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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특파원의 도쿄 프리뷰

폐허 된 ‘러브레터’의 ‘빨간 별장’

  •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iam@donga.com

폐허 된 ‘러브레터’의 ‘빨간 별장’

폐허 된 ‘러브레터’의 ‘빨간 별장’

영화 ‘러브레터’의 주인공 후지이 이츠키와 불타버린‘빨간 별장’의 터(작은 사진).

일본 본토와 홋카이도(北海道)를 모두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두 지역의 주택건축 양식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금방 눈치챌 것이다.

홋카이도에 본토와는 다른 주택건축 문화가 생겨난 원인을 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건축가 다노우에 요시야(田上義也·1899~1991)다. 세계 4대 건축가로 꼽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제자인 다노우에는 간토(關東)대지진이 일어난 1923년 도쿄를 뒤로하고 미개척지 홋카이도로 향했다. 삿포로(札幌) 교향악단을 창설하는 등 음악에도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홋카이도의 지식인과 부호들의 의뢰를 받아 수많은 개인 저택과 별장을 지었다. 다노우에가 1927년 한 탄광 기업주의 의뢰로 설계한 일명 ‘빨간 별장’도 그 가운데 하나다.

오타루(小樽) 시 외곽 이시카리(石狩) 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던 이 별장은 홋카이도의 소중한 문화유산 중 하나다. 오타루 시는 1994년 ‘빨간 별장’을 개인 소유 주택 중에서는 유일하게 ‘역사적 건조물’로 지정했다.

1999년 한국에서 개봉돼 14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고 ‘오겡키데스카(‘안녕하세요’라는 뜻의 일본어)’ 열풍을 불러일으킨 영화 ‘러브레터’의 주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주인공 후지이 이츠키가 살던 집이 이 ‘빨간 별장’이다. ‘빨간 별장’은 대중교통 시설이 잘 정비되지 않은 오타루 외곽 주택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5월26일 화재로 잿더미 … 일본 독도 불장난과 겹쳐 보여



그런데도 ‘빨간 별장’은 오타루를 방문하는 한국 관광객이 가장 즐겨 찾는 명소였다. ‘러브레터’의 매력에 빠진 일본인들이 가끔 이곳을 찾기는 했지만 방문객의 주류는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일본어 공부를 위해 이 영화를 수십 번 넘게 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팬이 된 필자도 언제부턴가 이곳을 꼭 한 번 찾아가보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드디어 7월23일. 한국 관광책자에서 찾아낸 주소를 승용차 내비게이션에 입력한 뒤 ‘빨간 별장’으로 향했다. 오타루~홋카이도 간 자동차도로의 제니바코(錢函) 교차로를 통과한 지 1분도 안 돼 내비게이션에서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이 가리킨 곳은 나무와 잡초만 무성한 공터였다. 4면 중 한쪽 면에 쌓아올린 담벼락만이 한때 그 자리에 건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줬다.

나중에 확인한 것이지만 ‘빨간 별장’은 5월26일 일어난 화재로 불타버렸다고 한다. 거실 난로에서 시작된 불씨가 별장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오타루 시는 화재가 난 지 일주일 만인 6월1일 ‘역사적 건조물’ 지정을 해제하고 5개 국어로 된 설명간판마저 철거했다. 이곳에 건축가 다노우에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자 ‘러브레터’의 무대가 된 건축물이 있었다는 흔적은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셈이다.

한일관계에서 ‘러브레터’는 단순한 영화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러브레터’는 일본 대중문화 본격 개방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양국이 쌓아올린 신뢰관계가 있었기에 ‘러브레터’는 한국 영화시장에서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인 한일 간에 신뢰를 쌓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렵게 쌓아올린 신뢰감을 무너뜨리는 것은 한순간이다. 한일 양국 국민에게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던 ‘빨간 별장’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것처럼 말이다. 폐허로 변한 ‘빨간 별장’에, 독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위험한 ‘불장난’ 중인 일본의 모습이 겹쳐 보인 것은 괜한 상상력의 비약은 아닐 것이다.



주간동아 2008.08.12 648호 (p65~65)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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