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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記·충·천

正三品 ‘질마재 백구’

正三品 ‘질마재 백구’

고려 말 충렬왕 때 일입니다. 개성에서 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눈 먼 아이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그 집 개의 꼬리를 잡고 걸식을 했고, 밥을 먹으면 다시 샘가로 가서 물을 먹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그 개에게 정삼품(正三品) 벼슬을 내렸습니다. 개가 품작을 새긴 목패를 목에 걸고 다니면 행인들이 절을 하고 지나갔기에 정승 부럽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 개가 신의를 지키고 인류애를 실천해 벼슬을 받았다면, 기자도 질마재길에서 벼슬을 천거하고픈 개를 만났습니다.

10월 25일 기자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일대를 걸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미당 서정주(1915∼2000) 시인의 고향인 선운리 진마마을에서 장성이나 정읍으로 가는 소요산 질마재길을 백구 한 마리와 함께 걸었습니다.

백구와 길벗이 된 건 순전히 개의 의도였습니다.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서는데 식당 주인이 키우는 백구(2년생 진돗개로 이름은 ‘나루’) 한 마리가 다가오기에 여러 번 이마를 쓰다듬었더니, 대뜸 길 안내를 시작하더군요. 질마재길에 대해 주인과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는 듯 백구는 10m 앞서 총총걸음을 했습니다.

질마재길은 곰소만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좋았거니와, 형형색색 단풍 옷을 갈아입는 소요산 절경이 기자의 발걸음을 자주 멈추게 했습니다. 길 중간에 서서 수첩에 메모라도 하려면 백구는 어김없이 주변을 맴돌았고, 기자가 발걸음을 떼면 그제야 앞서 걸었습니다. 가만히 길가에 앉아 있는 꿩에게 달려들어 꿩을 놀라게 하더니, 낮게 나는 고추잠자리를 잡는답시고 폴짝 뛰어오르더군요. 그렇게 11km, 5시간을 걷는 동안 기자는 길에서 백구와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正三品 ‘질마재 백구’
국어사전에 길은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자동차 따위가 지나갈 수 있게 땅 위에 낸 일정한 너비의 공간’이라고 풀이돼 있습니다. 그러나 정서 용어로는 길은 땅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추억이나 마음속에도 나겠지요? 길만 봐도 웃음꽃이 피어나거나 눈물이 소복이 쌓이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요. 질마재길이 미당에게 세상을 잇는 통로였고 신화로 가득한 마음의 길이었다면, 기자에겐 백구 생각에 함박웃음 터지는 추억길이 됐습니다. 이번 주말에 여러분도 추억길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참, 백구 이야기는 20쪽에 있습니다.



주간동아 2010.11.01 760호 (p11~11)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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