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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자의 ‘오타쿠글라스’

살다 살다 이제는 ‘죽음’을 덕질하는구나

뮤지컬 ‘엘리자벳’

  •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살다 살다 이제는 ‘죽음’을 덕질하는구나

구기자의 ‘오타쿠글라스’
※관객이 공연장에서 작품과 배우를 자세히 보려고 ‘오페라글라스’를 쓰는 것처럼 공연 속 티끌만 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고자 ‘오타쿠글라스’를 씁니다.


[사진 제공 · EMK뮤지컬컴퍼니]

[사진 제공 · EMK뮤지컬컴퍼니]

아이러니했다. 기자가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를 찾은 2018년 11월 30일 오후 7시 30분. 카오스홀에서는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가 주최하는 우울과 자살에 대한 ‘아임(낫)파인 토크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다. 맞은편 인터파크홀에서는 죽음과 사랑에 빠진 황후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 ‘엘리자벳’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심지어 이 작품 넘버 중에는 ‘질문은 끝이 났고 기회들은 남의 차지, 출구 없는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우리들, 무너져가는 이 세상 우린 자살을 꿈꾸지(‘모든 질문은 던져졌다’ 중)’ 같은 가사도 있다. 상반된 주제의 행사가 같은 시간대에 열린다는 게 참으로 묘하지 않은가. 마치 황후 엘리자벳의 결혼식처럼. 

서구권에서는 보통 결혼식은 해가 떠 있을 때 진행되고, 해가 질 무렵에는 장례식이 열린다. ‘엘리자벳’의 주인공은 저녁 6시 30분 아우구스틴 교회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결혼식을 올린다. 사랑과 죽음이 바통 터치를 하는 시간에 결혼이라니. 그리고 어릴 때부터 엘리자벳을 쫓아다닌 ‘죽음’은 결코 초대받지 않았을 이 결혼식에도 어김없이 ‘죽음의 천사’들을 이끌고 나타난다. 정말로 엘리자벳이 죽음을 궁 안으로 불러들인 걸까.


‘죽음’이 이런 모습이라면

[사진 제공 · EMK뮤지컬컴퍼니]

[사진 제공 · EMK뮤지컬컴퍼니]

2012년 국내에서 초연한 ‘엘리자벳’은 실존 인물인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엘리자벳)의 인생에 상상력을 가미한 작품이다. 실제 역사에서 그는 요제프 1세와 결혼해 황후가 된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이중 국가 체제를 이루자 오스트리아 황후이자 헝가리 왕비가 된다. 뮤지컬 ‘모차르트!’와 ‘레베카’ 등을 만든 독일 극작가 미하엘 쿤체와 헝가리 출신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의 작품으로, 1992년 오스트리아에서 처음 관객을 만났다. 국내에서는 올해가 4번째 공연이다. 


[사진 제공 · EMK뮤지컬컴퍼니]

[사진 제공 · EMK뮤지컬컴퍼니]

엘리자벳은 ‘나는 나만의 것’과 같이 억압된 감정을 표출하는, 가창력이 요구되는 넘버를 소화해야 한다. 또 자유분방한 소녀부터 중년 황후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을 표현해야 하기에 캐스팅이 쉽지 않다. 김선영, 옥주현, 김소현, 조정은, 신영숙 등 실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여배우들이 엘리자벳 역을 거쳐 갔다. 올 시즌에는 옥주현과 김소현, 신영숙이 맡아 각자의 색채로 비운의 황후를 표현한다. 




[사진 제공 · EMK뮤지컬컴퍼니]

[사진 제공 · EMK뮤지컬컴퍼니]

그를 살해한 범인이자 이 작품의 화자요, 작품의 문을 여닫는 인물인 ‘루케니’ 역은 이지훈과 강홍석, 박강현이 맡았다. 엘리자벳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죽음’ 역은 김준수, 박형식, 정택운이 맡았다. 과거 시즌과 달리 ‘죽음’ 역을 맡은 3명이 모두 아이돌 출신이다. 작품은 화려한 합스부르크 제국을 재현하고자 의상 370여 벌을 제작했고, 현대적 영상과 조명을 활용해 황실의 결혼식과 무도회 등을 웅장하게 연출했다. 

그나저나 초연과 재연 때 ‘죽음’ 역을 맡으며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과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를 관객으로 가득 채운 JYJ 출신의 김준수를 제외하면 ZE:A(제국의아이들) 출신 박형식과 빅스 출신 정택운은 이번이 첫 번째 ‘죽음’ 역할이다. 이 캐스팅 때문에 ‘뮤지컬 배우 캐스팅’만 보려는 팬들 사이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며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김준수의 ‘죽음’이 매진 행렬을 이어가는 데는 3명 가운데 가장 베테랑이고, 그가 두 차례의 공연을 통해 완성한 ‘죽음’을 팬들이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진가를 확인하고자 12월 21일 다시 블루스퀘어를 찾았다.


