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0

2001.09.06

‘주간동아’속에 ‘세상의 길’이 있었네

정치·경제·사회 등 뉴스 지면 선도한 ‘숨가쁜 6년’

  • < 김진수 기자 > jockey@donga.com

    입력2004-11-22 14:1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주간동아’속에 ‘세상의 길’이 있었네
    시사주간지 ‘주간동아’가 지령 300호를 맞이했다. 창간 준비호(1995년 8월30일자)를 냈을 때 제호는 ‘NEWS+’(뉴스 플러스)였다. 그야말로 ‘뉴스 이상의 뉴스’를 독자에게 적시에 전달함으로써 다른 시사주간지와의 차별화를 시도한 게 ‘뉴스 플러스’의 지향점이었다. 참신한 기획과 심층취재로 독자들에게서 ‘A+ 학점’의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 첫째 각오요, 기사 자체에 머물지 않고 당장 활용 가능한 정보까지 제공하겠다는 게 두 번째 각오였다. 이런 ‘뉴스 플러스’는 95년 당시 75년의 전통을 지닌 ‘동아일보’와 창간 64년을 맞은 월간지 ‘신동아’ 사이를 잇는 ‘가교’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비매품으로 배포한 창간 준비호에서 맨 먼저 눈길을 잡아채는 건 책 앞부분에 자리한 ‘포토’.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져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여러 단면을 한눈에 보여주는 이 지면에는 당시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희생자 유가족 500여 명이 빗속에 벌인 시위 소식이 실렸다.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은 피해자 70명에 대한 피해보상을 촉구하는 시위였다.

    그랬다. 95년은 대구 지하철 폭발사고(4월)와 뒤이은 삼풍 참사(6월)가 전 국민을 경악에 빠뜨리고, 전 세계 언론에게서 ‘사고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쓴 해였다. ‘뉴스 플러스’는 그런 혼란의 와중에서 ‘기획보도와 탐사보도’ ‘격조 있는 문화정보 제공’을 기치로 탄생했다. 그로부터 6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면에 비친 세상은 어떠했을까.

    95년 하반기는 사회 변화의 템포가 가속화하기 시작한 시기. 당시 ‘뉴스 플러스’는 성공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회사와 가정의 틈에 끼여 방황하는 중년 남성의 비애를 다룬 ‘위기의 남성학’(창간호 특집)이나 총 12쪽에 걸쳐 인터넷 시대의 잠재력을 예고한 ‘인터넷 제국, 컴맹은 떠나라’(2호 커버스토리) 등으로 향후 보편화할 사회 트렌드를 발 빠르게 짚어냈다. 이 시기의 ‘실용정보’에 나타난 구입 권장 PC가 486DX2급이었음을 보면 우리 생활이 지난 몇 년 간 엄청나게 달라졌음을 실감할 수 있다.

    ‘주간동아’속에 ‘세상의 길’이 있었네
    ‘안기부 민간인 사찰 기록(1986년 작성) 입수’ ‘2개 노총시대 연 민주노총 출범’(95년 11월), 발매 10여 일 만에 달성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 홈’ 100만 장 판매기록 등에서도 다양한 변화의 흐름이 감지된다. 이어 노태우씨의 비자금 부정축재와 ‘92년 대선자금’이란 ‘초특급 태풍’의 강타로 대한민국은 ‘대도(大盜) 공화국’(7호 커버)이란 또 다른 닉네임을 갖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YS는 ‘5·18특별법’ 제정을 전격 지시했고, 언론엔 시국상황과 관련한 정치기사가 범람했다.



    96년부터 ‘경제불황’ 지면에 자주 등장… IMF 전주곡

    이 때문인가. ‘뉴스 플러스’ 9호는 점복과 역술의 성행을 ‘무속 신드롬’이란 특집으로 다뤘다. 이 무렵 독자들은 “정치기사가 너무 많다” “경제·과학·문화기사를 늘려라”며 탈(脫)정치 성향을 보였다. 세계 곳곳에 포진한 통신원들의 국제뉴스 비중도 자연히 높아졌다.

    두 전직 대통령 구속과 12·12, 5·18에 대한 단죄로 대표되는 ‘역사 청산’의 한해가 저물었지만, 15대 총선(4월)이 예정된 96년 또한 여전히 격동의 해였다. ‘뉴스 플러스’의 커버스토리 역시 한동안 총선 전망과 판세 분석 기사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이즈음 한반도엔 ‘사법고시 광풍’이 불었다. 대학생은 물론 30~40대 엘리트 직장인까지 가세한 ‘이상기류’는 어쩌면 이후 계속될 사회 혼란의 전조였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서민에겐 ‘살 맛 안 나는’ 시대가 급습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상습적인 지하철 지연운행에 불만을 품은 한 30대 직장인이 철도청에 폭파협박전화까지 했을까. 그리고 시민단체까지 그의 구명에 뛰어들었을까(27호).

