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2일 오후 서울 강남구 숙명여고에서 열린 한 입시학원의 ‘2016 최상위권 재수성공전략 설명회’ 전경.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행사장을 가득 채웠다.
한 방송사가 광고인 이제석 씨를 인터뷰하며 자막으로 내보낸 문구다. 지방대 출신 ‘루저(loser·패배자)’가 세계 유명 광고제를 석권하는 ‘천재’로 거듭났다는 내용이었다. 방송 직후 “지방대를 졸업하면 다 루저라는 뜻이냐”는 시청자 항의가 쏟아졌고, 해당 방송사는 공식 사과해야 했다.
하지만 ‘루저’라는 표현은 사실 이씨가 펴낸 자전 에세이 ‘광고천재 이제석’(학고재)에 먼저 등장했다. 그가 스스로를 ‘나는 루저였다. (지방대 미대를) 과 수석으로 졸업하고도 간판쟁이밖에 할 게 없었다’고 소개한 대목에서다. 자기 자신도, 그리고 세상도 지방대 졸업자에게 루저라는 낙인을 찍는 나라, 대한민국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출신 학교에 따라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사회에서 입시전쟁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루저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하고, 첫 전투에서 패배하면 다시 한 번 전장에 나서야 한다. 201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치른 9월 2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주관 전국연합학력평가(모의평가) 응시자의 15.6%(8만4156명)는 고교 졸업생(검정고시생 포함)이었다. 한 번 이상 입시에 ‘참전’한 이들일 개연성이 높다.
반수, 재수, 삼수를 넘어 N수생
지난해 수능 응시자 중 졸업생 비중은 22.39%(13만3213명)로 이보다 더 높았다. 입시전문가들은 올해도 실제 수능을 치르는 졸업생 비율은 2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서너 번씩 입시를 치르는 이른바 N수생(이하 재수생으로 통칭)이다.
대학입시에 여러 번 도전하는 이가 많다 보니,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신입생 가운데 재수생 비율은 일찌감치 30%를 넘어섰다. 서울대의 경우 2014학년도 정시모집 합격자 중 재수생 수가 사상 처음으로 고교 재학생 수보다 많아 화제가 됐다. 서울대 인문대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요즘은 나이 많은 신입생이 워낙 많아 신입생끼리도 첫인사를 할 때 나이를 묻는 게 예의”라고 밝혔다.
문제는 이러한 재수 열풍이 갖가지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게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다. 재수학원 교육비는 일반적으로 대학등록금보다 훨씬 비싸다. 기숙학원에서 재수를 하는 데는 연 3500만 원, 집에서 통학하며 일반 학원에 다닐 경우에는 연 2000만 원 안팎이 든다.
대학에 적을 걸어두고 다시 한 번 대입을 준비하는 이른바 반수생의 입시비용도 만만치 않다. 요즘 상당수 대학은 입학 첫 해 휴학을 금지한다. 학생 이탈을 막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많은 재수생이 대학등록금을 내고 추가로 학원 수강료를 부담하며 입시전쟁에 나선다. 교육부가 2013년 발표한 ‘중도 탈락 대학생의 경제·사회적 비용 현황(2012년 기준)’에 따르면 대학에 입학했다 중도에 포기하는 학생은 연간 14만 명 수준. 이들이 1인당 부담한 등록금, 입학금, 교재비 등은 800만 원에 달한다. 학원업계에서는 이들 중 절반 정도가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입시공부에 뛰어드는 것으로 보고 있다. 매년 6만~7만 명 수준으로, 전체 재수생의 약 절반이 반수생이라는 추산이다.
이들 반수생을 포함한 재수생 한 명이 연간 2000만 원 정도 입시비용을 쓴다고 가정하면, 지난해 통계를 기준으로 약 13만 명이 1년간 대입준비에 쓴 돈은 2조6000억 원에 이른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이들의 사회 진출이 한 해 늦어짐으로써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도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타워스왓슨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대졸 초임은 월 2228달러(약 265만 원). 연봉으로는 약 3180만 원이다. 교육부가 발표한 2013년 대졸자 평균 취업률은 59.3%였다. 이 수치를 지난해 재수생 수 약 13만 명에 곱하면 대략 2조4500억 원이 된다. 재수생이 1년간 직접 쓰는 비용과 재수로 인해 사회에 늦게 진출함으로써 덜 벌게 되는 수입을 더하면, 연간 5조 원 이상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셈이다.
1월 15일 성균관대 편입시험을 치른 뒤 정문을 나서고 있는 학생들. 학벌 서열 사회에서 입시에 ‘실패’한 학생들은 재수, 편입 등 다른 길을 찾는다. 성균관대의 2015학년도 편입에는 모집인원 124명에 3959명이 몰려 경쟁률 31.69 대 1을 기록했다..
