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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의 미식세계

향기로운 가을 만드는 꽃차

향기로운 가을 만드는 꽃차

여러 가지 꽃찻잎. [사진 제공 · 김민경]

여러 가지 꽃찻잎. [사진 제공 · 김민경]

‘인생은 고달프다. 삭막하다. 앞이 어둡다. 자기가 하는 일들이 옳은 것인가. 무엇부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언젠가는 맞이할 죽음 앞에 회한의 눈물은 흘리지 않을 것인가. 우리들은 이런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우록(友鹿) 김봉호(1924~2003) 선생이 쓴 ‘초의선집’의 머리글이다. 이 책은 1977년, 필자가 태어난 해에 발간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삶은 갈팡질팡 쉽지 않은 것 같다. 김 선생은 술과 차를 앞에 두고 고독과 성찰을 즐겼다고 한다. 학문과 인품을 갖춘 사람과의 차담을 마다할 이는 없지 않을까. 

‘차’ 하면 보통 잎차를 먼저 떠올린다. 수년째 닥치는 대로 잎차를 마시고 있는 나는 사실 와인보다 차가 더 어렵다. 좋은 것을 얻어먹은 적이 많아 입맛은 까다로운데, 스스로 차를 고르고 잘 우려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커피와 번갈아 마실 일상적이고 편안한 차를 찾던 중 발견한 것이 바로 꽃차다.


정성 담아 덖으며 완성하는 꽃차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관심을 두니 생각보다 다양한 꽃차를 발견했다. 맨드라미, 복숭아꽃, 매화, 목련, 국화, 해당화, 홍화, 메리골드, 당아욱꽃, 구절초꽃, 쑥꽃, 찔레꽃, 아카시아, 생강나무꽃, 뚱딴지꽃…. 내가 외우는 꽃 이름보다 차 종류가 더 많은 것 같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꽃차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식용이 가능하다고 인정한 꽃으로만 만든다. 차를 위해 꽃을 재배하기도 하고, 재배지 주변의 야생화를 채취해 차로 만들기도 한다. 꽃차도 식품인 만큼 깨끗한 환경이 중요하다. 수년 전 잎차에서 농약 성분이 검출된 적이 있다. 꽃차라고 예외일까 싶다. 꽃차를 사려거든 꽃을 키우고 거둔 사람과 재배환경, 가공 공정을 잘 알아보는 게 좋다. 



차 맛은 만드는 과정에 따라 달라진다. 부모 뒤를 이어 유기농으로 차를 재배하고 직접 가공까지 하는 ‘꽃차 하늘바라기’의 권상준 씨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봤다. 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덖는 일이다. ‘물기가 조금 있는 재료에 물을 더하지 않고 타지 않게 볶아서 익히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차를 만들 때 기준은 조금 달라진다. 전통 방식에 따라 무쇠가마솥에 꽃을 넣어 열을 가한다. 무쇠가마솥을 통해 전달되는 뭉근하면서도 강렬한 열기가 꽃을 말리고, 맛과 향이 꽃 안에 잘 보존되도록 익혀준다. ‘꽃차 하늘바라기’의 모든 꽃차는 이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꽃마다 덖는 온도와 시간이 다른데, 보통 섭씨 100~250도에서 다섯 번 덖는다. 이토록 뜨거운 온도에서 보드라운 꽃이 타 사그라지지 않는 것이 참 신기하다. 

덖기 외에도 꽃차를 만드는 방법은 서너 가지가 더 있다. 먼저 자연 건조로, 채취한 꽃을 가정에서 소량씩 먹고자 할 때 적합하다. 또한 프라이팬에 한지를 깔아 꽃을 말리고 익히거나 건조기를 사용해 꽃을 말리는 방법도 있다.


특별한 꽃이 선사하는 잊지 못할 맛

[사진 제공 · 김민경]

[사진 제공 · 김민경]

꽃차에는 세 가지 맛이 있다. 눈으로 맛보는 차의 색, 코로 들이마시는 차의 향, 입으로 즐기는 차의 맛이다. 만드는 과정에서 균형을 잃은 꽃차는 이 세 가지 맛을 갖지 못한다. 특히 색과 향만 있고 맛을 갖지 못한 차가 많다. 싱겁고 밍밍하거나, 잡맛이 많이 나거나, 뒷맛이 텁텁한 경우다. 좋은 꽃차는 찬물에 담가 오랫동안 우려내도 그 매력이 여전하다. 또한 두세 번 우려내도 은은한 맛을 그대로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 꽃차는 카페인 성분이 없어 누구든 마실 수 있고 상시로 먹어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모든 식물에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독한 성분이 들어 있지만, 꽃차로 가공하는 과정에서 중화돼 오히려 몸에 좋은 약성이 남게 된다. 