    ‘주간동아’속에 ‘세상의 길’이 있었네
    총선 이후 ‘뉴스 플러스’는 ‘한국서 버림받는 탈북자들’(29호, 4월11일자), ‘어린이 사치’ ‘연예인 모방문화’(이상 30호) 등 인권 소외지대에 놓인 사회적 소수자나 소프트한 생활문화 특집의 비중을 대폭 늘렸다. 삼성의료원과 공동기획한 ‘한국인 5대 암과의 전쟁’(34호)이나 ‘교통체증, 공해, 불친절로 가득 찬 서울, 국제도시인가’(35호)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 무렵 경제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재계에서 ‘역발상 경영’을 강조한 것도 이때다. 총체적 위기에 빠져드는 경제상황을 경고한 커버 ‘한국경제 침몰중’(41호)은 44호에 이르러 ‘허영의 포로-신세대 호화사치’에 표지기사 자리를 내줬다. 머리에서 발 끝까지 외제상표에 중독된 과소비 신세대들을 사회적 다양성의 분출이란 미명하에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지난 96년 하반기 들어 감량경영에 돌입한 기업들은 일제히 ‘명퇴자’를 쏟아내기 시작했고(51호), 치솟는 물가는 비상사태를 연상케 했다(52호). 더 나아가 창간 1주년 기념호(53호)는 ‘한국사회 이대론 안 된다’는 제하의 표지기사로 ‘원칙 없는’ 한국사회를 질타했다. 이즈음 서울대생 딸에게 보낸 한 아버지의 편지는 ‘놀자판’ 대학생들에게 경종을 울렸고, 불륜과 로맨스의 경계를 허문 드라마 ‘애인’ 덕에 96년 한국의 가을엔 온통 ‘불륜 신드롬’이 풍미했다. 명(明)과 암(暗)이 교차한 한해는 그래도 어김없이 세월의 뒤안길로 퇴장했다.

    ‘주간동아’속에 ‘세상의 길’이 있었네
    ‘1997 한국, 대파국 오는가’. 97년 1월9일자(67호) ‘뉴스플러스’ 표지엔 검은 바탕에 이런 붉은 글씨의 제목이 선명하다. ‘포토’ 기사엔 96년 말 여당의 노동법 개정안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저항’이 담겼다. 곧 터질 IMF사태의 징후였을까. 정치·경제·사회·문화 가릴 것 없이 온통 우울한 기사들뿐이었다.

    ‘한보 커넥션’(70호)을 비롯해 ‘명퇴 1년…창업에 또 울다’(82호), ‘가족 해체시대’(93호), ‘특권층이 판치는 나라’(97호), ‘콩팥 팔아 부도 막는 중소기업 사장들’(98호), ‘보증피해 줄 잇는다’(108호)…. 끝이 안 보일 정도였다. 아니, 나라가 거덜날 판이었다. 외국에선 이미 한국을 ‘파산국가’로 취급한다는 소식까지 들리더니 111호(12월4일자)는 마침내 ‘IMF 신탁통치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97년엔 특히 불황에 따른 요지경 세태를 반영하는 기사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 ‘정신과 의사 책, 정신없이 팔린다’(85호), ‘청소년 마약, 큰일났다’(87호), ‘성(性) 파는 10대 소녀들’(90호)…. 아직 ‘원조교제’(청소년 성 매매)란 신조어가 생기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일그러진 정치’와 ‘무너진 경제’ 속에서도 ‘희망’은 존재했다. 창간 2주년 기념호(9월18일자)는 ‘우리 시대 보통 영웅들’을 커버로 올렸다. 화려하지도 않고 개인의 이득에 연연해하지 않는 심성 착한 ‘보통 사람’ 8명의 얘기는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교훈을 새삼 일깨웠다. 이 특집은 한동안 시리즈로 이어졌다. 재산 700억 원을 사회에 헌납한 이종대옹(67호)의 이야기 등을 다룬 ‘사람과 삶’ 코너도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대선(大選)의 해’를 지나 98년 ‘DJ 시대’가 개막되었다. 하지만 경제사정은 여전히 안 좋았고, 정치권은 연초부터 ‘북풍’사건으로 달아올랐다. ‘불신의 시대’는 ‘도청(盜聽) 공화국’을 134호(5월21일자)의 커버스토리로 오르게 했고, 급기야 6월 말 정치권에선 여야의 ‘도청 공방’까지 벌어졌다. KBS의 ‘수달 다큐’ 프로그램마저 조작임이 드러나 국민을 경악케 했다.

    해외도 예외는 아니었다. 클린턴 미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이 터졌고, ‘뉴스 플러스’ 149호는 ‘허리 아래’ 문제를 쉬쉬하는 국내 정치인을 꼬집었다. IMF 체제하에서도 서울대 총장과 검사, 대기업 임원 등 지도층 인사들은 고액과외 사기를 당하는 ‘웃지 못할’ 촌극을 연출했다(150호). 또 8월 말,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는 전 세계에 ‘쇼크’를 안겼다. 그러나 분명 세월은 변하고 있었다. 김민기의 ‘상록수’는 정부 캠페인의 주제가가 되었고, 검찰은 범청학련 활동과 관련한 5명에 대해 구속 취소 결정을 내렸다. 패러디 신문의 원조 ‘딴지일보’도 화려한 등장을 알렸다.

