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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따라 … 세월 따라 …

영월책박물관 ‘종이로 보는 생활풍경展’ … 1883년경 이후 인쇄물 한자리에

종이 따라 … 세월 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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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는 도처에 있다. 일상생활에서 순간순간마다 사소하고도 중대한 일을 수행한다. 종이는 그 상태로 머물면서 전달한다. 그때 종이는 언어와 민족의 기억을 소장한다. 종이는 증언한다. 그때는 증거이자 법이 된다. 또 종이는 순환하며 의사소통을 한다. 그때에는 당대의 지적-경제적 교류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재가 된다. 종이는 장식하고 포장한다. 그때 종이는 상품구매를 유혹하는 소비사회의 핵심이 된다”(피에르 마르크 드 비아지의 ‘종이’에서).

현대 문명에서 종이의 역할을 이만큼 잘 정리한 글도 없을 것이다. 영월 책박물관이 마련한 ‘종이로 보는 생활풍경-근대 종이, 인쇄, 광고 디자인전’은 우리 나라에 신식 활판 인쇄술을 도입한 1883년경부터 1960년대 사이의 인쇄물 중 포스터, 사진, 증명서, 신문, 호외, 전단, 광고지, 자필원고 등 생활사 자료를 중심으로 종이의 쓰임새와 인쇄-디자인의 역사적 흐름을 보여주는 전시회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한눈에 ‘촌스럽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지만 그것이야말로 궁핍했던 시절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해 주는 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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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손 제패가, 우승의 감격-손기정, 콜럼비아레코드’. 낡은 LP 레코드의 손바닥만한 크기도 안 되는 동그란 레이블 종이에도 역사는 기록되어 있다. ‘복장계의 왕좌는 모샤이다’. 일제 강점기 멋쟁이들에게 인기 있던 하늘하늘한 모슬린 천의 광고 포스터다. 원래 족자형태로 걸려 있던 것을 전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액자에 넣은 것이 아쉽지만 당시 풍속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농촌형제여 풍년이 들어 쌀은 만소만은 다른 물건이 업서서 곤나하구려. 도시형제는 식량이 업서 매우 곤난하다. 농촌형제여 쌀을 생활필수품회사로 팔고 회사로부터 필수품구입증명서를 밧으라”(당시 표기법에 따른 것). 광복 직후 미 군정청이 만든 포스터 ‘남는 쌀을 팔읍시다’의 내용이다. 정부에 의한 추곡수매라는 것이 없을 때 도-농간 원활한 물자교환을 위해 마련한 조치였다. 영화 포스터야말로 그 시대를 대표하는 대중 인쇄물이다. ‘춘향전’ ‘산유화’ ‘유혹의 강’ ‘사랑’ ‘춘희’ ‘아내만이 울어야 하나’ ‘청춘극장’ 등 국내외 영화 포스터 50여 점이 준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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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보다 종이가 널리 쓰였던 시대에는 각종 상품 케이스 등 포장에서도 종이가 일등공신이었다. 일제시대 ‘닭표 빈대약’, 비슷한 시기 동아약화학공업주식회사가 만든 ‘강력살충제 구라콘’, 종이로 된 금복화투도 있다. 풍년초 담배, 율곡성냥, 대성성냥, 백조성냥, 유엔성냥 등 담배와 성냥만으로도 전시대 하나가 가득 찬다. 남자들의 눈길이 담배에 끌리는 동안 여자들의 눈길은 화장도구에 모인다. 로맨스백분, 장미백분, 서가도란, 화신장분, 서가연지 등 일제시대와 1950년대를 주름잡던 화장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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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의 한 폐교에 책박물관이 들어선 지 3년. 지난 99년 서울에서 고서점 ‘호산방’을 운영하던 박대헌 관장(48)은 트럭 20여 대에 평생 모은 자료와 가족들을 싣고 영월에 안착했다. 박관장은 해마다 “느낌이 있는 전시, 자극을 주는 전시”를 강조하는 색다른 기획전을 마련해 호평을 받고 있다. 봄기운으로 화사한 운동장을 지나 전시실인 교사로 올라오는 첫걸음부터가 새로운 자극이 될 것이다.



‘종이로 보는 생활풍경’/ 10월31일까지/ 영월책박물관/ 033-372-1713~4



주간동아 2001.04.26 281호 (p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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