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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 강유정의 ‘영화에 수작 걸기’

이방인 남녀를 묶어낸 시애틀 안개

김태용 감독의 ‘만추’

  • 강유정 영화평론가·국문학 박사 noxkang@hanmail.net

이방인 남녀를 묶어낸 시애틀 안개

이방인 남녀를 묶어낸 시애틀 안개
사랑의 묘약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시한부일 것이다. 영원히 사랑하고 싶다는 바람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거짓말. 오히려 제한된 시간이 열정을 자극한다. 불치병이나 범죄는 연애의 걸림돌이 아니라 가장 자극적인 촉매가 된다. ‘러브 스토리’ ‘러브레터’ ‘너는 내 운명’ 등 무릇 우리가 사랑의 고전이라 알고 있는 영화 대부분이 이 장애물을 한가운데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만추’의 설정은 뺏고 싶을 만큼 탐이 난다. 1966년 처음 영화가 만들어진 후 거듭해서 네 번이나 리메이크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 매혹적 설정 역시 3일의 비밀에 있다. 그 여자, 애나는 3일밖에 시간이 없다.

‘만추’의 특별함은 시한부 연애와 장애물이라는 뻔한 관습을 전혀 다르게 배치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배치는 전적으로 여성 인물, 애나의 캐릭터가 지닌 매력이기도 하다. 여성 주인공의 치명적 결함이 살인죄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범죄는 남자의 몫, 그리고 매춘은 여자의 역할로 그려졌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르다. 범죄, 살인, 복역 같은 단어가 주는 두려움이 그녀를 특별한 인물로 만든다.

애나는 어머니의 장례 때문에 7년 만에 가석방된다. 3일의 자유 시간이 주어지지만 딱히 할 일도, 만날 사람도 없다. 가족이 반갑게 맞기는 하지만 유산을 분할하는 데 더 관심 있고, 우연히 만난 첫사랑도 뜨거운 흉터를 더 아프게 할 뿐이다. 이때 훈을 만난다. 훈은 내일 없는 삶을 사는 남자다. 한국에서 이민 온 외로운 여자를 상대로 하루치의 삶을 훔쳐내는, 별 볼일 없는 남자다.

이전의 ‘만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애나가 왜 살인을 하게 됐는지 그 원인을 감정의 동선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남자는 늘 그녀 주변을 맴돌지만 정작 곁에 머물지는 않는다. 이는 7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른 여자의 남편, 아이의 아버지가 됐지만 동정과 연민, 애정이 뒤얽힌 시선으로 그녀를 가둔다. 그녀 역시 여기서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훈은 그녀의 삶에 갑자기 뛰어든다. 그는 노크도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거실 소파에 앉는 손님처럼 다가온다.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지만 어쩐지 그의 침입이 싫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애나에게 그는 “왜”라거나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그는 애나가 미소 짓기를 바랄 뿐이다. 단 한 번의 미소를 위해 그녀의 삶에 끼어든 것처럼 말이다.



애나와 훈은 서로에게 이방인이지만 자신의 삶에서도 겉돌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시애틀이라는 낯선 공간에 있을 때보다 가족, 친구처럼 낯익은 존재들과 있을 때 더 외로워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서로 눈을 바라보며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눌 때보다 각자의 언어로 말할 때, 말하자면 의사소통을 포기하는 순간 감정이 소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애나는 중국어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훈은 알아듣지 못하면서 즉흥적으로 대답한다. 이 단절의 소통이 극대화된 게 바로 안개다. 안개는 그들의 시야를 막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둘 사이의 공간을 꽉 채운다. 안개 덕분에 그들 사이는 빈틈없이 메워진다.

최고의 장면 역시 소통의 아이러니 위에 있다. 훈은 왕징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도 뭔가 불편함을 느끼고 싸움을 벌인다. 주변 사람들이 대체 왜 싸우느냐고 묻자 “저 남자가 내 포크를 썼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댄다. 하지만 이 거짓이 억눌려 있던 애나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어쩌면 이 거짓말이야말로 그녀에게 간절했던 도화선이었을지도 모른다.

2년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이제 훈을 기다린다. 커피가 다 식기 전에 그가 돌아올까?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기다린다.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변화다. 제목처럼 늦은 가을이 생각나는 영화라 성긴 봄빛이 더 스산해지는 영화, ‘만추’다.



주간동아 2011.03.07 777호 (p80~80)

강유정 영화평론가·국문학 박사 noxk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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