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21

2010.01.26

제중원 ‘황정’의 실존인물 ‘박서양’을 아십니까?

백정 아들→의사→기자·독립운동가로 파란만장한 삶 SBS 드라마 통해 화려하게 부활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박영목 주간동아 인턴기자 연세대 의학과 4학년

    입력2010-01-21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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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중원 ‘황정’의 실존인물 ‘박서양’을 아십니까?
    SBS 월화드라마 ‘제중원’이 장안의 화제다. 드라마의 주 테마는 구한말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濟衆院·광혜원)’을 배경으로 신분의 차를 극복하고 진정한 의사로 성공한 황정(박용우 분)의 일대기다. 드라마 속 황정이 실제 역사 인물임이 드러나면서 시청자의 궁금증과 호기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황정은 백정(白丁) 출신이면서 한국 최초로 의사면허를 받고 독립운동까지 한 ‘박서양’을 모델로 하고 있다.

    사람 대접 못 받던 어릴 적 이름은 ‘개새끼’

    의사 박서양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백정의 아들이 의사가 됐다’라는 정도로만 구전돼왔을 뿐, 지금껏 그의 진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최근 들어 그가 세상에 알려지고 제 가치를 인정받은 데는 연세대 의대 박형우(54·해부학교실) 교수의 숨은 노력이 큰 몫을 했다. 박 교수는 박서양의 일대기를 사료 고증을 통해 밝혀내 논문으로 엮었으며, 그가 쓴 ‘제중원’이라는 책은 드라마의 모티프를 제공하기도 했다. 박 교수가 드라마의 의학 자문을 맡은 것도 이 때문이다.

    박서양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만약 드라마의 내용을 미리 알고 싶다면 박서양의 일대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드라마에서 황정의 어릴 적 이름은 ‘소근개’로 근수가 적게 나가는 개, 즉 ‘개새끼’라는 의미다. 그만큼 당시 백정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최하층 신분인 박서양이 의사가 된 것은 박서양의 아버지 박성춘과 제중원 의사 에비슨(O. R. Avison·제중원 4대 원장)의 ‘운명적 인연’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박성춘을 에비슨이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치료했기 때문.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박성춘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를 스승처럼 따랐다고 한다.

    콜레라도 박서양이 의사가 되는 데 한몫했다. 1895년 6월 콜레라가 만연하기 시작하자 조선 정부는 에비슨을 방역 책임자로 임명했다. 에비슨의 노력 끝에 콜레라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조선 정부는 에비슨에게 감사를 표했고,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 백정들의 해방을 탄원했다. 박성춘을 비롯한 다른 백정들의 탄원도 함께 제출됐다. 결국 1896년 2월 백정들에게도 면천(免賤)이 허용되기에 이르렀다. 즉, 박서양에게 의사가 될 길이 열린 것이다.



    박서양은 결혼 이후 본격적으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에비슨은 박서양의 결혼식장에서 “아들놈을 병원으로 데려가 사람 좀 만들어달라”는 박성춘의 부탁을 받고도 제중원의학교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박서양을 병원으로 불러 청소, 침대 정리 등 온갖 궂은일을 시켰다. 박서양이 힘든 일을 아무 불평 없이 처리하자 에비슨은 비로소 그에게 의학 책을 읽게 했다. 뒷날 밝혀진 일이지만 에비슨은 박서양의 사람됨을 알기 위해 일부러 그를 시험했다. 결국 박서양은 다른 6명과 함께 1908년 졸업시험을 통과해 한국 최초의 의사면허를 받았다. 박형우 교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의학 공부에서 필요한 덕목은 ‘성실성’으로, 박서양의 인간됨을 알아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제중원 ‘황정’의 실존인물 ‘박서양’을 아십니까?

    1 1908년 제중원의학교 제1회 졸업식. 가운데줄 맨 오른쪽이 박서양. 2 제중원 수술 장면. 학생 박서양(가운데)이 탕건을 쓰고 에비슨을 보조하고 있다. 3 박서양.

    만주 무대로 의료활동, 동아일보 기자로도 활약

    학교를 졸업한 박서양은 모교 제중원의학교의 전임교수로 화학, 해부학 등을 가르치며 외과 환자를 진료했다. 그러나 그는 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돌연 간도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구세병원과 숭신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간도 지역의 조선인 자치기구이자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서 군의(軍醫)로 임명돼 의료를 담당했다. 박서양은 이때 동아일보 간도지국 기자로도 활약했다.

    만주를 무대로 독립운동에 힘쓰던 박서양은 1936년 귀국길에 올랐다. 박형우 교수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이 사실상 어려워지고, ‘불온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그가 설립한 숭신학교가 폐교당하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미 50대가 돼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고 싶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박서양은 광복을 5년 앞둔 1940년 55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영면했다.

