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은 본 연재를 통해 별도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전체 주제를 관통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평안도 출신의 1920년생 김준엽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학병세대로 일본군 학병을 최초로 탈출해 장준하를 이끌어 충칭 임시정부로 인도했고, 해방 직전 광복군 장교가 돼 이범석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전쟁을 치르고 국가를 재건하던 50년대 후반 사상계 그룹의 핵심으로 4·19혁명의 격동기에 ‘사상계’ 주간으로 여론을 주도했다. 요컨대 김준엽은 한국의 ‘정통’ 우익을 대표한다.
김준엽은 스스로도 정통 민족주의자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가 봤을 때 해방 후 대한민국의 집권세력은 온통 친일파 일색이었다. 그는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해인 1993년 8월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끄러운 것은 광복 후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며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가난에 허덕였으나, 친일파들은 일제하에서 쌓은 배경으로 계속 잘살았습니다. 이런 풍토에서 누가 역사를 두려워하고,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정의와 도덕을 생의 지표로 삼겠습니까. 민족을 배반한 것이 죄가 안 되고 부끄럽지 않은 나라에서 다른 무엇이 죄가 되겠습니까.”
이런 김준엽의 언급은, 평생의 동지 장준하가 박정희와 대결할 때 줄곧 광복군 출신인 자신과 일본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를 대조했던 이유를 이해하게 해준다. 그런데 친일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먼저 일제강점기를 통과한 사람들의 나이를 살펴보자.
일제강점기 사회활동을 시작했던 지식인 엘리트 가운데 엄밀한 의미에서 ‘친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드물다. 연령대로 봤을 때 그 경계는 어디쯤일까.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해방이 됐을 때 채 서른이 안 된 1917년생 이후 출생자는 대개 일제강점기 말에도 사회에서 자리 잡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17년생이라 하더라도 박정희와 같이 일본군 장교가 되거나 고등문관시험을 통해 일찍 행정 관리가 된 이들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 황산덕(본 연재 10회)과 강원용(본 연재 16회)의 경우, 두 사람 모두 17년생이지만 일제 말 고등문관시험을 거쳐 행정관이 된 황산덕과, 같은 시기 만주 룽징(龍井)에서 교회 전도사로 있었던 강원용은 이 기준으로 가름된다. 이 나이 대에서 강원용 쪽이 일반적인 경우였음은 분명하다. 많은 청년 지식인이 학병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세대에서 일제강점기 군 장교와 관리가 된 사람들은 확실히 소수에 속한다.
학병세대의 자기의식에서 세대 감각은 참으로 강조할 만하다. 친일로부터 자유로운가 여부는 그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큰 가름대가 된다. 이항녕의 경우를 보자. 이항녕이 오랜 훗날, 일제강점기 말 자신의 친일을 여러 차례 공식석상에서 참회한 것은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군수 지낸 이항녕의 참회
김준엽보다 불과 5년 위 연배인 1915년생 이항녕은 40년 경성제대 법과를 졸업하기 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행정고등고시의 전신)에 합격해 41년부터 해방까지 경남 하동군수와 창녕군수를 지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면 곧바로 군수급 발령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을 포함해 “일제 말기 군수 이상의 행정관리는 모두 친일행위자”라고 이야기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1954년 이후 고려대 법대 교수로 있다 65년 9월 한일협정 반대로 인해 ‘정치교수’로 몰려 해직되기도 했고, 같은 해 남정현의 ‘분지’ 필화사건 때는 한승헌과 함께 변호인으로 법정에 서기도 했던 한 사람의 ‘양심적인 지식인’은 이렇게 일제강점기 말 ‘기껏’ 군수를 한 것만으로도 부끄러워했다. 이항녕은 자신보다 4년 위인 1911년생 류달영(본 연재 12회)의 삶에 대해 다음처럼 찬사한 바 있다. “많은 지식인이 입신출세를 위해 일제에 아부했는데 성천(류달영)은 끝끝내 지조를 지켜 민족의 스승이 되었다.”
