 책임총리를 자처하면서 국무위원을 제청하거나 해임 건의를 한다 해도 최고 인사권자인 대통령이 수용하지 않으면 권한 행사를 할 수 없다. 따라서 대통령이 결단해 권한을 실어주지 않는 이상 총리는 ‘관리형’으로서 국가의 여러 일을 챙기며 조화롭게 아우르는 구실을 해야 한다. 책임총리제가 꼭 필요하다면 권력구조 개편을 해야 한다.”

    최고 권력자의 주변 인사나 측근이 2인자 반열에 똬리를 틀고 있다면, 대통령이 특정 인사를 총애한다면 총리는 1인자에 이어 2인자 눈치도 살펴야 한다. 이승만 정부 시절 이기붕이나, YS 정권의 ‘소통령’ 김현철, DJ 정권의 ‘영원한 비서실장’ 권노갑, 이명박 정권의 ‘만사형통’ 이상득은 2인자로 통했다(16~17쪽 기사 참조).

    익명을 요구한 전직 총리 비서실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명목상 2인자인 총리가 관리형을 벗어나 뭔가를 해보려면 ‘총리가 너무 나서는 거 아니냐’‘대통령이 챙길 일을 왜 총리가 나서느냐’는 얘기를 듣는다. 그렇다고 이회창 전 총리처럼 ‘총리 권한’을 주장하면서 대통령과 충돌하는 총리는 거의 없다. 총리로 내정될 때부터 ‘실세 2인자’와 교감한 데다, 총리가 되면 자리를 유지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실세 2인자의 뜻을 살필 수밖에. 특히 인사철이 되면 그들(실세 2인자)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총리가 임명 제청을 하기 전 이미 낙점 인사부터 알려준다.”

    한편 청와대는 6·4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후 중폭 수준의 개각과 청와대 인사를 단행하려 했지만, 안 전 후보자의 사퇴 후 인사 검증 실패 책임론이 거세지면서 인사위원장인 김기춘 비서실장을 포함한 대폭 개각론이 피어나고 있다. “2인자를 키우지 않는다”는 박 대통령의 용인술 아래에서 2인자로 불리는 김 비서실장의 거취와 ‘안대희 카드’를 상쇄할 차기 총리 인선에 시선이 쏠리는 이유도 ‘2인자 향배’를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책임총리 꿈꾼 안대희의 6일 天下

    법피아 전관예우 16억 원 벽에 좌절


    5월 22일 “총리가 되면 대통령께 진언하겠다”던 안대희 총리 후보자가 낙마하기까지 엿새가 걸렸다. 총리 지명 이튿날, 5개월간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16억 원의 막대한 수입을 올린 사실이 드러나면서 ‘법피아’(법조+마피아)를 상징하는 전관예우 논란의 한복판에 섰다. 수입 16억 원 가운데 4억7000만 원이라는 적잖은 돈을 기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의 흐름은 판단을 유보하는 듯했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정홍원 국무총리가 사임 의사를 밝힌 뒤 3억 원을 기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안 전 후보자의 기부는 빛이 바랬다. 논란이 일자 “재산 11억 원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승부수를 띄웠지만 여전히 ‘기부금 총리’ 공세에 시달렸고, 현금과 수표 5억1000만 원을 보유한 사실과 위장 전입 논란, 자녀 증여세 미납 의혹 등이 그를 괴롭혔다.

    결국 안 전 후보는 ‘명실상부한 2인자’ 책임총리의 꽃도 제대로 피워보지 못한 채 후보 지명 엿새만인 5월 28일 전격 사퇴했다. 책임총리에 대한 기대감도 물보라처럼 흩어졌다. 그는 2000년 6월 인사청문회가 도입된 이후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 장대환 매일경제신문 사장, 김태호 새누리당 의원,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에 이어 5번째로 낙마한 총리 후보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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