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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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합중국 대통령 되던 날

MARS로 상징되는 미국 정치의 돌변…“트럼프 현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 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5-12-11 16:4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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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널드 트럼프 미합중국 대통령 되던 날

    미국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 오벌오피스. 동아일보DB

    #1 2015년 12월 31일 워싱턴 링컨 기념관. 미국 민주주의의 상징이라 일컫는 이 건축물 앞 연못이 피로 물들었다. 연말을 맞아 전국에서 모인 가족 단위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무차별 총기 테러. 백악관에서 직선거리 1.5km, 미 연방수사국(FBI)과 국방부 청사에서 2km 남짓, 말 그대로 미국의 심장 한복판이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아랍계 2세로 밝혀진 테러 주범은 범행 직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시리아를 위해(For Syria)’라는 짧은 문장을 남겼다.
    다른 어느 도시보다 치안 상태가 튼튼하다는 연방수도에서 벌어진 사건에 미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민주·공화 가릴 것 없이 대통령선거 경선에 나선 후보들은 저마다 강력한 응징을 선언했지만, 가장 큰 수혜자는 극단적 처방을 반복적으로 강조해온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였다. 사건 한 달여 만에 치른 2월 1일 아이오와 당원대회와 2월 9일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압도적 1위를 기록한 그의 질주를 막을 이는 없었다. 특히 놀라웠던 것은 남부 주요 지역에서 이어진 백인 지지자들의 폭발적 지지. 연전연승을 기록한 트럼프는 3월 1일 ‘슈퍼 화요일(Super Tuesday)’에 대선후보 자격을 거머쥐는 데 성공한다. 유권자 절반 이상이 ‘대재앙(Fiasco)’이라 부르는 후보의 출현이었다.

    솔직히 성(姓)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피터라는 이름만 기억할 뿐이다. 애리조나 주 피닉스 토박이라는 그는 친구들이 자신을 ‘사람 좋은 피트(Pitt the Good Man)’라고 부른다고 했다. 오랫동안 인상에 남은 시원한 대머리와 부리부리한 두 눈. 20여 년간 한 대형은행 소비자만족센터에서 일한 피터는, 뉴욕 본사에서 콜센터를 인도로 아웃소싱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었다. 실직 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농사일은 영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기자가 그를 만났던 것은 2008년, 그가 심기일전을 위해 퇴직연금 일부를 털어 떠나온 뉴질랜드 여행길에서였다. 풍광 좋은 퀸스타운 호수 앞 벤치에 나란히 앉은 피터는 부시 행정부가 한창 박차를 가하고 있던 이라크전쟁을 비난하느라 목소리를 높였다. 머나먼 동아시아에서 날아온 여행객 역시 부시 대통령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그는 “My friend!”를 외치며 새삼 악수를 청했다. 예의 미국인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는 덤이었다.
    영화 ‘슈퍼맨’에 나오는 클라크 켄트의 양아버지.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많이 배우진 못했지만 성실히 일했으며,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는 것을 신이 주신 사명이라 믿었다. 그러나 시절이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월스트리트 자본가들의 꼭두각시가 된 공화당 정부는 자신 같은 중간계급을 챙길 생각이 없었다. 민주당은 단 한 번도 자기 손으로 자신의 밥을 벌어본 적 없는 게으른 유색인종들만 신경 쓸 뿐이었다.
    그가 이라크전쟁에 반대한 것은 평화를 사랑해서거나 병사들의 희생이 안타까워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뼈 빠지게 번 돈으로 낸 세금이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휩쓸려 들어가는 걸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허울 좋은 ‘세계 보안관’ 노릇 탓에 기울어가는 나라 형편이 그의 가장 큰 울화였다. 쓸 만한 일자리는 모두 해외로 빼돌리는 기업인들이나, 외국 로비스트 장단에 놀아나는 정치인들이나 분노의 대상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선하고 성실한 다수가 대접받지 못하는 나라, 그것이 ‘사람 좋은 피트’가 조국에 대해 가진 불만이었다.