‘아이돌’에서 ‘믿보배’ 되기까지

국내에 들어오기 전 ‘토트’(Der Tod·독일어로 죽음을 뜻함)로 알려졌던 ‘죽음’이라는 캐릭터는 저승사자라고 하기엔 서열이 높고, 하데스나 염라대왕이라고 하기엔 너무 감정적인 데다 충동적이다. 죽음 자체를 의인화했다지만 배경지식 없이 보면 엘리자벳에게 스마트폰 메신저로 새벽에 ‘…자니?’라고 메시지를 보낼 것 같은 ‘구남친’ 느낌도 있다. 처음 이 작품을 본다면 ‘죽음’이라는 판타지적 캐릭터를 루시퍼와 같은 ‘악마’로 생각하는 게 몰입에 도움이 될 것이다. 

김준수는 2018년 11월 의경 복무를 마치고 복귀작으로 이 작품을 택했다. 이제 그는 아이돌이라는 후광을 버려도 대극장을 관객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뮤지컬 배우로 성장했다. 뮤지컬 팬들은 때로는 맹목적일 정도로 열광하지만, 때로는 비정할 정도로 냉혹해 아이돌 출신이 이렇게 오랫동안 사랑받으려면 스타성만으로는 어렵다. 결국 실력이 답이다. 

2010년 뮤지컬 ‘모차르트!’의 모차르트 역으로 처음 뮤지컬 무대에 섰을 때만 해도 객석에는 뮤지컬 배우 김준수보다 동방신기와 JYJ 출신 아이돌 시아준수를 보려는 관객이 많았다. ‘엘리자벳’의 작곡가이기도 한 르베이는 김준수와 ‘모차르트!’에서 인연을 맺었다. 르베이는 “그의 삶이 모차르트만큼 드라마틱하고, 볼프강 역시 당대 팝스타이자 아이돌이라는 콘셉트라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아이돌그룹으로 활동할 때부터 ‘덕후 몰이’를 하며 코어 팬이 많기로 유명한 멤버였다. 솔직히 당시 공연이 완벽했다고는 할 수 없다. 노래는 아이돌 때부터 잘했다. 연기도 망가지는 걸 꺼려하지 않고 안면근육과 몸을 모두 써가며 열심히 했다. 하지만 명료하지 않은 발음과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진입 장벽이라고 느낀 관객이 많았다. 배우보다 퍼포머에 가깝던 시절이다. 

하지만 이제는 김준수가 무대에서 절규하고 화를 내도 관객은 대사를 정확히 들을 수 있다. 이후 그는 ‘드라큘라’ ‘데스노트’ ‘도리안 그레이’ 등에 출연하고 작품을 흥행시키며 ‘믿고 보는 배우’ 행렬에 이름을 올렸다. ‘연예인’ 중에서는 조승우와 함께 일단 캐스팅되면 안심하고 볼 수 있는 있는 배우다. 

특유의 발성 때문일까, 앳된 이미지 때문일까. 그는 유독 초현실적인 인물이나 사람이 아닌 존재를 연기하는 경우가 잦았다. 피를 마시고 젊어진 드라큘라나 세월이 지나도 늙지 않는 도리안 그레이,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천재 탐정 L 등이 대표적이다. 지금도 몇몇 작품은 그가 아니면 이 정도로 흥행했을까 싶다. 

오히려 ‘천국의 눈물’이나 ‘디셈버 : 끝나지 않은 노래’에 나오는 평범한 인물을 연기했을 때 흥행 면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본 투 비 아이돌’인 그의 이미지와 특유의 음색이 판타지적인 캐릭터와 더 찰떡궁합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드라이아이스 연기와 신비로운 조명이 어우러졌을 때 비로소 그의 존재감이 드러난다.


김준수만의 ‘죽음’을 완성하다

[사진 제공 · EMK뮤지컬컴퍼니]

[사진 제공 · EMK뮤지컬컴퍼니]

기자는 ‘엘리자벳’이 국내에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일명 ‘우베 토트’와 ‘마테 토트’에 푹 빠져 있었다. 독일 뮤지컬 배우 우베 크뤼거와 헝가리 뮤지컬 배우 마테 카마라스의 ‘토트(죽음)’ 캐릭터를 지칭하는 말이다. 체형도, 외모도, 음색도 다른 두 배우는 같은 캐릭터를 아주 다르게 소화한다. 국내에서도 ‘죽음’ 역에는 다른 캐릭터에 비해 개성이 좀 더 가미됐다. 기자는 ‘엘리자벳’ 초연 OST 앨범에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긴 머리 가발을 쓴 송창의의 죽음’도 실제 공연장에서 봤다(분장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너무 좋지 않아 첫 회 이후 가발은 벗었다). 

공연에서 정택운과 박형식의 ‘죽음’은 은발에 가까운 머리로 분장한 반면, 김준수의 ‘죽음’은 백금발을 하고 나온다. 지난 시즌 김준수는 검은 머리에 짙은 립스틱과 스모키한 눈 화장으로 몽환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기도 했다. ‘죽음’ 역의 변주를 즐기는 것은 이 작품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 가운데 하나다. 

