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3

2010.09.06

한국판 ‘타이라 언니’는 누구?

2030 여성 문제 직격 발언으로 인기 … 우리 시대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떠올라

  • 이설 기자 snow@donga.com

    입력2010-09-06 14:1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한국판 ‘타이라 언니’는 누구?
    쿵쾅쿵쾅. 걸음마다 둔탁한 소리가 울리고 먼지가 인다. 거리로 나서자 행인들에게서 일제히 비웃음이 날아든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움츠러드는 어깨. 몸무게 130kg이 넘는 여자의 하루는 생각보다 고됐다.

    “생애 최악의 하루였어요. 비만에 대한 차별은 즉시 멈춰져야 합니다.”

    화이트 조명이 내리쬐는 ‘타이라 뱅크스쇼(타이라쇼)’ 스튜디오. 늘씬한 미녀로 돌아온 타이라의 말에 방청객들이 새삼 공감을 보낸다. 이날 타이라는 특수 분장으로 비만녀로 변신, 비만인 차별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그의 퍼포먼스는 시청자들에게 비만 체험을 한 듯한 효과를 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

    전문성과 인사이트 갖춘 시대의 해결사

    타이라 뱅크스(37)는 요즘 미국에서 가장 핫(hot)한 방송인이다. ‘타이라쇼’ ‘아메리카 넥스트 톱모델(America‘s Next Top Model)’ ‘트루 뷰티(true beauty)’ 등 그가 손대는 프로그램마다 대박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그중 일부는 해외로 수출돼 세계적인 히트상품이 됐다. 특히 ‘타이라쇼’는 그가 독특한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는 발판이 됐다.



    타이라는 모델 출신이다. 2005년 은퇴하기까지 흑인 모델 1세대로 한 획을 그으며 다양한 활동을 병행했다. 톱모델, MC, 방송제작자, 최고경영자(CEO), 가수, 배우, 작가 등 안 해본 게 없다. 그의 전방위적 활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하나의 콘셉트로 모아졌다. 바로 2030 젊은 여성들의 맏언니로 성장한 것.

    “외모, 가족, 이성 친구, 진로, 인간관계…. 여자들만의 익명 게시판에는 온갖 고민이 올라온다. ‘타이라쇼’는 꼭 그 게시판 같다. 방청객은 물론 타이라도 솔직하게 고민과 상처를 털어놓은 뒤 다 함께 으샤으샤 응원한다.”

    “기분 좋은 에너지 때문에 ‘타이라쇼’의 팬이 됐다”는 윤지현(31) 씨의 말이다. 2005년 시작한 ‘타이라쇼’는 현재 마지막 시즌인 시즌5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약간의 시차를 두고 케이블 채널 올리브TV에서 시즌5를 방영 중이다. 이 쇼의 1순위 인기비결로는 젊은 여성에 특화된 콘텐츠가 꼽힌다.

    ‘타이라쇼’는 ‘오프라 윈프리쇼’와 종종 비교된다. 여성문제를 곧잘 다룬다는 점, 흑인 여성이 단독 진행한다는 점 때문이다. 타이라 자신도 공공연히 “오프라처럼 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친다. 하지 ‘타이라쇼’는 좀 더 솔직하게 시시콜콜한 고민을 다룬다. 흑인 화장법, 탄력 있는 가슴 만들기, 나쁜 사랑에서 벗어나기, 가정폭력 대응법 등은 타이라쇼만이 다룰 수 있는 주제다.

    하지만 무엇보다 쇼의 기분 좋은 에너지는 타이에게서 나온다. 타이라는 호스트의 역할을 넘어 쇼의 중심부로 돌진해 그것과 정면승부한다. 갈등을 빚은 모델을 불러내 화해를 청하고, ‘가짜’로 오해받은 가슴 X레이를 찍으며,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은 일화를 털어놓는다. 여기서 포인트는 문제를 대하는 타이라의 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긍정적으로 문제를 직면하는 타이라의 에너지는 전파를 타고 시청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아메리카 넥스트 톱모델’에서 그의 전문성이 두드러진다. 일반인 모델을 뽑는 이 프로그램에서 타이라는 모델의 표정, 포즈, 화장법, 헤어스타일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패션·뷰티 업계의 사정과 시스템에도 훤하다. 대본 읽는 차원이 아닌 극을 이끌어가는 그의 모습에 시청자는 신뢰를 느낀다.

