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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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버지’임을 증명하는 민방위 비상소집 훈련

  • 이기호 antigiho@hanmail.net

    입력2009-04-22 14: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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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도 어김없이, 바람에 벚꽃이 날리듯 민방위 비상소집 통지서가 날아왔다.

    휴일 저녁 아내, 아이와 함께 아파트 단지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왔더니 집 앞에 턱, 통장 아주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턱’이었는데, 통장 아주머니 손에 들린 통지서를 본 순간 내 마음속에선 분명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가족 모두 산책 갔다 오셨나 보네. 한참을 기다렸어요.”

    통장 아주머니는 다짜고짜 통지서를 건네준 뒤, 다시 볼펜 한 자루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여기 수령란에 사인하시면 돼요.”



    통장 아주머니는 나를 기다린 시간이 꽤나 길고 지루했던 듯, 별다른 설명도 하지 않고 계속 손가락으로 사인할 부분만 가리켰다. 뭐, 달리 항변할 것도,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니 얌전히 사인할 수밖에.

    통장 아주머니는 사인을 받자마자 인사도 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빤히 알 수 있었다. 통장 아주머니는 이미 통지서 때문에 여러 남자의 구겨진 인상을 보았을 터. 그런 경우 통장 아주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는가. 그저 말없이 등을 돌리고 되도록 빨리 자리를 뜨는 것. 괜스레 섣부른 위로와 부연 설명을 했을 경우, 어떤 부작용이 돌아오는지 경험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 또한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인상부터 구겨졌을지 모른다. 그게 나에게는 ‘턱’이었는데, 통장 아주머니에겐 ‘와락’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통장 아주머니에겐 아무 죄가 없는 것이다. 뭐, 좋은 일이라고 서로 인사하며 민방위 통지서를 주고받겠는가.

    “여기 민방위 통지서 나왔네요.”

    “어이구 이런, 민방위 통지서를 받으니까 제 마음이 소풍 가기 전날처럼 설레네요, 고맙습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그렇게 반가워하시는 걸 보니 제 마음도 벚꽃처럼 환해지는걸요.”

    이런 모습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어쨌든 또 민방위 비상소집 통지서가 나온 것을 보니, 봄이 오긴 온 모양이었다. 지난해 이맘때 민방위 비상소집을 갔다 온 뒤,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투덜댔다.

    “내가 한 번만 더 민방위 훈련에 참석하면 성을 간다, 성을 갈아.”

    평일 아침 7시, 아파트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비상소집이었다. 출근길, 등굣길과 겹쳐 사람과 차가 뒤섞이고, 이곳저곳에서 남자들의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왜 빨리 소집훈련 참가증명서를 끊어주지 않느냐, 내가 저 사람보다 빨리 왔는데 이러는 법이 어디 있느냐, 10분 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야 하는데 어떻게 책임질 거냐 등. 비상소집 훈련은 말이 훈련이지, 초등학교 교실에서 출석을 부르는 것과 진배없는 풍경을 연출했다. 그러니까 훈련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출석만 남았다는 뜻. 나는 이 사람 저 사람 어깨에 밀린 끝에, 가장 마지막으로 출석 확인을 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엔 당신이 대신 나가면 안 될까…”

    “이게 얼마나 쓸데없는 짓이야. 다 큰 사람들 새벽부터 불러놓고 이름만 부르고 끝이라니.”

    “그게 훈련이지, 뭐. 그렇다고 다른 걸 할 수도 없잖아. 사람들이 제때 모일 수 있는가 없는가, 그거 확인하는 훈련 아니야?”

    “아이, 참. 그게 아니라니까.”

    나는 아내에게 짜증을 냈다. 남편 대신 민방위 소집통지서를 들고 온 부인네를 봤기 때문에 그랬는지 몰라도(이상하게도 이런 경우 또한 출석이 인정됐다), 아무튼 나는 민방위 제도의 문제점을 아내에게 늘어놓았다. 이런다고 정말 비상 상황이 왔을 때 사람들이 움직일 거라 믿느냐, 오히려 이런 훈련 때문에 사람들은 더 소집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민방위 훈련에 열을 올리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대타적(對他的)인 의식이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다, 그러니까 정작 중요한 것은 훈련이 아니라 대타적인 의식교육이다, 운운. 나는 계속 씩씩거리면서 훈련 때문에 날아가버린 한 시간의 아침잠을 아쉬워했다.

    “그래서 앞으론 민방위 훈련에 안 나갈 거야?”

    “그럼.”

    나는 모순된 제도를 아무 저항 없이 따르는 것도 시민의 자세가 아니라고 말했다.

    “거, 벌금이 엄청날 텐데. 그래도 안 나갈 거야?”

    아내는 그렇게 되물었다. 그 부분에서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항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 당연하나, 곧장 바닥을 치고 있는 통장 잔액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올바른 시민정신은….”

    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아내는 등을 돌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그러면서 툭, 이렇게 말했다.

    “저항을 하든 말든, 가정 경제에 피해가 없는 범위에서만 해. 민방위 벌금까지 낼 만큼 올바른 가정 경제상황은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중얼거리듯 나머지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다음엔 네가 좀 대신 나가면 안 될까.’

    올해 역시 나는 얌전히 민방위 비상소집 훈련에 참가했다. 아내가 알람을 맞춰놓았다가, 침대에서 한참 동안 뭉그적거리는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별수 있나, 시민정신도 중요하지만 화평한 가정경제도 무시할 수 없는 가장의 의무였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소집훈련장은 밀려드는 차량과 사람들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모두 하얀 소집통지서를 들고, 훈련 참석증명서를 받고 도장을 찍었다. 하나같이 투덜댔지만, 출석률은 100%에 가까웠다. 하품을 하고, 출근시간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고, 볼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나왔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는 내 또래의 아버지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하나 깨달았다. 아, 이건 민방위 훈련이 아니고 아버지 훈련이었구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는 훈련이었구나.

    그래도 나는 올해 역시 아내에게 투덜댔다.

    “그걸 꼭 초등학교에서 해야겠느냐, 이 말이야. 아이들이 뭘 보고 배우라고. 올바른 시민이라면 말이야….”

    아내는 올해 역시 내 말을 듣다 말고 가스레인지 쪽으로 뛰어갔다. 나를 위해 아내가 끓인 북엇국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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