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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창| ‘사라져가는 목소리들’

할리우드 영화 소수 언어는 ‘암호’

할리우드 영화 소수 언어는 ‘암호’

예수의 수난을 다룬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흥미로웠던 것 중 하나는 영화 속 낯선 언어였다. 영화에서 예수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구사한 이 생소한 언어는 예수가 살던 시기인 2000년 전에 썼던 고대 아람어다.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에서 영어 아닌 다른 언어가 쓰인 것만으로도 이채로운 일인데, 그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보지도 못했을 아람어를 썼다는 것은 이 영화가 빚어낸 여러 화젯거리 중 하나가 되기에 충분했다. 아람어는 3000년 전부터 아랍 지역에서 널리 쓰이던 말이다. 22개의 알파벳으로 이뤄진 이 언어는 유대인 성경의 초기 유물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아람어를 쓴 것은 예수가 새로운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 아랍 땅을 두루 돌아다닐 때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고고학적 추론에서 비롯됐다. 예수는 히브리어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아람어를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아람어는 지금 순전한 과거의, 완전히 소멸된 언어는 아니다. 아직도 시리아 등 일부 지역에서는 이 말을 쓰고 있다. 한때 많은 사람들이 썼던 이 언어가 위축되기 시작한 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제국을 확장하는 과정에 그리스어가 확산되면서부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아람어를 쓴 것은 결과적으로 영화의 리얼리티를 살려주는 데 상당한 구실을 했다. 옛날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고증은 기껏해야 의복이나 무대 시설을 갖추는 것에 머무른다. 그러니 당시의 언어까지 복원했다는 것은 다른 영화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특히 아람어가 빚어내는 리얼리티는 예수라는 신성(神性)의 사나이의 이야기와 맞물려 신비스러운 후광을 연출해냈다. 아람어는 영어 일변도의 요즘 영화에서 일종의 비밀스런 암호와도 같이 느껴졌다.



최근 개봉된 ‘인터프리터’에서 아람어 같은 소수 언어가 빚어내는 효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여주인공의 직업이 유엔본부 통역원으로 설정된 것은 소수 언어가 사건의 발단이기 때문이다. 니콜 키드먼이 분한 이 통역원은 우연히 어둠 속에서 아프리카 소수 언어로 국가원수 테러를 모의하는 대화를 엿들으면서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극히 소수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 그것은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사소통을 거부하는 암호에 가까웠던 것이다.

‘인터프리터’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것이지만, 몇 년 전 국내에 소개된 ‘윈드 토커’라는 영화는 그 역사적 실재 사례를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의 암호 교란작전으로 고전하던 미군이 들고 나온 새로운 암호 무기가 나바호 언어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가상이든 실제든 영어 일변도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암호화된 언어, 이를테면 이것이 전 세계 소수 언어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인지 모르겠다. 사멸해가는 소수 언어, 이들은 그 일단의 존재 가치를 이제 소통의 도구가 아닌 영화의 희귀한 소도구에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2년 전 국내에 번역 소개된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은 이들 소수 언어의 위기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지난 500년 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의 언어들 중 거의 절반가량이 사라졌다고 한다.

특히 언어의 소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앞으로 100년 안에 전체 언어의 90%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이코노미스트’지가 전하는 예들은 더욱 생생하다. 카메룬에서 사용되는 ‘부수’어는 현재 8명만 사용하고 있고, 미국의 ‘리판 아파치’어는 2~3명, 호주의 ‘와두지구’어는 사용하는 사람이 한 명이거나 아예 없다.

언어 세계야말로 어느 분야보다 독과점화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 같은 독과점화는 세계화에 의한 강대국 언어의 ‘침탈’이 주범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꼭 강력한 언어의 약소 언어에 대한 ‘억압’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약소 언어가 스스로 소멸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도 적잖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어는 약소 언어인가. 앞서 말한 책에 따르면 한국어는 세계 상위 15개 언어 중 하나다. 하지만 저자는 “사용자 수가 많다는 것이 그 언어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영어 공용화론이 더 이상 금기시되지 않는 요즘 분위기에서 이 지적은 너무도 생생하게 울린다.



주간동아 2005.05.31 487호 (p79~79)

  • 이명재/ 자유기고가 minho1627@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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