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8

2008.06.03

담백한 밥과 국, 반찬 조선 유생들의 한 끼 식사

  • 허시명 여행작가 twojobs@empal.com

    입력2008-05-27 15:1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담백한 밥과 국, 반찬 조선 유생들의 한 끼 식사

    성균관 문묘제사(위)와 진사식당에서 내놓는 돌솥비빔밥.

    우리나라 최초의 ‘식당(食堂)’은 어디일까. 조선시대에는 주막이 식당 구실을 했다. 하지만 주막을 식당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조선시대에 식당이라고 불렀던 공간은 따로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집단 급식을 했던 곳이 바로 식당이었다. 이 식당은 조선 태조 때 명륜당과 함께 명륜당 동편에 지어졌는데 남향으로 33칸 규모였다.

    서울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 안내도를 보면 그 식당은 ‘진사식당’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식당인 셈이다. 이 식당에선 성균관 유생들이 단순히 식사만 해결한 것이 아니라 출석 점검까지 했다. 식당지기가 식당에 들어오는 유생들의 인명부에 방점을 하나씩 찍어주었는데, 아침 저녁 두 끼로 1점을 먹였다. 이를 원점(圓點)이라고 하는데 원점이 쌓여 50점이 되고, 100점이 되면(시기마다 기준이 달랐음)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방점의 근본 취지는 성균관에 출석하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날수만 채우려 드는 ‘날라리’ 유생들을 가려내기 위한 것이었다.

    진사는 조선시대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생원과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있었다. 성균관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주로 진사라 진사식당이라고 칭했던 것.

    우리나라 최초의 식당 … 특식 팔괘와 3첩 반상이 기본

    이 원조 식당의 전통을 이어받아 마련된 식당이 현대식으로 지은 유림회관 1층의 진사식당이다. 이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은 대를 이어 성균관의 제사음식을 만들고 성균관을 관리해온 이정우 씨 내외다. 유림회관이 지어지기 전에는 성균관 안 진사식당에서 음식을 냈다.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은 이씨의 부인인 김인겸 씨다. 김씨는 시집온 날로부터 성균관의 문묘(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 제사음식과 성균관을 출입하는 유생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 그 세월이 50년이 됐다. 유림회관 진사식당에서는 돌솥비빔밥 생태찌개 김치찌개 버섯불고기 등을 내놓는다.



    조선시대 진사들에게 제공된 음식은 팔괘라 하여 밥 국 장 김치 나물 젓갈 생채 좌반(佐飯·밥 옆에 따른다는 의미로 염장생선류, 즉 자반과 같은 뜻) 해서 여덟 가지로 구성된다. 좌반은 성균관 재정상 끼니마다 제공된 것은 아니었기에 소박한 3첩 반상(밥 국 장 김치 이외의 반찬을 담은 접시가 셋인 밥상)이 성균관 진사들의 음식이었다. 현대의 진사식당과 조선시대 진사식당의 음식 차이에서 식당 음식과 식습관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예전엔 소박한 국과 반찬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맛이 강렬한 탕이나 찌개 중심이다.

    부인 김씨는 봄가을 성균관의 문묘 제사(釋奠)에 필요한 음식을 장만한다. 직접 술을 빚고 홍두깨살을 구해 육포를 만들고 장에 나가 과일도 준비한다. 제사가 끝나면 행사를 주관한 유림에게 주과포(酒果脯)를 선물한다. 김씨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국가제사 중에서는 유일하게 손이 끊기지 않고 제물을 마련해온 문화재급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요즘 가슴앓이가 생겼다. 숭례문이 불탄 뒤 성균관을 보호한다고 이들이 대를 이어 살아오던 성균관 진사식당 건물에서 내쫓김을 당한 것.

    김씨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쓸고 닦고 손에 톱날이 설 정도로 성균관을 지켜왔는데, 하루아침에 내쫓겼으니 어디 가서 하소연하냐”며 눈물지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