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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 ‘시골의사’의 책장

한 남자가 던지는 문명충돌 해법

내털리 제이먼 데이비스 ‘책략가의 여행’

  • 박경철 blog.naver.com/donodonsu

한 남자가 던지는 문명충돌 해법

한 남자가 던지는 문명충돌 해법
‘15세기 말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무슬림으로 태어난 알하산 알와잔은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에스파냐의 기독교 해적에게 붙잡힌다. 그리고 약 10년 동안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일종의 단절과 고립의 삶을 경험하며 매순간 정체성의 위기를 겪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살아남기 위해 취했던 생존전략은 침묵과 모순, 미스터리. 저자는 이것을 고도의 문화적 생존전략, 즉 책략이라고 말한다.’

‘책략가의 여행’(푸른역사 펴냄)에 대한 출판사 측의 소개는 이렇다. 이 책은 한 무슬림 지식인의 굴절된 삶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신념과 배치된 상황에 놓였을 때 취할 수 있는 태도를 조명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예는 적지 않게 발견된다. 당장 조선 땅에 표류한 하멜이 그랬을 것이고, 임란 때 끌려간 도공들이 그랬을 것이며, 어쩌면 고려 말 기씨 형제의 선택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상이한 문화권에서 맞닥뜨리는 문화적 충돌의 관점뿐 아니라, 이슬람과 기독교라는 양날의 검을 맞이한 상황에서 한 남자가 생존을 위해 어떤 책략을 썼는지를 다뤄 나름 흥미롭다.

주인공 알하산 알와잔은 1486년에서 1488년 사이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에선 기독교도에 의해 재정복 운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의 가족은 그라나다가 함락되기 직전 지중해를 건너 모로코의 파스로 이주했다. 그는 그곳 마드라사(사원학교)에서 수사학, 이슬람 법과 아랍 시 등을 배운 뒤 술탄 아래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마그레브, 카이로, 이스탄불 등지를 왕래하고 메디나와 메카를 순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518년 카이로에서 파스로 돌아가는 도중 지중해상에서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운명을 맞이하게 됐다. 에스파냐의 기독교 해적에게 붙잡힌 것이다. 이후 알와잔은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에게 바쳐져 로마 산탄젤로 성에 수감됐는데, 곧 풀려나 1520년 성 베드로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 그 뒤 알와잔은 바울서간의 아랍어 역본 전사 작업, 아랍어-히브리어-라틴어 사전 편찬 작업, 쿠란 아랍어 전사본 및 라틴어 역본 교정 작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1526년에는 아프리카의 자연과 문화를 담은 대작 ‘아프리카 우주지리지’를 저술했는데, 이 책은 1550년 베네치아인 라무지오의 편집으로 ‘아프리카기記’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이후 프랑스어(1556), 라틴어(1556), 영어(1600), 독일어(1805)로 번역돼 아프리카와 이슬람 신앙 등에 관한 유럽인의 시각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알와잔은 1527년 이른바 ‘로마 약탈’ 직후 로마를 떠나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는데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단지 1532년 투니스에 살았다는 말만 전해질 뿐이다.

알와잔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이것이 전부다. 여기에 미시사의 대가인 저자가 살을 붙였다. 즉, 몇 줄의 사실을 바탕으로 저자의 상상력을 덧붙인 셈. 때문에 이 책이 자서전이나 인물 평전의 성격을 띠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책에 실린 이야기는 대부분 저자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해 평전류의 문체와 서술방식이지만 사실은 소설에 가깝다. 이 책이 가진 약점도 여기에 기인한다. 아예 소설의 형식을 취했다면 가독성과 흥미가 더 높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평전이나 역사서를 지향했다면 한 개인이 아닌 당대의 이야기를 더 폭넓게 다뤘어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알와잔이 겪은 곡절과 고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저자의 지향점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문명충돌, 혹은 종교분쟁의 시대에 화해의 메시지를 던지고자 한 뚜렷한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즉 무슬림인 알와잔이 기독교인에게 학대받거나 처형당하지 않고, 오히려 내증을 발휘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더 많은 기여를 하게 됐음을 전면에 부각한 것이다.



이 점이 이 책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하지만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작지 않다. 문명충돌의 시기에 알와잔식의 해법이 유일 대안은 아니겠지만, ‘화해’ 혹은 ‘이해’라는 단계에만 나아가도 최소한 지구촌에 살육과 증오의 피 냄새는 지금보다 덜할 테니 말이다.



주간동아 2010.05.24 738호 (p89~89)

박경철 blog.naver.com/donodo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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