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다. TV에서는 매일 무엇인가를 기념하고 축하한다. 영화 성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워낙 성수기다 보니 대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무난하고 보편적인 이야기가 넘쳐난다. 특별히 개성적이거나 대단히 전문적인 이야기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저 그렇고 비슷비슷한 이야기에 식상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 말이다.
‘그을린 사랑’으로 세계 영화계에 인장을 남기는 데 성공한 빌뇌브 감독은 호기심을 조율하는 데 탁월하다. 그는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이유가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믿고 있다. ‘그을린 사랑’에서 그 질문이 ‘어머니는 왜 이상한 유언을 남겼을까’였다면, ‘시카리오’에서는 ‘도대체 왜 그들은 케이트(에밀리 블런트 분)를 팀원으로 불러들인 것일까’이다.
미국 연방수사국(FBI) 요원 케이트는 버려진 가옥에서 수십 구의 시체를 발견한다. 폭발물이 매설돼 있어 현장에서 경관 2명도 잃는다. 버려진 시체는 멕시코인으로 추정되는 자들로, 이런 사건은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니다. ‘카르텔’이라고 부르는 남미에 기반을 둔 조직 범죄자들이 서로를 응징하고 경고하는 수단으로 매일 잔혹한 방식의 살인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케이트는 소속도 정체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호출되고, 정확히 전모를 파악할 수도 없는 일에 연루된다.
뭐가 뭔지 모르기는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케이트가 영문도 모르고 이상한 팀에 끼고 목적지도 모른 채 비행기에 오르는 것처럼, 관객 역시 케이트의 눈을 카메라 삼아 이 찜찜한 세계에 초대된다. 천천히 목을 조여 오는 어떤 기미처럼, 영화는 짐작은 되지만 도무지 알기 어려운 어떤 세계의 그림을 하나씩 맞춰간다. 팀의 중요 구성원인 맷(조시 브롤린 분)이나 알레한드로(베니시오 델 토로 분)도 어디에 속해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케이트는 사건의 정황을 알고 싶어 하는데, 어떤 관점에서 보면 케이트의 호기심조차 그들이 짜놓은 거대한 그림 퍼즐 중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뭔가 호기심 많고 정의감 넘치는 사람이 퍼즐을 완성하는 중요한 조각으로 필요해 보이는 것이다.
급기야 전모가 밝혀지면 뒷맛은 무척 씁쓸하다. 굉장히 정의로운 일을 한다고 믿었던 케이트의 사명감이 유치한 공명심에 불과했음도 드러난다. 세상은 정의로운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만약 정의가 필요하다면 그것도 수단의 일부로 요구될 뿐이다.
사실 이런 정황은 꼭 영화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세상은 대개 옳은 일보다 필요한 일로 구성돼 있다. 영화 ‘시카리오’는 이처럼 필요한 일이 옳은 일이 되는 세상 풍경을 매우 건조하고 긴장감 있게 구성해 보여준다.
정의로운 여성이 음모의 한가운데 들어선다는 점에서 ‘시카리오’의 리듬은 영화 ‘제로 다크 서티’를 연상케 한다. 다만 ‘제로 다크 서티’가 마침내 이뤄질 어떤 환희의 순간을 마련해두고 있다면 ‘시카리오’는 끝까지 그런 기대는 낭만이자 환상일 뿐이라며, 관객을 세계의 벼랑 끝으로 떠민다.
한 명의 영웅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는 세계는 순진하면서도 낭만적이다. 빌뇌브 감독의 세계는 그런 점에서 어른의 세계다. 꿈과 희망에 속아서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필요와 이유로 지탱되는 그런 세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