    MARS(Middle American Radicals). 2015년 미국 대선 레이스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른바 ‘트럼프 현상’을 분석하면서 현지 정치 분석가들이 주목하는 키워드다. 교육 수준이 높지 않은 중산층 백인 남성. 공화당과 민주당, 보수와 진보 어느 잣대로도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유권자 그룹을 가리킨다. 전체 유권자의 20% 남짓, 공화당 지지자의 30~35%로 추산되는 이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대표적인 계층이라는 것이다. 도를 넘은 막말 파문에도 그를 지지한다고 응답하는 공화당 내 ‘콘크리트 지지율’과 고스란히 겹친다.
    워싱턴 정치 전문지 ‘내셔널 저널(National Journal)’의 존 주디스 전 편집장은 10월 2일 이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이들이야말로 1960년대 조지 월리스, 90년대 로스 페로, 팻 뷰캐넌으로 이어지는 ‘제3후보’의 돌풍을 연출한 핵심 지지층이었다’고 분석했다. ‘아무도 우리를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이들의 불만을 가장 발 빠르게 상품화했다는 것이야말로 트럼프 열풍의 비결이라는 이야기다.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라는 트럼프의 상투어는 바로 이들에 대한 호명인 셈. 그가 쏟아내는, 기존 정치 스펙트럼으로는 눈곱만큼의 일관성도 찾을 수 없는 기묘한 발언들은 기실 이들 계층의 마음속 목소리를 고스란히 차용해 질러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잣대는 돈으로 이어진다

    #2 “이것은 배신이다!” 8월 11일 전국 네트워크 TV 연설에 나선 트럼프는 연신 연단을 내리쳤다. 공화당전국위원회(RNC)가 슈퍼팩(Superpac·후보 외곽조직)을 활용해 경선 차점자였던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에게 대규모 선거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는 뉴스가 미국 주요 언론을 장식한 날이었다. 7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트럼프는 공식 후보 자격을 인정받았지만, 루비오 의원은 이날 승복 대신 독자 출마를 선언했다. “누가 진짜 공화당 후보인지 유권자들은 똑똑히 알 것”이라는 도발적인 선언을 남긴 채. 이날 RNC는 루비오를 지원하고 있다는 관련 보도를 부인하지 않았다. 노골적인 트럼프 배척이었다.
    “당신도 배신자다!” 트럼프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관객석에 앉아 있던 중년 백인 남성이 소리를 질렀다. 멕시코와의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쌓아 올려 이민 유입을 완전히 차단하고 불법체류자를 추방하겠다던 당초 약속이 본선에 접어들면서 사라졌다는 비판이었다. “무엇이 미국 국민에게 가장 바람직한지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경선 과정 막말과는 전혀 다른 그의 태도는 지지층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기나긴 대선 레이스, 트럼프는 분명 변하고 있었다.

