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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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 민족주의로 이동하다

‘민족’ 앞세운 박정희의 승리…‘한국적 가치’ 통치 이데올로기로 변질

  •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입력2016-01-05 18: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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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역사에서 근대는 언제 시작되는가.’ 이런 물음은 물론 역사학의 문제다. ‘한국사의 시대구분’ 같은 ‘책 냄새 나는’ 주제는 순수하게 학문적 영역의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큰 오해다. 역사 해석이 단지 ‘학문’ 영역만의 문제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역사 해석은 언제나 현실에 대한 어떤 태도를 품고 있다. 1960년대 국학계로 가보자.
    국문학계에서 고전과 현대를 아울러 한국문학사를 서술한 책은 단 둘뿐이다. 조동일의 ‘한국문학통사’(전 6권·통사)와 김윤식·김현 공저의 ‘한국문학사’다. 각각 1980년대와 1973년에 발간된 이 두 책은 공통점이 있다. 저자들이 모두 40년을 전후해 태어난 4·19세대라는 점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두 책을 지배하는 공통된 패러다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책들이 공히 60년대 말에 착안됐다는 점은 두 책의 기본 틀을 결정짓게 한다. 한국사 시대구분에서 근대의 기점(起點) 논의와 관련된다.
    1982년 제1권이 나오기 시작해 88년 제5권으로 일단락된 조동일의 ‘통사’에서는 문학사의 시대구분 문제, 다시 말해 ‘근대문학의 기점’ 문제가 가장 눈에 띄었다. 초점이 되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동일이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를 중세, 근대와 동등한 범주로 뒀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가 시작되는 시점(임진왜란 후 17세기)을 근대문학의 기점으로 봤다는 점이다.
    조동일이 17~19세기에 걸친 긴 시간을 ‘근대로의 이행기’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완간 당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창작과 비평’에 기고한 김흥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필시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의 근대를 서구문학의 이식, 영향으로써 설명하려는 타율적 문학사관으로부터 벗어나 조선 후기 이래의 내재적 발전 동력을 부각시키고자 한 서술의도 때문일 것이다.” 김흥규는 이에 덧붙여 ‘통사’ 5권 전체를 관통하는 서술 지표를 문학사의 “내발적, 자생적 동력을 중시한다는 지표”라고 평했다.(김흥규의 ‘비평적 연대기와 역사인식의 차이’)



