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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석의 쫄깃한 일본

“스모 경기장에 여자는 못 올라간다”

일상화된 여성 차별, 성희롱에 분노한 日 여성들 거리로…“나는 침묵하지 않아”

“스모 경기장에 여자는 못 올라간다”

4월 28일 일본 도쿄 신주쿠역 앞에서 열린 ‘나는 침묵하지 않아’ 집회 현장(아래). 스모 경기장 도효에서 응급처치를 하던 여성들에게 내려가라는 장내 방송을 한 사건을 보도한 일본 한 방송사의 뉴스. [김범석 기자]

4월 28일 일본 도쿄 신주쿠역 앞에서 열린 ‘나는 침묵하지 않아’ 집회 현장(아래). 스모 경기장 도효에서 응급처치를 하던 여성들에게 내려가라는 장내 방송을 한 사건을 보도한 일본 한 방송사의 뉴스. [김범석 기자]

“성적 농담을 건네지 말라고 (남성 동료에게) 말하면 ‘말장난인데 왜 그러느냐’며 오히려 화를 냅니다. 우리가 참아야 하는 겁니까.” 

4월 28일 오후 4시 일본 도쿄 최대 번화가인 신주쿠(新宿)역 앞. 이곳에 모인 100여 명의 사람이 한 20대 여성의 이야기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이들은 ‘시대가 바뀌었다’ ‘여성은 남성의 장난감이 아니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이어 고3 여고생이 무대에 섰다. 

“스커트 길이가 짧다, 몸매가 별로다 같은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 선생님도 있습니다. 너무 무섭습니다.” 

‘나는 침묵하지 않아(私は&らない)’라는 제목의 이날 집회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남성의 성희롱 실태를 폭로하고 여권 신장을 촉구하는 자리였다. 10대부터 50대까지 남녀노소가 자발적으로 모여 약 2시간 동안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여성 문제와 관련해 집회가 열린 것은 이례적이다.


재무성 관료 성희롱 사건, 일본판 미투 불 지펴

집회를 연 사람은 20대 여대생 미조이 모에코(溝井萌子) 씨였다. ‘나는 침묵하지 않아’라는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많은 누리꾼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미조이 씨는 기자와 인터뷰에서 “집회 기획 단계부터 한국 ‘미투운동(#Me Too)’을 보며 용기를 얻었다”고 밝혔다. 참가자들의 목소리를 종이에 써서 벽에 붙이는 행사도 있었는데, 그는 “2년 전 서울에서 발생한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 당시 한국인들이 추모 메시지를 담은 종이를 강남역 벽에 붙인 것을 보고 떠올렸다”고 말했다.
 
앞서 4월 23일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나가타초(永田町) 중의원 회관에서는 국회의원, 변호사 등 여성 200여 명이 여성 성범죄 피해 근절을 위한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검은 옷을 입고 ‘#With You(당신과 함께)’라는 카드를 들었다. 미투운동 지지의 의미로 검은 옷을 입었던 미국 사례를 참고한 것이다. 

일본 여성들이 밖으로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불을 지핀 것은 일본 권력 핵심 부서인 재무성의 최고위 관료였던 후쿠다 준이치(福田淳一) 전 사무차관의 여기자 성희롱 사건이었다. 그는 재무성을 담당하는 한 언론사 여기자와 가진 술자리에서 “가슴을 만져도 되느냐” “호텔에 가자” “키스하자”는 등의 발언을 상습적으로 해온 사실이 밝혀졌고 그의 육성 녹음파일이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자리에서 물러나는 날까지 “그런 적이 없다”며 부인했고 심지어 피해자인 언론사 여기자를 향해 “(누구인지) 이름을 대라”며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일본 여성 인권 수준 역대 최저

여기자 성희롱 발언으로 물의를 빚어 사임한 후쿠다 준이치 전 일본 재무성 사무차관(가운데). [동아DB]

여기자 성희롱 발언으로 물의를 빚어 사임한 후쿠다 준이치 전 일본 재무성 사무차관(가운데). [동아DB]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내각의 ‘2인자’인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은 사태에 대한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후쿠다 전 사무차관이) 함정에 빠졌다는 의견도 있다” “(재무성 담당 기자를) 남성 기자로 바꾸면 된다” “성희롱은 살인이나 강제추행과는 다르다”며 망언을 이어갔다. 이에 야당 소속 여성 의원들이 재무성을 방문해 항의했는데, 아베 총리의 자민당 나가오 다카시(長尾敬) 의원은 이들의 항의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고 ‘(외모적으로) 성희롱과 인연이 먼 분들’이라고 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여성에 대한 일본의 낮은 인권 의식은 성희롱 사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4월 4일 일본 대표 스포츠인 스모 경기장에서 한 공무원이 스모 경기가 벌어지는 판(도효·土俵)에 올라갔다 쓰러지는 일이 일어났다. 관중석에서 여성 두 명이 도효에 올라가 응급조치를 하자 갑자기 “여자는 경기장에 올라갈 수 없다. 남자가 올라가라”는 장내 방송이 나왔다. 응급조치를 하던 여성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쓰러진 공무원은 경비원들이 올 때까지 방치됐다. 이 여성들은 의료계 종사자였다. “도효는 금녀의 공간”이라던 일본스모협회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논란이 커지자 결국 “부적절한 대응이었다”며 사과문을 발표했다. 일본 현지 언론들도 “목숨 앞에서 왜 남녀를 가려야 하느냐”며 일제히 비난했다. 

아베 총리는 ‘여성이 일하는 사회’ ‘여성이 빛나는 사회’ 등 여성 우대 정책을 강조해왔지만 일본 내 여성 인권 수준은 바뀌지 않는 분위기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조사한 일본의 성 격차는 144개국 가운데 114위로 역대 최저였다. 

거리로 나온 여성의 상당수는 일본판 미투운동의 선봉자 이토 시오리(伊藤詩織) 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토 씨는 아베 총리와 가까운 한 방송국 간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는데, 이 간부에게 불기소 처분이 내려지자 피해를 폭로했다. 하지만 그는 ‘꽃뱀’ ‘일본의 수치’ 등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들었고 결국 영국으로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 

집회에 참가한 한 50대 여성은 “‘여성은 남성 아래에 있다’거나 피해를 당해도 여성은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일본 사회 분위기에 숨이 막혔다”며 “젊은 세대는 이렇게 살지 않길 바라는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주간동아 2018.05.16 1138호 (p52~53)

  • | 동아일보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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