    트럼프의 ‘즉흥성’이 드러나는 가장 대표적인 분야는 바로 대외정책이다. 그는 이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 특정 참모나 전문가의 조언이 아니라 케이블TV방송에서 보고 배운 것이라고 잘라 말한 바 있다. 당연히 언뜻 보기에는 전혀 일관성이 없다. 이슬람국가(IS) 이슈가 불거지자 “그 가족들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다,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서는 “그처럼 잘사는 나라를 우리가 지켜줄 필요가 없다”고 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를 앞서의 핵심 지지층과 연결해 해석하면 답은 쉽게 나온다. 모든 잣대는 돈이다. 당장 미국의 이익, 정확히는 유권자들의 일자리나 수입을 늘리는 일과 무관하다면 세금을 쏟아부을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 가치 확산, 먼 미래의 지정학적 이해관계 등은 고려사항이 아니다. 미국 기업의 시장을 빼앗아가고 결과적으로 미국인의 일자리를 위태롭게 만드는 한국 같은 나라들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누군가 우리를 건드린다면, 그게 특히나 외부세력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응징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추상적인 국제법적 원칙이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불필요한 돈을 쓸 이유는 없다. 전 세계의 평화적 공존 같은 미사여구 역시 신경 쓸 필요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20세기 초 미국을 풍미했던 고립주의 대외정책 기조와도 사뭇 결이 다른 이러한 그의 사고방식에 대해, 김성한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은 “굳이 이름 붙이자면 안보에서의 중상주의(mercantilism)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촌평한다. 장기적 이익이나 협력을 통한 가치 극대화보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문을 닫아걸고 주판알 튕기기에 몰두하는 자세. 트럼프가 실제로 백악관을 차지한다면 한미동맹과 관련해 벌어질 일은, ‘주한미군 철수’를 목에 걸고 한국에 훨씬 더 많은 방위비분담금을 요구하는 형태로 나타날 공산이 큰 이유다.
    문제는 확장성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MARS에 해당하는 유권자는 공화당 지지자의 35% 남짓. 후보가 난립한 공화당 경선에서 승리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이들이 전체 유권자의 20%에 불과하다면 본선 경쟁력은 형편없을 수밖에 없다. 경쟁후보들이 ‘트럼프는 민주당의 첩자’라고 원색적 비난을 가하는 것 역시 이 때문. 미국의 주요 선거에 참여한 바 있는 정치컨설턴트 김윤재 미국변호사는, 이를 뻔히 알고 있는 공화당 수뇌부가 이후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을 개연성은 적다고 전망한다. 트럼프가 경선에서 승리한다 해도, 차점자를 앞세워 선거자금을 몰아주는 방식을 활용해 ‘비공식 후보’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진짜로 백악관 주인이 되길 원한다면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경우 택할 수 있는 카드도 뻔하다. 지금 같은 막말 대신 훨씬 더 세련된 자세와 말투로 ‘시비의 여지’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기실 이러한 변신은 미국 대선 과정에서 늘 반복돼온 패턴이기도 하다. 당내 경선을 통과하는 과정에서는 공격적이고 파격적인 색깔을 과시하다, 막상 본선이 시작되면 중도층을 잡기 위해 톤을 낮추는 전략. 일부 ‘집토끼’의 이탈은 피할 길 없지만, 양당 구도가 워낙 견고한 미국에서는 가장 손해가 적은 정치공학이었다. 그러나 소수 집토끼의 높은 충성심만으로 선거를 밀어붙이고 있는 트럼프는 어떨까. 도발적인 태도로 모은 인기는 변신 이후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트럼프 현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3 트럼프의 전략적 변신은 상상 이상이었다. 선거 막판 루비오 의원에게 ‘권력지분을 절반 가까이 쪼갠 부통령직’을 제의해 단일화에 극적으로 성공한 트럼프는 ‘연립정부’라는 말로 공화당의 정통성이 트럼프-루비오 콤비에게 있음을 선언했다. 쿠바계 이민자의 아들, 격전지 플로리다 출신, 에너지 넘치는 40대 정치인과의 결합은 트럼프의 두 어깨에 날개를 달아줬다. 경선 초기 트럼프의 히스패닉 비토 발언에 경악했던 플로리다가 본선 레이스 중반 이후 돌아섰고, 뉴햄프셔와 네바다가 꿈틀댔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부 장관의 스캔들이 연이어 폭로되면서 코너에 몰린 민주당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위기감은 실책을 부르기 마련.