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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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던 고어 ‘자살골’ 먹었다?

유권자 사로잡기 전략 부재, 부시에 끌려다녀…사상 초유 당선유보 피말리는 결과 주목

  • 입력2005-05-30 11: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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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대통령 선거 투표일 직전에 발간된 시사주간지 ‘타임’(11월6일자)의 표지에는 민주-공화당의 대통령후보인 앨 고어와 조지 W. 부시의 얼굴이 실렸다. 표지의 제목은 ‘미국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투표일(11월7일)로부터 닷새가 지난 11월12일 현재도 미국은 ‘선택의 결과’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다. 다만, 현재까지의 개표 결과로는 출구조사 결과와 달리 부시가 박빙의 리드를 지키고 있다. 당초 잘나가던 고어가 막판에 부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11월7일 오후 4시께 앨 고어 후보 진영의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플로리다주 출구조사 자료를 받아보고 놀랐다. “아니, 아직도 고어가 살아 있단 말인가.” 플로리다주 개표 초반 고어가 3% 포인트나 앞서 있을 때였다.

    민주당원인 그는 대선 초기엔 한번 해볼 만하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예비선거를 치르고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선거 운동이 진행될수록 고어가 지는 쪽으로 게임이 흘러간다는 것을 느꼈다. 민주당의 ‘자살골’ 행진이었다는 것이 그의 평이다. 고어가 고전한 가장 큰 이유다.

    귀공자가 외치는 선거구호 서민층에 안 먹혀

    아닌게아니라, 고어 진영은 우선 선거 전략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를 압도하지 못했다. 부시 후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세금 감면과 교육 정책은 내용 면에서 허구이거나 억지로 꿰어 맞춘 구석이 많아 너덜너덜하긴 했지만 부시에게는 일관성이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사회 보장과 조제약품 정책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교육과 감세 정책은 민주당이 오랫동안 공들여 닦아놓은 서민 정책이자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작품이었다. 부시가 가져가는 걸 빤히 보고 앉아서 빼앗긴 꼴이었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은 정책 제시에 강하다. 민주당이 못 따라간다. 대신 민주당은 메시지 전달에 강하다. 이래서 되겠느냐고 문제 제기하는 데는 민주당이 한 수 위지만, 정책을 놓고 유권자를 사로잡는 기술은 공화당이 월등하다. 고어의 민주당 참모들은 이번에도 이 한계를 넘지 못했다.

    고어는 선거운동 내내 근로자와 근로자 가족을 들먹였다. “내가 당신들을 위해 싸워주겠다”고 외치고 다녔다. 그래서 고어는 ‘파이터’(fighter)로 불렸다. 고어가 싸우자고 나서자 부시는 ‘싸우지 말고 뭉치자’(I’m not divider, I’m uniter!)고 맞섰다.

    고어의 이른바 이 계급 전략은 민주당이 옛날부터 써먹던 것이다. 가난한 자를 도와준다는 것이다. 민주당 출신인 케네디 대통령과 루스벨트 대통령도 이 전략을 활용했다. 고어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고어는 이 민주당 선배들에 비해 큰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케네디와 루스벨트는 상류사회 출신이었고, 귀족임을 자처했다. 이들은 사회적 의무가 있기 때문에 가난한 계층을 도우려 한다면서 중산층 이하 하층민에 접근했고, 이 전략이 먹혀들었다.

    고어는 달랐다. 워싱턴 시내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워싱턴을 체질화해온 전형적인 상류층 사람인데, 정작 선거운동에서는 자신과 근로자층을 동일시해버렸다. 겉모습이나 속모습이 전혀 싸움꾼처럼 생기지 않은 사람이 싸움꾼을 자처하고 그렇게 불리기 시작하자, 굵직한 선거 구호는 하나 건졌지만 정작 유권자들의 신뢰감은 그만큼 얻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싸움꾼은 악역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고어는 악역을 맡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귀공자였다.

