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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말리는 美대선 연장전 “흥미진진”

플로리다 재검표 초인류 변호사들 총출동...공화당 ‘베이커’ 민주당 ‘크리스토퍼’ 야전사령관

피말리는 美대선 연장전 “흥미진진”

피말리는 美대선 연장전 “흥미진진”
미 대통령 선거 연장전을 치르고 있는 플로리다주에는 명함깨나 내미는 미국의 초특급 슈퍼 변호사들이 모여들었다. 민주-공화 양당을 대표하는 일류급만 모인 것이 아니다. 워싱턴과 뉴욕에서 활동하는 변호사들도 무리를 지어 일찌감치 플로리다의 지역 파트너들과 합세해 속속 플로리다로 날아들어 임시 사무실을 차렸다.

이 중에서도 고어 후보 법률팀의 좌장 격인 데이비드 보이스(David Boies)야말로 화제의 인물이다. 11월21일 주 대법원의 재검표 시한 연장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낸 일등공신으로, 11월7일 선거일 이후 줄곧 울상이던 고어 선거팀에 모처럼 환한 웃음을 안겼다.

데이비드 보이스. 뉴욕 변호사다. 마이크로소프트사를 반독점법 위반으로 고소한 법무부 편에 서서 원심에서 빌 게이츠를 깔아뭉갠 장본인. 인터넷 음악 제공이 도둑질인지 아닌지로 아직도 시끄러운 냅스터의 변호도 맡고 있다. 이 외에도 유명인 소송 사건 등 그가 맡고 있는 굵직굵직한, 현재 진행중인 사건만도 세 건이나 된다.

부시 진영 “속전속결로 끝내자”

11월21일 주 대법원 판결이 난 직후 기자회견장에서 보이스는 평소 그에게 붙어다니는 명성이 과장된 게 아니라는 것을 유감없이 증명해 보였다. 선거법에 대한 까다로운 질문이 나올 때마다 그는 쪽지 하나 없이 42쪽에 달하는 주 대법원 판결문을 거의 줄줄 외다시피 했다. “36쪽 둘째 문단 5행에 나와 있듯이…”하는 식이었다.



훤한 앞이마에 헝클러진 머리, 예일대 출신의 뉴욕 변호사답지 않게 부드럽고 차분하며 나긋나긋한 어투에, 까다로운 법률 용어를 알아듣기 쉽고 푸근하게 풀어가는 말솜씨가 일품이다. 중급 백화점 기성복을 즐겨 입고, 검정 운동화를 신고 법정에 나타나기도 하는 털털한 사나이다. 아무리 복잡한 법률 사건도 일단 보이스의 머리 속에 들어가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깔끔하고 감칠맛나되 확고한 언어로 바뀌어 나온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고어가 가동하는 ‘꿈의 법률팀’에 11월13일 뒤늦게 합류했다. 보이스와 같이 합동법률회사를 운영하는 변호사 조너선 쉴러는 “왜 보이스를 안 데려가나 했다. 하기야 할 일이 산더미라 끌어가도 걱정이었다”고 말한다. 공화당 입장에서는 마감 시한 지난 재검표는 인정할 수 없다는 플로리다주 정무장관 캐서린 해리스의 선제 공격이 보이스라는 고어의 ‘법률 불도그’를 끌어들인 셈이니, 악재를 자초한 꼴이다.

보이스를 끌어온 사람은 플로리다 비상대책팀장인 워런 크리스토퍼 전 국무장관과 듀크 대학 로스쿨 교수이자 고어 자문역인 월터 데링거. 데링거와 보이스는 예일 법대 동창이다. 민주당원인 보이스가 고어 법률팀에 합류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쟁쟁한 거물급 변호사들이 즐비했던 고어와 부시의 법률팀은 더욱 화려해졌다.

두 후보의 법률 진영에는 민주당의 워런 크리스토퍼와 공화당의 제임스 베이커라는 전 국무장관 두 명이 포진해 있다. 두 명 모두 70객이고, 워싱턴은 물론 미국을 이끌어가는, 정계의 장자요 현자로 군림하는 노익장들이다.

전 상원의원 로버트 돌(공화당), 조지 미첼(민주당), 하버드 대학의 헌법학 스타인 로렌스 트라이브(민주당), 레이건 행정부에서 일했던 시어도어 올슨(공화당) 등도 버티고 있다. O.J. 심슨, 쿠바 소년 곤잘레스 사건 등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형 건수들을 맡았던 이 화려한 변호사들의 대행진을 일컬어 ‘워싱턴 포스트’지는 ‘스타급 테너 군단이 모인 플로리다의 법률 오페라 무대’라고 했다.

부시와 고어에게만 변호사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플로리다주 법무장관도 폴 핸콕 변호사를 고용하고 있고, 주 정무장관인 캐서린 해리스는 주 대법원에 맞서기 위해 조셉 클록을 내세웠다.

대선이라는 본 경기가 끝난 뒤 연장전에 돌입, 한 회 한 회 이어지듯 진행되는 플로리다주 재검표 게임에서는 고어 변호사팀의 전략이 월등히 한 수 위였다. 부시측이 재검표가 끝나기도 전에 미리 승리를 선언하는 태도로 나오면서 ‘내 표를 훔쳐가지 말라’고 목청만 높이고 있었을 때, 민주당 변호사들은 유권자의 투표권 반영, 정확한 검표 등 갖가지 논리로 무장하고 차근차근 법률 공방전을 준비했다.