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면 의회는 머지않아 탄핵절차를 검토하게 될 것”이라며 “공화당의 양식 있는 의원들은 동참하라”는 민주당 지도부의 메시지는 결정적 자충수였다. ‘유권자의 선택을 뒤엎으려는 워싱턴 정치꾼들의 쿠데타 모의’라는 트럼프 측의 반발이 오히려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운명의 11월 8일. 그렇게 트럼프는 백악관의 주인이 됐다. 항의 시위대가 주요 대도시마다 들끓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워싱턴 인사들은 훨씬 신속하게 ‘달라진 상황’에 적응했다. 속속 발표되는 내각 명단에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중량급 인사가 대거 포함됐다. “우리는 모두 미국이라는 한 배를 탄 사람들”이라는 구호가 워싱턴의 유행어가 됐다. 트럼프는 대통령직을 쥐었으나, 언제든 탄핵이 발의돼도 이상할 게 없는 취약한 정통성이었다. 불안하지만 모두가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이 기묘한 동거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정치적 무기력으로 이어졌다. 가장 민감한 시기에 등장한 가장 무능한 행정부. 그렇게, 미국의 몰락이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3권 분립과 권력 견제의 원형에 해당하는 미국 헌법체계는 대통령 한 사람이 국가정책을 좌우할 수 있는 폭을 극단적으로 제약해놓은 체제다. 제임스 김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를 미합중국 탄생 배경으로 풀이한다. 대영제국의 세금 부과에 맞서 독립을 선언했고, 연방정부의 권한이 주정부를 압도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던 ‘건국의 아버지들’은, “효율성보다 권력 견제에 초점을 맞춘 시스템”을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는 이야기다.
    트럼프가 쏟아놓은 말들은 엄청나지만, 실제로 대통령이 돼 이를 추진하려면 입법 과정에서 의회의 지지를 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대통령 행정명령(Executive Order) 형식으로 우회하려 해도 의회가 얼마든 무력화할 수 있는 것. 사법부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논란이 된 ‘무슬림 입국 금지’ 같은 정책은 입안되는 순간 연방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맞고 사라질 공산이 크다. 최악의 경우 공화·민주 양당은 얼마든지 탄핵 카드를 꺼내 들 수 있다. 실제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면 이후 벌어질 일은 ‘240년 미국 역사상 가장 힘없는 백악관’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차피 대통령이 될 가능성도 적고 된다 해도 ‘뜻’을 펼칠 기회가 없다면, 우리로서는 그저 ‘재미있는 헛소동’을 지켜보는 것으로 끝일까.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은 것은 맨처음 만난 ‘사람 좋은 피트’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그가 상징하는 미국 유권자들의 어떤 경향이다. 지금 미국을 뒤덮고 있는 위기감이 극단적 열풍의 원인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12월 초순 현재 트럼프의 뒤를 이어 20% 안팎 지지율을 넘나들며 공화당 경선 2위를 달리는 텍사스 주 출신 정치인이다. 흥미로운 것은 전체적인 기조로 볼 때 그가 내놓은 정책 역시 트럼프와 그리 거리가 멀지 않다는 사실. 강력한 이민억제정책, 복지 축소, 무분별한 대외 개입 자제. 이를테면 훨씬 논리적이고 세련된 버전의 트럼프다. 공화당 1, 2위 후보가 모두 이런 경향성을 띤다는 건 간단히 볼 일이 아니다. MARS로 대표되는 미국 내 ‘자국 중심적’ 유권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정치판 전체의 기준점이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시그널이다. 이미 대세가 된 거대한 흐름이라는 뜻이다.
    앞서 본 ‘내셔널 저널’ 기고문에서 주디스 전 편집장은 ‘제3후보 현상은 미국이 쇠퇴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시점에서 폭발력을 발휘하곤 했다’고 분석했다. 베트남전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던 1960년대 후반, 쌍둥이 적자가 현안이었던 90년대, 그리고 떠오르는 중국과 무기력한 미국이라는 이미지가 자리 잡은 지금이 모두 그렇다는 이야기다. 트럼프가 사라져도, 트럼프 현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미동맹과 방위비분담금에 대한 미국 중산층 유권자들의 차가운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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