팬들은 박효신이 연기하는 ‘죽음’은 ‘쿄토트’, 김준수가 연기하는 ‘죽음’은 그의 예명(시아)을 따 ‘샤토트’라고 부른다. 2012년 초연 때 ‘샤토트’가 함께 ‘죽음’으로 캐스팅된 류정한, 송창의와는 다른 소악마적인 매력으로 엘리자벳과 루돌프 모자를 유혹했다면, 2018년 ‘샤토트’는 좀 더 선 굵고 남성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연기 디테일도 풍부해졌다. 결혼식장에서 종을 울리며 미친 듯이 웃어대는 장면이나 그르렁대며 엘리자벳의 곁을 맴돌고 때로는 그를 겁박하는 듯한 ‘샤토트’에게서 이전보다 강한 야성미가 느껴진다. 

제목은 ‘엘리자벳’이지만 등장 시간 대비 강렬한 임팩트는 ‘죽음’ 역이 다 가져가고, 엘리자벳 못지않게 강렬한 넘버는 루케니가 소화한다. 황실을 비판하는 무정부주의자인 루케니가 황후가 우유 목욕을 하느라 굶어 죽어가는 시민에게는 우유를 팔지 않는다며 부르는 ‘밀크’나 엘리자벳과 관련된 기념품을 늘어놓고 엘리자벳 역시 싸구려 기념품에 불과하다며 부르는 ‘키치’ 등이 대표 곡이다. 쿤체와 르베이 콤비는 이 작품을 만들면서 클래식한 과거를 상징하는 궁중, 현재를 상징하는 루케니, 언제나 존재하는 죽음의 차이를 보여주고자 했다. 덕분에 관객은 오케스트라(궁중 음악)부터 팝(루케니), 신비로운 음악까지 다양한 소리를 만날 수 있다. 

다만 이번 시즌에는 팬들이 “제발 빼주세요”라고 외치던 곡인 ‘사랑과 죽음의 론도’가 다시 돌아왔다. 이는 일본과 헝가리판 ‘엘리자벳’에 추가된 곡으로 엘리자벳과 ‘죽음’의 로맨스를 부각하고자 만들어졌다. 국내 초연 때는 없었으나 2013년 삽입됐다 2015년 공연에서 빠졌고 이번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엘리자벳에 대한 ‘죽음’의 집착만큼이나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곡이다. 지난 공연을 본 관객이 이번 공연에서 ‘죽음’이 전 애인에게 진한 미련을 갖는다고 느꼈다면 이 넘버 때문일 것이다. 초현실적 존재가 ‘너의 차가운 생명을 얻는 대신 네 따스한 사랑을 더 느끼고 싶어’라며 엘리자벳에게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한편 죽음의 천사들과 함께 춤추며 부르는 ‘마지막 춤’이라는 넘버는 아이돌 출신에게 딱 맞는 곡이다. 자신이 아닌 황제를 택한 엘리자벳에게 화가 난 ‘죽음’은 “마지막 춤은 결국 (황제가 아닌) 나와 추게 될 것”이라며 분노의 ‘폭풍댄스’를 선보인다.


논레플리카 방식의 장점

영화와 코믹스에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DC 확장 유니버스가 있다면 뮤지컬계에는 엘리자벳 유니버스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엘리자벳’에서 오스트리아 황실의 이야기를 만났다면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에서는 ‘엘리자벳’에서 짧고 굵게 등장한 황태자 루돌프의 일대기가 등장한다. 뮤지컬 ‘프란츠 요제프’만 나오면 일가족이 뮤지컬 주인공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한 작품에 나온 캐릭터가 다른 작품에도 나오는 사례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팬텀’ ‘러브 네버 다이즈’ 등이 있다. 

다년간에 걸쳐 흥행성을 검증받은 ‘엘리자벳’이다 보니 이제는 슬그머니 ‘여성 죽음’도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기대를 던져본다. 실제로 19세기 미술 작품에서 ‘죽음’은 검은 옷차림에 검은 날개를 단 여성 모습이지 않았던가. 일본 극단에서는 여배우가 연기하기도 했고 말이다. 국내 관객 취향에 맞게 작품을 다듬어 내놓는 논레플리카(재창작) 방식의 뮤지컬 제작은 EMK뮤지컬컴퍼니의 전매특허이기도 하니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도 아니다. 뮤지컬 덕후들이 ‘엘리자벳’ 그 자체인 옥주현이 카리스마 넘치게 연기하는 ‘죽음’이나 김준수가 연기하는 똘끼 넘치는 ‘루케니’ 등을 보고 싶어 하는 걸 뭐라고 할 수 있을까. 희귀하잖아!(feat. 루케니)






주간동아 2018.12.28 1170호 (p68~72)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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