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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에스트로겐 예찬

에스트로겐 예찬

남자가 중년이 되면 여성 호르몬이 많이 나온다는데, 요즘 그걸 실감합니다. 뭐, 수유(授乳)를 의심할 만큼 가슴선이 무너져 내리거나 하는 충격적인 외형 변화는 아직 없지만, 심성의 미묘한 변화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화초 키우는 취미를 붙인 게 그 하나입니다. 아주 가끔 아내에게 정략적으로 꽃을 선물할 때도 “그 돈으로 상추를 사면 몇 포대는 될 텐데…”라며 속내를 드러냈다가 본전도 못 건지곤 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베란다에 열대우림 같은 화단을 가꾸고, 거실에 어른 키만 한 화분들을 들여놓은 뒤 아침저녁으로 젖먹이 돌보듯 합니다. 때맞춰 물 주고, 잎사귀 앞뒤로 스프레이하고, 흙 살짝 걷어낸 뒤 비료 묻고, 영양제 발라주고, 진드기 꼬일까 봐 살충제도 뿌려줍니다. 가뜩이나 잘 자라던 킹 벤저민과 파킬라는 봄이 찾아드니 더욱 무성하게 잎을 불려 가지를 축축 늘어뜨리고, 겨우내 말라 죽어가 속을 태우던 사철나무 분재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인 4월13일 아침, 스무 개도 넘는 쌀알만 한 새잎을 일제히 틔우며 부활을 알렸습니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이만한 보람을 맛보기도 어렵지요.

여성 호르몬 증가, 그 두 번째 조짐은 드라마를 즐겨 보는 겁니다. 방영시간을 미리 알아두고 기다렸다 볼 정도는 아니지만, 리모컨을 돌려대다 드라마가 나오면 ‘체류 기간’이 길어집니다. 5분만 보면 앞뒤 사정을 대충 짐작하고 그대로 빠져듭니다. 지난 일요일엔 하루 종일 ‘내조의 여왕’을 틀어주는 케이블 채널 앞에서 꼼짝 않고 두 끼 식사를 해결하는 저를 보며 아내가 혀를 끌끌 차더군요. 김남주, 정말 ‘군대일학’처럼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이혜영, 정말 ‘마그네슘 손상된 카드’처럼 밉살스럽지 않나요? 끌끌.

심상치 않은 조짐이 또 있습니다. 좀 창피스럽지만 눈물이 많아졌습니다. ‘이번엔 절대 안 넘어간다’고 다짐하며 신경숙의 소설을 펴들었다가, 기어이 서너 장면에서 시야가 뿌옇게 변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박중훈이 불러댈 땐 불량스럽기만 하던 ‘비와 당신’을 럼블피시가 마디마디 애절하게 엮어가니 명치끝이 턱턱 막혀옵니다. 이젠 당신이 그립지 않고 사랑한 것도 잊혀가는데 비가 오면 눈물이 난다니! 아, 정말 촉촉하지 않나요? 끌끌.

아내와 식탁에 마주 앉아 이런 얘기를 했더니 박장대소. 의자 위에 한쪽 무릎을 괴고 앉아 조잘조잘 말을 이어가는 제 모습이 영락없이 여자 사우나 휴게실에서 삶은 달걀 까먹으며 수다 떠는 아줌마 자태라는 겁니다(크게 괘념치는 않습니다. 이번 호 커버스토리를 보니 저처럼 눈썹이 힘 있고 넓으면 기세가 강하다고 하네요).



에스트로겐 예찬
마초들이 보기엔 추하게 늙어가는 것 같겠지만, 이런 조짐들을 애써 돌이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찮아 보여도 엄연히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 주변의 다양한 추상(抽象) 속 아름다움을 간파해내는 섬세함, 잠깐 정신을 놓으면 무심히 지나칠 일상의 결들에 의미를 새겨 넣는 감성…. 어느 하나 저절로 습득되지 않는 소중한 품성들 아닙니까.

피 한 방울 안 섞인 ‘패밀리’를 보호하기 위해 받지도 않은 돈을 받았다고 강변하는 아내는 차라리 의연해 보입니다. 그런 아내의 치마폭 뒤로 숨어들며 얼마 안 남은 지지자들의 얕은 감성을 긁어대는 사내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의 행태도 여성 호르몬 증가 때문으로 해석해야 할까요? 천만에요, 그건 호르몬 성차별이자 여성 호르몬에 대한 모독입니다.



주간동아 2009.05.05 684호 (p12~12)

  • 편집장 이형삼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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