    박서양의 일대기는 2006년 박형우 교수의 논문 ‘박서양의 의료 활동과 독립운동’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박서양의 업적이 뒤늦게 밝혀진 것에 대해 박 교수는 “최근 독립운동사 자료에 대한 접근이 쉬워진 덕에 박서양이 간도에서 활동한 내용을 개략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또한 박서양의 손자 박연수 씨가 2005년 연세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입수한 호적등본 등 여러 자료와 당시 ‘동아일보’ ‘신동아’의 기사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제중원 ‘황정’의 실존인물 ‘박서양’을 아십니까?

    1885년 설립된 제중원 전경.

    노블레스 오블리주 몸소 실천한 대의(大醫)

    2008년 광복절을 맞아 박서양은 ‘건국포장’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박형우 교수는 “첫 의사면허를 받은 7명 중에서 4명이 독립유공자”라며 “수많은 조선의 엘리트들이 근대 지상주의의 미명 하에 일제 침략을 용인했던 것과는 달리, 이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며 대의(大醫)의 모습을 보여준 지식인”이라고 설명했다.

    이기원 작가의 각색을 통해 황정으로 거듭난 박서양은 드라마 ‘제중원’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까지 진행된 드라마 내용을 보면 에비슨이 광혜원(廣惠院·제중원의 전신)의 초대 원장이자 한국에 최초로 서양의학을 전파한 H. N. 알렌으로 설정됐고, 아버지와의 인연 부분은 박서양과 알렌의 개인적 친분으로 설정됐지만, 극 전개의 흐름은 박서양의 실제 일대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전망이다. 칠레에 살고 있는 박서양의 손자 박연수(74) 씨는 “극의 재미를 위해 억지로 각색한 부분이 있어 좀 아쉽다”고 전했다.

    인터뷰/ 드라마 ‘제중원’ 자문 연세대 박형우 교수

    “내 책을 ‘제중원’ 작가가 접한 게 인연”


    제중원 ‘황정’의 실존인물 ‘박서양’을 아십니까?
    드라마 ‘제중원’의 실제 주인공 박서양의 일대기를 최초로 발굴한 연세대 의대 박형우 교수의 이력은 여느 의사와는 다르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며 남이 잘 선택하지 않는 해부학을 전공했고, 10년간 해부학에 매진한 뒤에는 인체발생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인체발생학은 정자와 난자의 수정부터 아기가 태어나기까지 엄마 배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 해부학뿐 아니라 조직학, 신경해부학 등을 두루 섭렵해야 한다. 또한 인체 배아의 조직 표본을 구하기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학문이다. 그런 그가 의사(醫史)학자로 변신했다. 다음은 박형우 교수(사진)와의 일문일답.

    드라마 ‘제중원’의 의학 자문을 맡았는데.

    “‘종합병원’이나 ‘허준’ 같은 드라마와 달리 ‘제중원’은 격변기의 한국 의료상황을 묘사해야 한다. 한의학과 양의학이 공존하는 125년 전의 한국을 묘사하는 데 의료도구나 수술 장면 등의 표현에 난감한 점이 많아 관련 내용을 자문하고 있다.”

    자문을 맡은 계기는.

    “2002년에 ‘제중원’이라는 책을 냈다. 드라마 ‘하얀 거탑’을 끝낸 이기원 작가가 한국 의료계에서 소재를 찾던 중 내 책을 접한 것이 인연이 됐다. 이기원 작가의 소설 ‘제중원’을 감수했고, 자연스럽게 드라마의 자문도 맡게 됐다.”

    의사학을 시작한 이유는.

    “졸업생 재상봉 행사를 준비하면서 역사 자료를 자유롭게 열람하고 싶은 생각에 학교 내 의사학 자료실의 실무를 맡았다. 1996년 학교에 의사학과가 신설되면서 학과장을 맡아달라는 주위의 권유로 의사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이후 개화기 서양의학의 수용 과정과 북한 의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다 보니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발생학과 의사학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원리는 똑같다. 인체발생학은 조직 표본을 통해 앞뒤 관계를 추론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의사학도 마찬가지. 내 앞에 놓인 사료의 가치를 판별하고 그것을 한 꾸러미로 엮는다는 점에서 발생학과 유사하다. 둘 다 ‘인간의 역사와 기원’을 다루는 셈이다. 남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분야라는 점도 비슷하다.(웃음)”

    대한의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데, 앞으로의 계획은.

    “대한의사학회의 노력으로 한국 의료계의 역사가 상당 부분 재조명됐다. 그러나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 다행히 세상이 발달하면서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사료를 인터넷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곳곳에 숨겨진 귀중한 자료를 찾아내는 일이 뿌듯하다. 교수 정년을 넘겨서도 의사학 연구를 통해 보람 있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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