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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한의 세상관심법

일본의 역사 왜곡, 파국의 시작 아니어야

일본에 대한 한국민의 분노 자극…일본의 변화, 한국의 지혜 필요한 때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학박사 psysohn@chol.com

일본의 역사 왜곡, 파국의 시작 아니어야

[동아DB]

[동아DB]

일본의 역사 왜곡이 점차 노골화되고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3월 26일 발표한 새로운 초등학교 검정교과서에는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지만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어 일본 정부가 계속 항의하는 중’이라고 기술돼 있다. 참으로 우려스럽고 개탄스럽다. 불과 얼마 전에는 일본 초계기의 한국 군함 위협 비행 사건도 있었다. 또 최근 한국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처럼 악화일로의 한일관계를 지켜보며 필자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염려가 든다.


선입견과 적개심은 심각한 에너지 소모

첫째, 선입견의 극대화다. 

선입견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 이미 마음속에 굳게 간직한 관념이나 태도를 가리킨다. 일본의 역사 왜곡은 예전부터 있어왔고, 최근 점차 심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이 일본 측에 고운 시선을 보내기는 매우 어렵다. 일본은 참으로 나쁜 나라라고, 탐욕스럽고 잔인하며 반성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의 극치인 나라라고 여길 것이다. 그나마 갖고 있던 일본에 대한 긍정적 선입견, 예컨대 일본인은 매우 친절하고 예의 바르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도 점차 묻힐 테다. 일본 국민 개개인이 친절한 언행을 보인다 한들, 그것을 가식적 행동이라고 해석할 것이다. 점차 일본인에게 ‘본심은 잔혹한데 겉으로만 웃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겹쳐지면 혐오 감정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더 무서운 것은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선입견이다. 특히 새로운 교과서로 공부한 초등학생들이 자라면서 ‘한국인은 왜 일본 영토인 독도를 불법 점유하는가’라는 의문과 불만을 키워간다면 한국을 ‘폭력적인 도적’으로 여길 것이다. 과거 35년간 한국을 지배하며 착취했던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당시 제국주의 국제질서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뿐이다. 일본뿐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도 식민지배를 했으므로. 오히려 아시아에서는 일본만이 유일하게 세계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제국 반열에 들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 이는 ‘아시아의 주인(또는 리더)은 일본이고, 한국은 그저 어떻게든 일본을 이겨보려고 하는 나라’라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본은 1등 국가, 한국은 2등 국가라는 선입견이 더욱 공고화될까 심히 우려된다. 이런 선입견의 결과는 불신과 오해다.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자신도 고통받는다. 

둘째, 적개심의 고취다. 



내 것을 남이 빼앗으려 할 때 당신의 심정은 어떤가.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 당연히 내 것이고 상대도 잘 아는데 도대체 왜 무모한 언행을 보이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내 불안해진다. 내가 저이한테 잘못한 것이 있나, 저 사람 말대로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나, 제3자가 저 사람 말을 믿으면 어떻게 하지 같은 걱정이 생겨난다. 이것은 곧장 분노와 적개심으로 이어진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이처럼 걱정하는 것이 무척 괘씸하고 억울하다. 다시는 그런 주장을 못 하도록 따끔하게 경고해야겠다고 맘먹는다. 

그런데 실제 그렇게 말했을 때 상대방의 반응이 가관이다.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말도 안 되는 근거들을 들먹이며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소문을 퍼뜨려 사안을 논쟁거리로 만듦으로써 논점을 흐리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은 천천히 객관적으로 따져보자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다.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 깨어날라

독도의 날(10월 25일)을 앞둔 지난해 10월 22일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독도를 방문해 둘러보고 있다(왼쪽). 같은 해 11월 일본 도쿄 도심에서 열린 반한 집회에서 우익 세력들이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와 일장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동아DB]

독도의 날(10월 25일)을 앞둔 지난해 10월 22일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독도를 방문해 둘러보고 있다(왼쪽). 같은 해 11월 일본 도쿄 도심에서 열린 반한 집회에서 우익 세력들이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와 일장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동아DB]

급기야 상대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하늘로 치솟는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팍 후려치고 싶다. 기회가 되면 그를 벌하리라…. 이러한 적개심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은 대단한 에너지 소모를 가져온다. 당장 결판내고 혼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 없음을 깨달을 때는 무력감과 절망도 밀려온다. 이러한 감정 역시 심리적 에너지를 갉아먹는다. 마음이 피곤하고 행복하지 않다.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과 으르렁대며 대립하는 사람 가운데 누구의 정신건강이 더 안정돼 있겠는가. 일본과 한국은 서로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셋째, 인지의 왜곡이다. 

내 생각도 점차 편향돼간다. 더 나아가 인지의 왜곡이 생겨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일본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의심한다. 우리는 선(善)이요, 그들은 악(惡)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싹튼다. 일본이 모든 면에서 나쁜 것은 아니다. 일본인 중에는 선한 사람이 더 많을 테다. 하지만 이러한 합리적 생각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진다. 

반공(反共)이 절대적 가치이던 시절, 어린이들은 북한 사람을 늑대로 그렸다. 어쩌면 한국 어린이들이 일본인을 짐승이나 괴수로 그릴 날이 올 수도 있다. 일본 어린이들은 한국인을 도둑이나 해적으로 묘사하는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양국의 대립관계가 극한으로 치달으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넷째, 정치적 악용이다. 

선입견 극대화, 적개심 고취, 인지 왜곡이 자연스러운 사회적 흐름으로 나타나면서 그 결과로 대세적인 여론이 형성된다면? 이를 이용하려는 정치세력이 생기고, 이들은 여론을 선동해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 할 것이다. 경제를 살리자, 사람답게 살자,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정치 구호는 한물가고, ‘일본을 혼내주자’는 식의 새로운 정치 구호가 등장할 수도 있다. 반일(反日)이 새로운 대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끼리만 일본에 대적하기엔 힘에 부치므로 북한과 연합해 일본을 무찌르자는 논리가 제시될 수도 있다. 남북한 인구와 군사력을 합치면 이것이 가능하다는 정치인이 등장하고, 어서 빨리 통일해 십수 년 후 일본을 제압하자는 식의 목표를 제시하는 정치인이 득세할 수도 있다. 

이러한 염려가 매우 황당한 얘기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일본의 역사 왜곡이 한국인의 자존심을 심하게 훼손하므로 가능할 수도 있다고 본다. 우리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일본에게 근대화에 뒤지면서 뼈아픈 식민지배를 받았다. 그것에 대한 복수의 마음가짐은 한국인에게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한일관계 악화는 언제든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일본의 반성과 변화, 그리고 한국의 지혜로운 대처가 필요하다.






주간동아 2019.03.29 1182호 (p60~61)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학박사 psysohn@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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