    ‘골프 여왕’ 박세리의 연승행진은 ‘게릴라 수마’(水魔)에 당한 국민을 위무했고, 이때 처음 도입된 ARS모금은 단 10일 만에 100억 원을 모아 훈훈한 민심이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줬다.

    게놈·자살사이트 등 화제… 빨라진 ‘반복의 속도’ 실감

    ‘주간동아’속에 ‘세상의 길’이 있었네
    ‘구조조정’이란 ‘망령’은 99년에도 여전히 한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한쪽 언저리에선 코스닥 열풍이 불어왔다. 98년 말 75.18포인트에서 99년 5월12일 현재 131.08포인트로 무려 71.57%나 상승한 코스닥 지수(185호, 5월27일자)는 이듬해 상반기까지 이어진 ‘전쟁’(錢爭)의 예고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O양 비디오’는 인터넷 확산과 더불어 한국을 ‘포르노 공화국’으로 변모시켰다. ‘인터걸’들도 한국의 밤문화에 뿌리를 내렸다(181호, 4월29일자). 96년 ‘정보화사회 원년’을 맞아 사이버스페이스의 ‘빛과 그림자’를 일찌감치 순발력 있게 조명한 특집(27호)은 3년 뒤인 99년 사이버 매매춘의 등장(205호)으로까지 이어졌다.

    99년 9월. ‘뉴스 플러스’는 창간 4주년을 맞아 203호부터 ‘주간동아’로 제호를 바꿨다. ‘밀레니엄 리더 매거진’으로 도약하기 위한 ‘재창간’을 선언한 것이다. 새로 탄생한 ‘주간동아’는 좀더 생활과 밀착된 기사로 출발했다.

    2000년은 유토피아로만 여긴 ‘디지털시대의 그늘’(232호, 5월4일자)이 본격적으로 부각하기 시작한 해였다. 세계 인구 60억에, 국내 인터넷 인구 1400만 명. 인터넷 강국. 하지만 IT 혁명의 총아로 불린 벤처기업들은 코스닥에서 급속히 퇴출되었고, 테헤란밸리에는 삭풍이 휘몰아쳤다. ‘반토막’에 또 ‘반토막’. ‘개미’들은 ‘쪽박’을 찼다. 정보의 불평등은 빈부 격차로도 이어졌고, 빈발하는 해킹으로 개인정보 유출 방지에 비상이 걸렸다. 채팅은 부작용에도 아랑곳없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로비’도 화두의 하나였다. ‘린다 김 스캔들’ ‘고속철 로비’(235호) 등 여성 로비스트의 눈부신 활약(?)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현대 사태’ 이후 재벌들은 존립 위기를 맞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만의 폐쇄성’을 특징으로 한 신귀족들이 생겼다(241호).

    ‘주간동아’속에 ‘세상의 길’이 있었네
    평양 남북정상회담은 마치 ‘통일’이나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지만, 사회 혼란은 여전했다. 지난해 7월1일부터 시행한 의약분업은 의·약계의 ‘이전투구’(泥田鬪狗) 틈바구니에 낀 환자들을 ‘겹고통’에 빠뜨렸다. 공적 자금이 줄줄 새는데도(254호) 정치권은 민심을 정확히 읽지 못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래서 2001년은 2000년의 연장처럼 여겨진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21세기엔 뭘 먹고 사나’(268호), ‘미래가 안 보인다’(270호), ‘회수 안 되는 공적자금’(280호)…. 반복의 연속. 역사란 이런 것인가.

    그런데도 ‘반복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진다. ‘포스트 게놈’(273호)에 대한 전망이 앞다퉈 나오고, 자살사이트·낙태사이트 등 기상천외한 사이트들이 인터넷에 명멸한다. 정선 카지노는 ‘대박’을 꿈꾸는 욕망으로 넘치는데, 몇 개월 전만 해도 소비심리 위축으로 속출한 미분양 아파트는 이제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최근호인 299호(8월30일자)엔 항공안전 2등급 판정으로 ‘하늘의 IMF’를 맞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언제쯤 우리는 이 ‘회색빛 터널’을 지날 수 있을까.

    ‘선택적 가독성’과 ‘핫 이슈’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시사주간지의 특성상 독자층과 기사 소재가 다소 제한적일 수는 있지만, ‘주간동아’가 그동안 다룬 테마의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지난 6년을 더듬어 보건대 독자의 바람과 애정어린 질책을 모두 소화해 적절히 지면에 반영했다고는 감히 생각하지 않는다. 지령 300호를 맞아 ‘주간동아’ 스스로 ‘빛 바랜 사진 속 앳된 얼굴’ 같은 초발심(初發心)의 흔적을 찾으려 299권의 적잖은 지면을 일일이 들춰본 것도 이런 자성(自省)에서다.

    ‘처음처럼!’ ‘원칙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주간동아 300호’가 독자들에게 다짐하는 약속이자 각오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