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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클릭’했더니 ‘클린’ 정치 됐네

엄격한 저작권에 반발해 창당한 독일 해적당 ‘인기몰이’

  • 독일 튀빙겐=박성윤 통신원 bijoumay@daum.net

‘클릭’했더니 ‘클린’ 정치 됐네

독일 해적당의 기세가 무섭다. 4월 10일 발표한 설문조사에서 해적당이 13%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녹색당을 2%포인트 앞지르는 수치다. 지지율만 보면 녹색당이 지난 30여 년간 힘겹게 성취한 지지 기반을 해적당은 5년 반 만에 가볍게 확보한 셈이다. 해적당은 3월 25일 치른 남서부 자를란트 주의회선거에서 7.4%를 득표해 지방의회 4석을 차지한 이후 인지도와 지지율, 당원 수(현재 약 2만5000명) 모두 급상승 중이다. 5월 6일과 13일에 각각 치를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회선거에서도 원내 진출에 가뿐히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베를린 주의회선거에서 8.9%를 득표하고 원내 15석을 획득한 전대미문의 선전에도 해적당을 ‘컴퓨터게임이나 하는 애송이’로 얕잡아봤던 기존 정당이 해적당의 상승세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녹색당은 해적당에 정책토론을 제안하며 정면승부로 기세를 막아보려 하는 반면, 기독교사회당연합(이하 기사연)은 해적당이 향후 독일 정치 판도를 바꿀 것이라 내다보고 전략 마련에 들어갔다. 문제는 내년 가을에 있는 연방의회선거다. 현재로선 해적당이 주로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과 녹색당 등 좌파의 표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이는 데다 집권 여당의 연정 파트너인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이 원내 진출에 필요한 5% 지지율 확보에도 고전하는 상황이다. 기존 정당은 살아남을 새 공식을 짜면서 해적당 변수까지 고려하느라 비상이 걸렸다.

해적당도, 해적당의 상승세도 정치 해프닝이 아니다. 집에서 영화나 음악을 무료로 내려받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처벌하는 데 불만을 품은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와 삼삼오오 결성한 단체가 해적당이다. 이들은 영리가 아닌, 개인 오락을 목적으로 문화 창작물을 복제하고 향유하는 일은 불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복제 및 공유를 막는 것이야말로 인터넷시대에 문화, 지식, 정보를 사적으로 이용하는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라고 강조한다. 돈도 없고 힘도 없는 개인을 괴롭히는 거대 권력기관의 횡포에 정당방위로 맞서려고 스스로 해적이 됐다는 게 이들의 변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접근과 공유’

자신들을 ‘정보사회의 시민권을 위한 정당’이라고 소개하는 해적당의 강령은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 보호, 저작권 및 특허권 반대, 문화·지식·정보에 대한 자유롭고 평등한 접근과 공유’다. 최근에는 기본소득보장제와 대중교통 무료 이용제 도입을 주장해 논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해적당에 표를 주는 이유가 강령과 정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요인은 없을까.



해적당은 다른 정당과 달리 인터넷과 컴퓨터 기술을 십분 활용한다. 다른 정당의 간부들이 리무진을 타고 궁전호텔 레스토랑에서 만나 식사한 뒤 밀실에 모여 밀담을 나눈다면, 해적당 간부들은 정해진 시간에 각자 집에서 헤드셋을 끼고 멈블(Mumble)이라는 음성통화 프로그램을 통해 회의를 한다. 해적당 간부나 당원이 아니라도 멈블 프로그램을 깔면 누구나 관심 있는 주제를 내건 대화방에 들어가 자기 생각을 얘기하고 토론할 수 있다. 회의 참가자들은 해적패드(Piratenpad)라는 온라인 메모 프로그램에 토론 내용과 의견을 동시다발적으로 올리고 공유한다.

‘위키피디아’와 유사한 방식의 해적당 온라인 백과사전 ‘해적위키(Piratenwiki)’도 있다. 회계보고서를 포함한 해적당 관련 정보를 모두 공개해놓았다. 정보를 올리거나 기존 정보를 수정하고 싶으면 해적위키에 회원으로 가입하면 된다. 굳이 당원이 될 필요는 없다.