    “대중은 그들의 연기, 노래, 춤을 즐기고, 스타들은 부와 인기를 얻는다. 하지만 타이라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발전적인 상상을 제공한다. 동생뻘 여성들에게 희망적인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중문화평론가 이문원 씨의 말이다. 타이라는 방송 외에도 외부 활동으로 차곡차곡 자신의 길을 닦아왔다. 그는 ‘뱅커블(bankable)’의 CEO 겸 ‘TZONE(T-존)’ 대표다. ‘뱅커블’은 2003년 세운 회사로 출판과 프로덕션 사업을 벌이며, ‘T-존’은 2000년부터 LA에 사는 13~15세 소녀를 대상으로 상담형 캠프를 열고 있다.

    이처럼 타이라의 모든 활동은 젊은 여성들의 꿈, 희망, 도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역시 흑인으로 모델 업계에서 고군분투하며 성장했다. 타이라는 자신의 경험을 강조하며 빛나는 내일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타이라는 환상의 아이콘일 뿐”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일정 부분 백인 주류사회에 편입한 타이라가 일반적인 흑인의 퍼스낼리티를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 대중문화평론가 탁현민 씨는 “스타는 범접할 수 없는 이질감과 친근한 동질감을 동시에 줘야 한다. 현재 VVIP인 타이라는 그런 점에서 훌륭한 스타다. 스타가 보여주는 희망은 현실 가능성이 없는 환상에 가깝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타이라는 시기상조?

    국내에도 타이라의 팬이 많다. 광팬은 아니더라도 그의 방송을 한번 본 사람은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 국내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매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일도 잦아졌다. 특히 여성 단독 MC를 맡은 연예인을 소개할 때 ‘한국의 타이라’라는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다. 모델 변정수, 탤런트 한은정, 방송인 에이미 등이 “타이라 같은 MC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 바 있다.

    모델 장윤주는 최근 급부상한 ‘한국의 타이라’다. 그는 9월부터 케이블 채널 온스타일에서 방영되는 ‘도전! 슈퍼모델’ 한국판 MC로 낙점받았다. 타이라의 미모와 카리스마에 도전할 만한 인물을 점치던 시청자들은 “장윤주의 ‘도전! 슈퍼모델’이 기대된다”는 긍정적 반응이다. 온스타일 이우철 PD는 “타이라의 이미지가 강해 비슷한 진행자를 고민했다”라고 말했다.

    “타이라는 톱모델에 방송능력이 뛰어나고 지적이다. 장윤주 씨는 톱모델이고, 방송능력이 뛰어나다. 음악을 하고 책을 내는 등 경험도 풍부하고 성격도 적극적이다. 여러모로 장씨가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최근 올리브TV의 ‘겟 잇 뷰티(get it beauty)’ 진행자로 신고식을 치른 탤런트 유진도 타이라에 비견된다. ‘겟 잇 뷰티’는 뷰티 전문 정보프로그램. 전반적 라이프스타일을 다루는 ‘타이라쇼’의 일부를 따온 성격이다. 유진은 전문가 수준의 뷰티 상식과 메이크업 실력으로 MC자리를 꿰찼다. 올리브TV 편성팀 문다영 대리는 “과거 진행자와 달리 유진 씨는 기획에 참여하고 주도적으로 방송을 이끌어나간다. 그래서인지 ‘겟 잇 뷰티’ 이번 시즌 반응이 좋다”라고 말했다. 국제 이슈를 다루는 MBC ‘W’의 김혜수도 잠재적 타이라로 거론된다.

    하지만 국내의 타이라는 문화 아이콘이 되기에는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전문성과 명성이 부족해 언제든 대체가 가능하다는 것. 사회적 발언이 금지된 연예계 문화 차이도 중요한 걸림돌이다. 이문원 씨는 “미국은 스타 개인이 외주제작사를 갖고 있어 방송을 주도할 수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고, 탁현민 씨는 “연예인이 공인으로 간주되는 한 타이라처럼 여성문제에 발언하는 아이콘은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판 ‘타이라 언니’는 누구?

    1 토크, 상담, 명사 인터뷰를 버무린 ‘타이라쇼’. 2 한국판‘도전! 슈퍼모델’ MC 장윤주. 3 뷰티 정보를 제공하는 유진의 ‘겟 잇 뷰티’.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