    끝내 클린턴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것도 고어가 고전한 큰 이유 중 하나다. 선거 운동 내내 고어는 혹시라도 클린턴이 나대지나 않을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고어 선거 본부를 찾아온 클린턴이 건물 바깥에서 창문 안을 기웃거리고 있고, 건물 안에서는 고어가 “쉿! 그가 왔다”면서 측근에게 조용하라고 손가락 신호를 보내는 시사 만화가 있었다. 혹시라도 선거 운동에 해가 될까봐 클린턴의 등장을 두려워했던 고어였다. 이런 상황을 우스개로 그려낸 시사 만화는 선거 운동 기간 내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나왔고, 결국 고어는 클린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클린턴과의 차별화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고어는 클린턴을 써먹는 데에는 실패했다. 경제 호황, 흑자 재정이라는 선거 운동 최대의 호재를 발로 차버림으로써 공화당이 가장 겁먹었던 민주당 비장의 무기를 고어는 민주당 텃밭 주에서조차 한번 꺼내보지도 않고 묵힌 것이다. 경제 대신 고어가 빼든 칼은 ‘환경’이었으나, 부시가 줄기차게 외쳐댄 감세 정책에 맥을 놓고 말았다.

    클린턴 활용 방안을 놓고 민주당 캠프에서 참모들간에 의견이 갈렸던 것도 사실이다.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에 겁먹지 말라. 클린턴은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클린턴을 팔아야 한다’는 의견이 고개를 드는 듯했으나 끝내 이 전략은 채택되지 않았다.

    선거 중반 이후, 고어 진영은 근로자 가족에 적극적으로 다가서면서 파이터로서의 모습을 분명하게 부각시켰다. 그러나 고어가 이들 중산층에 다가갈수록 고어는 점점 더 클린턴을 닮아갔다. 8년 전 클린턴의 유세를 보는 것 같았다. 한 민주당 선거전략가는 ‘고어-리버만 선거가 아니라 클린턴-고어 3기 선거를 치르는 것 같다’고 했을 정도다. 이 점에서도 고어는 신선도가 떨어져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고어 진영의 희망대로 캠페인 열차에 동승하지 않았다. 클린턴과 행정부는 부시 진영에 뭇매를 맞아야 했다. 이는 선거의 기본이고 상식이다. 그러나 3차에 걸친 TV 토론에서 클린턴이라는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부시가 고작 클린턴을 공격한 것이라고는 백악관의 권위를 되찾아야 한다면서 클린턴의 사생활을 물고늘어진 것뿐이다. 이외에는 이렇다할 공격거리가 없었다. 결국 고어는 이런 사실을 역으로 이용하는데 실패했다.

    고어의 고전을 부추긴 사람 변수는 클린턴 외에 또 한 명이 있다. 녹색당의 랄프 네이더다. 클린턴과의 애증 관계가 끝까지 고어의 발목을 잡아둔 외적 요인이라면, 네이더는 고어가 신중하게 계산하지 않아 화를 자초한 내적 요인이다. 네이더가 민주당 좌파 표를 잠식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대했던 게 화근이었다.

    별 힘 안들이고 KO승을 거두리라 예상되었던 TV 토론에서도 고어는 근소한 차이로 판정승밖에 거두지 못했다. 세금 감면, 교육, 총기 규제, 낙태, 사회보장 등 각 현안 토론에서 고어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정확한 통계 수치, 정책 개선점, 공화당 선거 공약의 허구성 등을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미국의 역대 어느 대통령 못지않은 실력이었다.

    그러나 고어는 TV 토론과 유세에서 두 가지 약점을 노출시켰다. 유권자가 옆에 가서 앉을 만한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첫째다. 완벽에 가까운 대본이 신뢰감을 주기보다는 민주당 외 유권자의 접근을 차단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둘째, 고어는 부시를 상대로 전면전을 치르는 강인한 후보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1948년 해리 트루먼은 선거 유세에서 “소수의 이익만을 위해 투표하는 사람들을 이 기회에 아예 바보로 만들어 버리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 진짜 지도자들이 이 선거가 끝날 때까지 수풀 속에 숨어 나타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고 열변을 토하면서 총력전을 펼쳤다. 고어에게서는 이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고어가 게으름을 피운 구석은 없다. 있는 힘을 다했다. 그런 점에서 뭐니뭐니해도 고어 진영의 가장 큰 패인은 부시와 공화당의 선전이다. 부시와 공화당에 비해 고어 진영은 창의적이거나 창조적인 면에서 뒤졌다. 전당대회도 잘 치렀고 부통령 후보도 잘 골랐다는 평을 받았지만, 부시가 보여준 대중을 잡아끄는 유인력과 뚝심은 발휘하지 못했다. TV 토론에서 부시 후보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고 대통령직을 수행하기에 훨씬 더 적합한 사람이 자기라는 점을 충분히 부각시키지 못한 것이다.