당내 의사소통 시스템의 백미는 리퀴드 피드백(Liquid Feedback)이라는 의사결정 프로그램이다. 멈블에서 나누고 해적패드에 기록한 내용은 리퀴드 피드백에 안건으로 올릴 수 있다. 올라온 안건은 실시간 댓글과 찬반투표를 거쳐 당 정책 혹은 의회 상정안으로 결정된다. 리퀴드 피드백에 올라오고 결정된 내용은 전부 공개하지만, 사안에 대한 투표권만큼은 회비를 낸 당원에게만 준다. 당원은 안건 중 자신이 잘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투표권을 다른 당원에게 위임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의사소통 시스템을 통해 사람들은 의견을 모으고 합의하고 결정에 이르는 의사결정의 전 과정에 참여하면서 투명한 정치를 경험한다.

더욱이 24시간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터라 빠른 의사결정 속도도 큰 장점이다. 실제로 올해 초 베를린의 해적당 당원인 얀 헴메 씨가 집에서 리퀴드 피드백에 올린 안건이 연방참의원에까지 올라간 사례가 있다. 헴메 씨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유럽연합(EU)이 통과시키려는 개인정보보호 강화안이 ‘방침’이 아닌 ‘명령’이라는 것, 그리고 명령일 경우 EU 국가들은 그 내용에 상관없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문제는 페이스북 같은 거대 기업이 로비를 통해 그 명령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EU 개인정보보호 강화안은 명령이 아닌 방침 형태를 띠어 각국이 실정에 맞게 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헴메 씨는 리퀴드 피드백에 이 같은 제안을 올렸고, 당원이 참여해 내용을 수정, 보완했다. 그렇게 완성한 안건을 해적당 의원이 베를린 주의회에 상정했으며 마침내 연방참의원에 전해져 채택됐다.

직업 정치인 관습에 혁신

해적당의 성공은 적절한 시스템 개발 덕분일까. 아니면 기성 정치보다 디지털 세상에서 즐거움을 찾는 젊은 세대의 취향에 잘 맞아서일까. 해적당 브레멘 주 지부에서 만난 사람들은 조금 다른 얘기를 들려줬다. 대학생인 아들과 함께 1년 전부터 브레멘 주 해적당에서 활동하며 매주 정기모임에 참석한다는 클레어 클린트 씨의 말이다.

“해적당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요. 사실 열어야 할 문조차 없습니다. 저는 당원이 아니지만 저처럼 당원이 아닌 사람도 당의 모든 활동을 같이 할 수 있다는 점이 해적당의 장점이죠. 지금껏 녹색당에 표를 줬는데, 녹색당은 이미 간부와 당원 간에 위계질서가 생겼고 아래로부터 나오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혁신을 잃은 거죠. 해적당엔 녹색당이 처음 생겼을 때 느꼈던 신선함이 있어요. 아래로부터의 정치와 참여가 가능하게 하죠.”

해적당 창당 멤버라고 자랑하는 페터 뵘 씨에게 해적당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드는지 묻자, “베를린 주의회선거 때 투표를 해본 적 없는 유권자들을 움직여 투표하도록 만든 점”이라고 답했다. 그는 또한 “헬무트 콜 전 수상이나 크리스티안 불프 전 대통령을 보면 알 수 있듯 독일에도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며 투명한 정치 실현과 악법 개정을 해적당이 해내야 할 중요한 과제로 꼽았다.

이들 말에 따르면, 해적당 당원 중 직업 정치인은 1명도 없었다. 최근 당원 19명이 주의원이 되고, 대변인 1명에게 매달 800유로를 지급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당원들은 매달 3유로의 회비를 내고 자발적으로 활동한다. 브레멘 주 정기모임에 나오는 사람은 1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하다고 한다. 좌냐, 우냐, 중도냐 하는 이념성향은 아예 논외다. 이들에게 관건은 개인 자유를 보장하면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지다.

독일의 유명 해커집단인 ‘카오스 컴퓨터 클럽’의 대변인 콘스탄체 쿠르츠 씨는 ‘데어 슈피겔’ 기고문에서 “해적당의 성공은 힘으로 통제하고 조종하는 정치, 카리스마와 웅변술만 있으면 된다는 직업 정치인의 관습에 혁신을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헤드셋과 마우스, 채팅과 클릭 정치를 통해 지금 독일은 새로운 직접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다. 중간 평가는 한 달 후에 있고, 최종 결과는 내년 가을에 나온다.



주간동아 833호 (p52~53)

독일 튀빙겐=박성윤 통신원 bijoumay@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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