이항녕이 가졌던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류달영에 대한 찬사는, 군수 정도가 비난의 대상이 될 만한 친일인가 하는 문제를 떠나서 의미하는 바가 있다. 학병 윗세대의 ‘친일 콤플렉스’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감각을 알아채는 것은 중요하다. 학병 윗세대 류달영이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911년생으로 학병세대보다 윗세대였던 까닭에 친일의 국면에 놓여 있었음에도 “지조를 지켰다”는 데 있다. 요컨대 ‘친일’은 학병 윗세대들에게는 원죄와 같은 콤플렉스를 가지게 만들었고, 역으로 새 조국건설에 기여하고자 했던 학병세대는 소수를 제외하면 친일의 죄의식로부터 자유로운 첫 세대가 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들 학병세대가 어떤 토양에서 자랐는가를 살필 때 문제가 그리 단순치 않음을 알게 된다. 1943년 일제의 학도병지원병제가 공포될 때 전문학교 이상 교육기관에 재학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들이 모두 제국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임을 의미한다. 제국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해방 후 국가건설의 밑바탕이 된 이들의 지식이 모두 일본으로부터 온 것임을 뜻한다.
학병 윗세대는 두말할 것도 없다. 건국기에 이미 대한민국 각 분야의 ‘태두’급 지식인은 모두 일본 교육의 강력한 수혜자들이었다. 철학자 박종홍이 일본 철학자들, 특히 국가주의 철학을 뒷받침한 교토학파의 저작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박종홍이 기초한 국민교육헌장(1968)과 일본 교육칙어(1890)의 유사성은 오래전부터 지적돼왔다. 이런 정도는 일본 지식계의 영향을 보여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학병세대이자 ‘정통’ 민족주의자인 김준엽은 어떨까. 김준엽이 유학한 일본 게이오(慶應)대 설립자는 오늘날 일본의 기초를 놓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다. 김준엽은 대학 시절 후쿠자와의 삶에 깊이 감명했음을 고백한 바 있다. 후쿠자와로부터 감명을 받은 것은, 후쿠자와가 ‘관의 유혹을 뿌리치고 학문과 언론활동에만 전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쿠자와가 학문과 교육, 언론을 통해 일본 근대화에 기여한 것처럼, 자신도 ‘우리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할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제국화를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후쿠자와에 이른다. 이 세대에서 지극히 예외적인 조지훈과 같은 경우(본 연재 19회)를 제외하면 ‘모두’가 정신적으로든 기술적으로든 일본에 빚지고 있었다.
확실히 오늘날 대한민국을 설계한 이들과 그 생각들을 이야기할 때 일본을 지우고 가기란 힘들다. 친일의 합리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국가 대 국가’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따른다는 것이다. 그 기원에서 일본으로부터 왔다는 것과 제국에 협력했다는 것을 혼동할 이유는 없다. 김교신(본 연재 11회)과 우치무라 간조를 생각해보더라도 그렇다.
일제강점기 말 광복군에서 김준엽이 장준하와 미군 OSS(CIA 전신) 훈련을 받은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상징성이 있다. 두 사람이 훈련받은 중국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는 광복군 주력부대로서 1945년 해방 직전 당시 미 전략정보기관 OSS와 합작해 조선반도 진입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준하와 김준엽이 OSS 훈련을 받은 것은 이 작전과 관련돼서였다. 중국 군복을 벗고 “미군 군복으로 갈아입었다.”(김준엽의 ‘장정 2’)
새 나라의 설계, 일본에서 미국으로
중국 군복은 잠시 입었던 것으로, 결과적으로 일본 군복에서 미군 군복으로 갈아입은 셈인데 이 장면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곧 있을 해방과 이후 한국의 앞날을 예고하는 듯해서다. 모두 알고 있듯, 일본의 패전은 한반도와 만주를 덮고 있던 일본의 우산이 걷히고 북위 38선 이남에 미국의 우산이 드리우는 것을 의미했다.그런데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미 해방 이전 일제강점기부터, 이르게는 구한말부터 한반도에서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미국화가 진행 중이었다는 견해들이 있다. 해방 전 미국화 과정에서 기독교 선교는 그 중심에 있었다. 교육과 의료를 앞세운 기독교는 근대화의 기본이자 첨병으로 인식됐다. 조선에서는 1885년 개신교 선교 이래 첫 5년간의 성서보급률이 중국에서 50년간의 보급률보다 높았으며, 일본의 최초 12년 선교 성과를 단 2년 만에 달성했다는 보고가 있다.(유선영의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 식민지배 시기 미국화’)