꽃차 중 마음이 동한 세 가지만 꼽아본다. 맨 먼저 당아욱꽃차다. 이름도 낯선 이 꽃은 제비꽃처럼 보랏빛이 진하고 곱다. 바닷가에서 자라는데 ‘금규’라고도 부른다. 꽃에 따뜻한 물을 떨어뜨리면 화사한 향이 금세 퍼지고, 꽃잎이 점점 하얘지면서 찻물은 푸르러진다. 향이 깃든 감미로운 맛이다. 푸른 차에 레몬이나 자몽을 한 조각 넣으면 핑크빛으로 변한다. 당아욱꽃차를 두 번째 우려내면 투명한 연두색이 나면서 또 다른 맛을 선사한다. 

그다음은 매화차다. 매실 먹기도 아까운 참에 매화, 그것도 봉오리를 채취해 차를 만든다니 놀랍다. 매화차는 맛보기 힘들고 귀하며 작은 알에서 피어나는 향이 또렷하고 오래간다. 맛은 담담하고 깨끗하다. 

마지막은 홍화차다. 홍화차는 앙증맞고 풍성한 꽃잎과 탐스러운 알맹이가 그대로 살아 있다. 큼직한 찻잔에 한 알 담가 우려내면 살구색이 은은하게 퍼진다. 홍화씨 기름이 유명한데, 차에서도 윤택하고 기름진 맛이 고소하게 난다. 홍화는 쉽게 풀어지지 않기 때문에 찻잔에 귀여운 꽃을 내내 담가두고 보면서 마실 수 있다. 


향기로운 가을 만드는 꽃차
물처럼 두고 수시로 마시고 싶다면 목련, 국화, 감국차가 맛과 향이 부드러워 적합하다. 계절이 바뀌는 요즘에는 구절초, 목련, 생강나무꽃, 뚱딴지꽃차를 따뜻하게 마시면 된다. 손님을 초대한 자리에는 당아욱꽃, 매화, 홍화, 진달래, 복숭아꽃, 아카시아, 맨드라미, 해당화처럼 조금 특별한 꽃차를 준비해 이야기꽃을 피워보면 좋겠다.


꽃이 주는 색, 향, 맛의 아름다움

고운 빛깔의 꽃차들. [사진 제공 · 김민경]

고운 빛깔의 꽃차들. [사진 제공 · 김민경]

조선 후기 고승이자 차(茶)에 일가견이 있던 초의(草衣)선사가 지은 ‘동다송(東茶頌)’에는 ‘차에는 아홉 가지 어려움과 네 가지 향이 있는데 심오하고 미묘하게 쓰인다’는 글귀가 있다. 아홉 가지 어려움은 만드는 것, 분별하는 것, 담는 것, 불을 지피는 것, 물, 굽는 것, 마무리 짓는 것, 달이는 것, 마시는 것이다. 네 가지 향은 비 오기 전의 신이함 같은 참향, 불기가 고르게 닿은 난향, 딱 맞춤하게 익은 청향, 한결같은 순향이라고 했다. 아홉 가지 가운데 달이고 마시는 것 외에 일곱 가지는 덜어낼 수 있다. 네 가지 향은 자신의 몫이다. 그나마 꽃차는 잎차에 비해 어려움이 적은 편이다. 좋은 차와 물, 같이 마실 사람만 있으면 조금 어설프게 우려내도 우아하게 세 가지의 아름다움(색, 향, 맛)을 충분히 맛볼 수 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꽃차는 생산자를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서울 종로구 ‘상생상회’에 가면 전국에서 만들어진 질 좋은 꽃차를 두루 만날 수 있다.


‘꽃차 하늘바라기’ 권상준 씨
[사진 제공 · 꽃차 하늘바라기]

[사진 제공 · 꽃차 하늘바라기]

꽃차를 맛있게 우려내는 방법은. 

“좋은 꽃차에는 알맞은 물이 필수다. 생수를 사용하면 차의 맛과 향이 훨씬 생생해진다. 생수가 없다면 수돗물이나 정수한 물을 가만히 뒀다 웃물만 떠서 차를 우려낸다.” 

꽃차를 더 다양하게 즐기고 싶다면. 

“꽃차도 블렌딩이 가능하다. 특히 매화차가 유용하다. 당아욱꽃차와 매화차를 섞으면 굉장히 독특하고 매력적인 차가 완성된다. 부드럽고 순한 목련차와 매화차를 섞어도 좋고, 녹차와 매화차도 아주 잘 어울린다. 장밋과의 찔레꽃과 은은한 진달래를 섞어 차를 우려내면 맛이 한결 깊어진다. 차를 섞을 때는 일대일 기준으로 맛을 보고, 취향에 따라 비율을 달리한다. 꽃차는 찌꺼기도 곱다. 백설기에 넣거나 음식을 장식할 때 쓰는 것도 아이디어다.” 

꽃차 하늘바라기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대평안길 76-1






주간동아 2019.09.27 1207호(창간기념호③) (p76~78)

  •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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