공화당이 속전속결 전략이었다면, 민주당은 현 상태를 유지한다는 허리춤 잡기 전략이었다. 법정은 현 상태 유지를 명령할 권한이 있다는 점을 십분 활용한 것이었다. 물론 공화당 변호사들의 선점전략이 법률 공방의 상식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시 진영은 재검표가 고어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만 집착해 재검표 막기에만 골몰했던 것도 사실이다. 부시 법률팀이 ‘뻔뻔했다’는 지적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피말리는 美대선 연장전 “흥미진진”
특히 공화당 비상팀을 이끌고 있는 베이커 전 국무장관은 틈만 나면 개표작업 마감을 외쳤다. 수검표가 기계 검표보다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주장도 공화당의 단골 메뉴였다. 기계 검표기 제조자조차 기계 검표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상황에서 베이커와 공화당 법률팀의 말은 먹혀들지 않았다. 공화당 변호사들의 전략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언론의 지적에 부시 법률팀은 선거가 빨리 끝나지 않으면 미국이 위태로워진다는 ‘위기론’으로 맞섰으나 역시 법률 공방전에서는 먹혀들지 않았다.

공화당은 처음부터 두 가지 점에 전략의 초점을 맞췄다. 부시가 근소한 차이로 앞서가고 있는 개표 결과를 플로리다주 정무장관인 공화당원 캐서린 해리스를 통해 확인한다는 것과, 플로리다주 대법원에서 이 확인 조치를 승인하거나 또는 최소한 이 결과를 수용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부시 법률팀의 수장이자 플로리다 재검표라는 전대미문‘전투’의 ‘야전 사령관’인 베이커 전 국무장관에게 눈길이 쏠렸다. 부시 법률팀의 일거수 일투족은 그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 하지 않는다. 베이커 는 매일 아침과 저녁, 텍사스 오스틴의 부시와 체이니, 선거대책위원장인 돈 에번스와 통화하고 아침 식사 후에는 플로리다 법률팀과 회의를 한다.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베이커는 1976년부터 1992년까지 다섯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러낸 공화당의 백전 노장. 대통령 선거라면 ‘마스터’ 소리를 듣는 인물이다. 그의 손에 공화당 플로리다 비상팀의 지휘봉이 쥐어지리라는 것은 전혀 예상 못했던 일이다. 그는 부시 선거에 나타나지 않았었다. 뒤에서 뛴다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선거 운동에서 베이커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지난 5월23일, 부시가 외교 및 국방정책의 기라성 같은 공화당 노익장들을 대동하고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도 정작 베이커는 보이지 않았다. 헨리 키신저와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전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 전 안보 담당 보좌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에 콜린 파월까지 다 나온 자리에 유독 베이커만 없었던 것이다.

언론과 정계 인사들이 베이커의 거취를 입방아에 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92년 조지 부시의 재선 선거때 부시와 불화가 있었고, 당시 베이커가 클린턴을 맞아 고투하는 조지 부시의 대선에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공화당 내의 비난이 있었기에, 이번에 공화당 대선팀에서 소외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공화당의 사활이 걸린 법률 전쟁에 그것도 야전 사령관으로 재등장한 것이다. 선거가 끝나면 그는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 영국으로 사냥 여행을 떠날 참이었다. 그러나 선거 이튿날인 11월8일 아침, 개인 약속 때문에 휴스턴 공항으로 가던 차안에서 그는 부시 선거대책위원장 돈 에번스의 전화를 받았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플로리다로 갈 수 없겠느냐는 긴급 구원 요청이었다. 부시 후보와 통화를 한 뒤 나이 칠십의 이 노변호사는 휴스턴 공항에 도착해 플로리다 행 비행기를 탔다.

합동법률회사에서 일하는 베이커를 긴급 투입하는 아이디어는 공화당 부통령 후보인 딕 체이니의 머리에서 나왔다. 걸프전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체이니는 베이커와 함께 전쟁을 치렀다. 딕 체이니의 베이커 기용 아이디어를 돈 에번스 위원장이 받아들였고, 부시의 오랜 참모인 마거릿 텃윌러가 역시 부시에게 베이커를 천거했다. 법률 전쟁에서 민주당 야전사령관 워런 크리스토퍼 전 국무장관에 맞설 사람은 베이커가 적격이라는 판단이었다.

카우보이 부츠를 즐겨 신는 베이커가 공화당 팀을 맡게 된 것이 다소 놀라운 일이라면, 베벌리 힐스의 고급 맞춤양복을 고집하는 75세의 워런 크리스토퍼가 민주당 지휘봉을 잡게 된 것은 민주당 내 그의 위치로 보아 그럴 만한 선택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민주당 외교정책의 대부 격인 크리스토퍼는 1992년 클린턴의 정권 인수팀장이기도 했고, 이번 대선에서는 올해 초부터 일찌감치 고어의 러닝메이트로 코네티컷주 상원 의원인 조셉 리버만을 점찍어 놓고 있었던 사람이다. 지금은 로스앤젤레스에서 합동법률회사를 이끌고 있다. 크리스토퍼와 베이커는 서로를 존경한다고는 말하지만, 상대방을 친구라고 말한 적은 없다. 국무장관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거나 사람 입에 두고두고 오를 만한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이 두 70객 변호사들은 대선 연장전이 시작되자마자 플로리다로 날아가, 소속 당을 대표해 최전선에 모습을 나타냈다. 선거 결과야 어떻게 나오든, 50대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어른’들이 뒤에 버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노회한 미국 정치의 한 단면이다.





주간동아 2000.12.07 262호 (p6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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