    이에 반해 부시의 선거 운동은 분명히 고어를 앞서갔다. 부시로서는 처음 치러보는 전국 선거였다. 뉴햄프셔와 미시건의 예비선거에서 부시는 매케인 앞에 무릎을 꿇었으나 의연하게 대처했고, 민주당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표정 한번 바꾸지 않은 채 늘 자신만만하게 느물느물 웃어보였다. 뿐만 아니라 오리건 미네소타 펜실베이니아 등 민주당 주에도 과감히 뛰어들어 자신감을 과시했다. 부시의 이런 자신감은 고어가 러닝 메이트 리버만을 선거용으로 택한 것에 비해, 집권 후 활용할 인물로 딕 체이니를 골랐다는 점에서도 나타났다.

    터무니없는 일이긴 하지만 서툰 영어 때문에 연설할 때마다 지뢰밭을 지나가는 것처럼 조마조마하긴 했지만, 민주당을 안심시키고 긴장을 늦추게 만든 효과를 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부시의 말솜씨가 도마에 오를 때마다, 고어 캠프는 긴장을 풀면 안 된다고 선거 참모들을 다잡기보다는 좋은 ‘술안줏감’으로 삼았던 게 사실이다.

    고어는 클린턴 행정부의 업적을 이어받아 미래를 개척한다는 점을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실패했고, ‘여러분에게 돌아가야 할 사회보장 혜택을 공화당이 빼앗아가지 못하게 내가 싸워주겠다’는 식의 케케묵은 민주당 전법에만 매달렸다.

    공화당에 비해 민주당의 패인이 유독 눈에 뜨이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선거판의 순리에 따른다면 미 2000년 대통령 선거는 민주당에 유리한 구석이 더 많았다. 대통령 선거를 치른 올해는 미국 역사상 최전성기다. 세계는 한손에 들어와 있고, 나라 안은 평온하다. 말 그대로 태평천국이다. 세계대전을 치르는 때도 아니고, 경제 불황도 없다. 불황은커녕 고용은 안정되어 있고, 과열 경기를 우려하는 데도 인플레 없이 잠잠하다.

    클린턴의 사생활과 젊은 민주당의 도덕성이 구설수에 오르긴 했지만, 선거판을 좌지우지할 만한 국가적 현안은 아니었다. 게다가 부시 후보의 자질이 끊임없는 입방아감이었다. 고어 후보 지지를 선언한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 윌리엄 랩스베리는 투표일 나흘 전인 11월3일, ‘고어를 대통령으로’라는 제목의 기명 칼럼에 이렇게 썼다.

    ‘34년 간 신문 칼럼을 썼지만 단 한번도 특정 후보를 지지해본 적이 없다. 2년 전 공화당 사람들을 만났을 때 조지 W. 부시 텍사스 주지사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서는 진주 같은 존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앨 고어를 지지한다. 부시에 비해 고어가 뛰어난 후보여서가 아니다. 부시는 대통령이 되기에는 충분한 훈련이 안 되어 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대통령이 되려면 더 스마트해야 한다.’

    부시의 자질 문제는 두고두고 민주당의 공격거리가 될 것이 틀림없다. 민주당의 한 선거전략가는 이런 상황을 다 감안하더라도 고어와 부시의 차이점은 처음부터 명백했다고 말한다. “고어와 부시의 차이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차이였고, 민주당과 공화당의 차이는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의 차이였다”는 것이다.

    앨 고어는 똑똑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상원의원인 아버지한테 대통령 수업을 받았고, 8년 간 백악관에서 국사를 논했던 사람이다. 앨 고어가 트루먼의 성공 사례를 모를 리 없고, 부시의 약점을 모를 리는 더욱 없다. 다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고어는 부시에게 지악스럽게 달려들지 않았다. 1996년 공화당의 보브 돌이 클린턴을 무자비하게 물고늘어지지 않았듯이, 고어도 정치 싸움에 식상한 유권자의 마음을 읽고 점잖은 경쟁을 했는지도 모른다. 부시 정도의 자질이라면 선거를 싱겁게 끝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느긋하게 대처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녹색당의 랄프 네이더 후보는 ABC 방송에 나와 고어를 가리켜 이런 말을 했다.

    “만약 고어가 소름끼칠 정도로 형편없고 거드름만 피우는 텍사스 주지사를 꺾지 못한다면, 누가 고어를 좋은 사람으로 봐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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