    국학계의 한국사 시대구분 논의

    김흥규의 해석 초점은 ‘내재적 발전론’(내발론)에 있다. 내재적 발전론이란 무엇인가. 한국사의 근대가 구한말 외부 충격에 의해 시작됐다는 ‘타율성론’과, 그전까지 한국사는 진보하지 못하고 정체해 있었다는 ‘정체성론’, 즉 일제 식민사관의 두 대표 논리를 부수고 한국사의 발전 동력은 자체 내에 있었으며 조선 후기 그 맹아가 움틈으로써 한국사의 ‘자생적 근대’가 시작됐다는 이론이다. 말하자면 조동일에게는 한국문학사의 발전 동력을 조선사 내부에서 찾을 필요가 있었고, 그 고민의 결과로 나온 시기 범주가 ‘이행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동일이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를 중세, 근대와 동등한 역사 구분의 범주로 사용한 점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조동일과 김윤식이 한국문학사 서술을 착안하고 고민하던 바로 그 시기인 1960년대 중반은 국사학계에 이미 내재적 발전론이 대두하면서 한국사의 시대구분 문제가 뜨거워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국사학계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시대구분 문제에 대한 ‘정리’를 시도한 것이 67년이었다. 그해 12월 한국경제사학회 주최로 열린 심포지엄(‘한국사의 시대구분 문제’)과 이듬해 3월 한 차례의 대토론회가 있었다. 심포지엄과 토론에 참여한 학자들은 근대 기점에 대한 의견 차이에도 공통되게 개항(외세의 개입) 이전에 자본주의 맹아 혹은 자생적인 근대화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이 심포지엄에서 천관우는 다음과 같이 새로운 시대구분 방법을 제안했다. “결론부터 제시한다면 중세, 근대 사이에 과도기를 두어 그 수백 년간을 시대구분상의 일시기(一時期)로 간주하되, 이 과도기의 시발을 이르면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선조 말), 늦으면 18세기 후반기(영조 후기-정조 대)로부터 잡고, 이 과도기의 종말을 일본 강점의 종료와 민족해방(1945), 아니면 3·1운동(1919)으로 잡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중략) 아무튼 ‘중세-근대 과도기’를 고대, 중세, 근대와 함께 우선 한국사의 한 시기로 설정해둔다는 것이 골자이다.”(천관우의 ‘한국사상(韓國史上)의 중세 근대의 계선(界線)’)
    요컨대 근대의 구체적인 ‘기점’을 정하는 문제에서 천관우는 문제를 정면 돌파해 아예 ‘과도기(이행기)’를 고대, 중세, 근대와 같이 ‘공인된’ 시기로 둘 것을 제안한 것이다. 조동일은 천관우의 구분법을 받아들여 훗날 ‘통사’의 시대구분으로 삼았다.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를 두고 그 시기를 조선 후기(임란 후)로부터 1919년 3·1운동에 이르는 기간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조동일은 생전의 천관우를 항상 높이 평가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에서 근무한 바 있는 이재범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편찬부장 조동일 교수는 “우리나라에 선생이라고 한다면 과연 누굴까? 천관우 선생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한다(이재범의 ‘호쾌한 대세적 판단의 역사 강의’). 조동일에게 끼친 천관우의 학문적 영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다른 한 권의 문학사 서술인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1973)도 내재적 발전론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이 한국사 내부에서 근대를 보고자 하는 ‘강박’은 좀 더 직접적이었다. 책의 맨 첫 장(章)의 주제가 ‘시대구분론’이었다. 한국 근대문학의 역사를 기술한 이 책은 영·정조 시대를 시작으로 삼았다. 한국 근대문학의 시작을 그 시기로 본 것이다.
    조동일, 김윤식, 김현 등 4·19세대 문학사가들, 그리고 이들이 참고했던 윗세대 한국 사학자들은 확실히 새로운 민족사 서술에 강박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고심 끝에 내놓았던 시대구분법은 개인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국문학이든 국사학이든 ‘국학’, 말뜻 그대로 ‘국가와 민족의 학문’ 수립에 강박적으로 몰두하던 이들이 서로를 참조하며 만들어가던 것들, 그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바야흐로 새로운 민족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한국적인 것’을 찾아서

    1960년대 새로운 민족주의는 이전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 확실히 50년대 한국 민족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서구(미국)를 모델로 하는 민족주의였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 과거를 버리자는, 50년대 ‘사상계’ 등으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의 시대정신은 서구지향적인 것이었다. 서구적 가치는 곧 세계적 보편가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됐고, 따라서 우리도 어서 서구적 가치를 체화해 당당히 세계의 일원이 되자는 생각이었다. 민족의 앞날을 고민한다는 차원에서 겨우 ‘민족주의’라 할 수 있었다.
    1960년대 들어 분위기가 갑자기 변했다. 저널리즘과 대학 사회에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63년, 한국문화에 대한 이어령의 에세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수십만 부씩 팔려나갔다. 대학에서는 ‘한국사상사’류 과목이 인기를 끌었고, 60년대 중반이 되면 한국학과 한국문화가 학계 및 문화계 전반의 화두가 됐다. 사회 전반에서 민족담론이 활성화되고 민족정체성을 발견하려는 각종 움직임이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대학가의 ‘민족 붐’은 대단했다. 대학문화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판소리, 탈춤 동아리가 처음으로 제 모습을 보인 것도 이때부터였다. 국학계의 내재적 발전론도 결국 민족주의적 맥락에서 등장한 논리였다.
    그런데 이 새로운 민족주의의 대두는 1964년부터 본격화된 한일회담에 대한 사회 전반의 반감과도 맞물려 있었다. 공화당 정권의 외국자본 확보 과정에서 불거진 한일회담 반대 데모는 64년 6·3사태 등 정권과 비판 진영 간 첨예한 대립을 낳는데,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진영의 주된 논리 역시 민족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란을 남기고 있듯이, 한일회담이 ‘전쟁에 대한 배상’ 차원이 아니라 ‘원조 내지 차관’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당시에도 심각하게 문제시됐다. 미국 시각에서 한일 국교정상화는, 일본을 아시아에서 미국의 재정적 부담을 덜어줄 파트너로 기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에 따라 한일협정은 미국과 일본이 합작하는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 재편이라는 차원에서 진행됐다. 학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오랜 식민통치의 잔재를 청산하고자 했던 새로운 민족주의의 흐름은, 이런 방식의 국교정상화를 굴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국가 정책과 마찰을 일으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아군과 적의 경계를 흩뜨리다