일제강점기 한반도 서북의 미국화는, 해방 후 좌우 재편 과정에서 남으로 내려온 이북 출신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이 가지는 의미를 그대로 예고하는 것이다. 건국과 전후 국가재건 과정에 미국이 끼친 절대적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월남 지식인들이 가지는 한국 사회 설계에서의 비중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6·25전쟁 후 한국의 근대화 플랜을 펼쳐 보였던 사상계 그룹(본 연재 6회)의 편집위원 출신 분포를 보자. 1950년대 ‘사상계’ 편집위원진은 장준하를 포함해 29인이었다. 이 29인 가운데 21인이 이북 출신이며 그것도 평안도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그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다. 편집위원이 아니더라도 ‘사상계’ 주요 필진이던 함석헌, 김재준, 백낙준, 김성식 등을 헤아리게 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훗날 지명관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남쪽에 내려오니까 여기 그렇게 지식인이 많지 않은데, 중요한 지식인이 북행을 했고, 그러니까 하나의 지적 공백이 생기지 않겠어요? 리더의 공백이 생기고 (중략) 그 북쪽 사람들이 도미네이트(dominate)했고.”(국사편찬위원회의 ‘지명관 녹취록 4차’)
종교인이 숨통 틔운 이념
대한민국 건국과 전후 재건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이북 출신’ 지식인이 모두 ‘친미 보수우익’이란 한통으로만 묶일 수 없음은 다시 언급해둬야겠다. 물론, 남북 간 전쟁이 동족을 생래적 원한관계로 갈라놓은 탓에 전쟁 후 한국사에서 중도 이념조차 발붙이기 어렵게 된 것은 분명하다.그런데 분단 이전, 원래 해방기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극좌와 극우는 ‘한 줌’에 불과했다. 1946년 여름 미 군정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나라 만들기’의 과제와 관련해 자본주의 체제를 원한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14%(1189명), 공산주의 체제 선호자가 7%(574명)였음에 비해, 사회주의 체제를 바란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70%에 이르는 6237명이었다고 한다(서중석의 ‘조봉암과 1950년대 (상)’). 이 시기 대중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제3이념으로 이해했던 듯하다. 이러한 통계는 이 시기 보수우익 정당인 한민당조차 사민주의적 정책을 일부 표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해방기 북을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중도파의 존재는 1950년대 진보당의 정치세력화와 1960년 4·19혁명 국면에서 혁신세력의 등장 현상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물론 이들은 모두 실패했다. 그렇지만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에 걸친 김재준과 ‘한신(韓神)’의 민주화운동(본 연재 15, 16회)은 정치적으로 중도노선의 입지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우익 편향의 한국 현대 정치사의 지평에서 일부 종교가 사회 진보를 위한 ‘숨통을 터주는’ 기능을 했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류영모-함석헌 등 국가주의에 반대하는 정신주의 계보(본 연재 14회)도 한몫을 했다.
이들이 끼친 영향들, 그리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 펼쳐진 상황을 두루 살피면서, 연재를 마치기로 한다. 해방 후 한국 역사에서 좌익이 정권을 잡은 적은 없다. 1950년대 후반 한국 근대화의 플랜을 제시하고 6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 정권에 저항한 장준하, 김준엽 등 사상계 그룹의 성향은 명백히 우익 민족주의 계열이었다. 한신 정도가 그 기원에서 좌우 사이 중도 성향을 보이긴 했지만, 실제 정치사에서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한 적은 없으며, 다만 극우 독재에 저항했을 뿐이다. 해방 후 제도권 정치의 역사에서 중도 노선 정당조차 살아남은 적이 없다. 우익과 보수를 가장한 극우 정치세력과, 그냥 우익들 간 이합집산과 대립의 정치사였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정치와 정책을 말하면서 보수우익 일부에서 틀 지은 ‘좌우 프레임’에 사로잡힐 이유는 없을 듯하다. 이념의 스펙트럼은 넓고 우익도 마찬가지다. 독자들이 이 연재를 ‘한국 우익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로 읽었기를 바란다. 자신들 견해와 같은 극우적 국가주의가 아니면 모두 좌파로 내모는, 오늘날 우익을 사칭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러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