    그런데 이 새로운 민족주의는, 묘하게도 통치자의 지배 논리이면서 동시에 그에 대항하는 세력의 저항 논리로 함께 기능했다. 사정은 1963년 박정희와 윤보선이 경합했던 대통령선거(대선) 때로 소급된다. 군정세력을 대표하는 박정희와 제2공화국 잔존 세력이던 윤보선 사이에 있었던 당시 대선의 대립 구도는 민족적 민주주의(박정희) 대 서구적 민주주의(윤보선)로 이해됐다. 60년대 들어 일기 시작한 민족주의 붐은 이 선거 구도에서 박정희의 우위를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한일회담 과정이 노출되기 전이었고, 지식인들은 민족주의가 정권에 악용될 위험성을 한편으로 경계하면서도, 대세가 서구식 민주주의에서 민족주의로 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군정 초기 쿠데타 세력의 민족주의 성향에 대해 상당히 우려하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1963년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내세우는 ‘민족적 민주주의’가 공산주의자의 용어라는 비판이 당대에도 있었다. 이집트 나세르 식의 제3세계 민족주의와 유사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모든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박정희 정권의 민족주의 담론에서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모두 서구의 것이며 따라서 반민족적이라는 논리였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서구식 민주주의는 부정될 수 있었으며 반공은 더욱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더구나 전쟁의 책임이 북에 있었으므로 민족을 분열시킨 공산주의는 민족주의의 가장 악한 적일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는 민족을 압살하는 ‘악마’였다. 따라서 정권에 비판적인 세력에 ‘용공’을 씌우기만 하면 문제를 깨끗이 해결할 수 있었다.
    요컨대 박정희 정권은 민주주의적 가치를 억압하는 무기로 민족주의(‘한국적 가치’)를 활용한 것이다. 또한 ‘사회 정화’ ‘퇴폐문화 일소’의 논리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억압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지배 논리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대립시키고, 더불어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도 대립시켰다. 이에 따라 ‘민족’을 위해 ‘자유’를 희생시키는 논리의 구축이 이뤄졌다.
    1960년대 정치권과 학계, 사회문화 전반에서 벌어졌던, 민족주의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논의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분명 1960~70년대 국학계의 연구 일반은 민족주의의 자기장 안에 놓여 있었다. 공화당 정권의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논리 역시 민족주의였다. 여기에 더해 정권의 통치 논리도 민족주의였다. 한 가지 더 있다. 남쪽과 대립하는 북한의 국가 이데올로기도 역시 반미 ‘민족주의’였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국학계에서 내재적 발전론이 확립되던 시기에 국민교육헌장 공포(1968) 등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도 함께 확립됐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말하는 것과, 한국사 안에서 자생적 근대화의 맹아를 찾는 작업이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민족주의는 ‘양날의 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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