눈여겨볼 것은 재수생이 이만큼 비용을 들여서 하는 ‘공부’가 정작 사회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다. 이영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학생들이 1년간 입시공부를 더한 끝에 얻으려 하는 건 실력이 아니라 학벌”이라며 “학벌은 누군가 얻으면 다른 사람은 잃을 수밖에 없는 ‘제로섬 게임’의 대상이란 점에서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재수는 득 될 게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학생과 부모에게는 학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좋은 대학을 나오면 ‘위너(winner)’로 평가받고, 취업과 연봉 책정 등에서 이익을 얻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엄기호 덕성여대 겸임교수(문화인류학 박사)는 저서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에서 우리 사회의 이런 특징을 비판하며 ‘(한국에서)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는 곧 그 사람 인생 전체의 운명이 된다’고 꼬집었다.
게다가 한 번 정해진 대학 서열은 좀처럼 변하지도 않는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11년 펴낸 ‘고학력화의 사회경제적 성과와 한계’에 따르면 수능이 처음 시작된 1994년부터 2009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수능 점수를 기준으로 한 대학 및 전공의 서열 변화가 거의 없다. 지방 명문대 서열이 하락하는 추세가 나타났을 뿐, 최상위권 종합대 서열은 불변이다. 한 입시전문가는 이에 대해 “자연계의 경우 KAIST(한국과학기술원), 포스텍 등 특성화대학이 있고, 전국 36개 대학에 있는 의대로도 최상위권 수험생이 분산돼 ‘학교 줄 세우기’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하지만 인문계는 ‘서연고, 서성한…’ 서열이 고착화해 상위권 학생들이 학벌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재수를 선택하는 비율이 자연계에 비해 높다”고 밝혔다. 이처럼 전국 대학을 전공에 관계없이 한 줄로 늘어세우는 ‘서연고’ 주문은, 누구나 대학에 갈 수 있는 시대에도 연간 10여만 명을 재수에 매달리게 만드는 주범으로 꼽힌다.
한국교육개발원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재수생 증가가 사회 문제로 여겨지기 시작한 건 1970년대부터다. 70년 당시 대입시험이던 예비고사 응시자 중 재수생 비율이 37.86%에 달했고, 80년대까지도 이 비율은 30%를 웃돌았다. 대학입학 정원이 적어 사회 전반의 고등교육 수요를 충족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그러나 현재는 상황이 다르다. 김영삼 정부가 1995년 시작한 이른바 ‘5·31 교육개혁’으로 대학 수와 대학 정원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대학진학률은 95년 51.4%에서 2000년 68%, 2005년 82.1%로 가파르게 높아졌다. 2003년에는 대학 정원이 고교 졸업자 수를 넘어서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재수생 수가 줄지 않는 건 이제 대학에 가는 것보다 ‘어느’ 대학에 가느냐가 중요해진 탓이다.
1981학년도 대학입학 예비고사 모습. 1980년대에는 재수생 비율이 예비고사 응시생의 30%를 넘어서 사회 문제가 됐다.
2010년 한국개발연구원이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8.1%는 ‘개인의 성공·출세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학벌과 연줄’을 꼽았다. 2006년 조사 당시 응답률 33.8%보다 15%p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반면 같은 질문에 ‘성실성과 노력’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2006년 41.3%에서 2010년 29.7%로 급감했다.
이런 상황에서 재수는 여건만 된다면 한 번쯤 해봐도 좋을 ‘합리적 도전’이 됐다. 2013년 한국개발연구원이 펴낸 ‘노동시장 선호와 선별에 기반한 입시체제의 분석과 평가’ 보고서를 보면 ‘우등생’이 더 많이 재수를 하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2011학년도 수능 수리영역 성적을 기준으로 상위 1~10% 학생 중 재수생이 40.2%인 반면, 하위 81~90%의 학생 중 재수생 비율은 8%에 불과했다.
재수를 하는 학생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 출신일 개연성이 높다. 새정치민주연합 박홍근 의원이 2014학년도 고교별 수능 성적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수능 응시생 가운데 재수생 비율이 가장 높은 지방자치단체는 서울 강남구(74.3%)였다. 서울 양천구 54.8%, 경기 과천 54.5%, 서울 종로구 48.4%, 서울 송파구 47.7%가 뒤를 이었다.
지난해 수능 응시자의 졸업생 비율도 서울 강남권 자율형사립고(자사고) 90%, 경기지역 외국어고 79%, 서울 강남권 일반고 74%, 지방 자사고 76%, 경기지역 일반고 64%, 서울 강북권 일반고 39%, 지방 일반고 23% 순으로, 서울 강남권 출신 고교 졸업생과 자사고 또는 외국어고 출신자의 재수 비율이 높다. 학생의 성적과 부모의 경제적 뒷받침 등이 재수를 가능케 하는 요인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결과다.
이런 특징은 한국교육개발원의 ‘한국교육종단연구 2005’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국교육개발원이 2005년 중학교에 입학한 학생 6908명의 교육발달 상황을 추적 조사해 발표하는 이 연구의 6차년도(고3) 자료부터 8차년도(고교 이후 2년 차) 자료까지를 수집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학생 가정의 월평균수입이 800만~1000만 원인 경우 32.0%가 재수를 했다. 반면 가정 월평균수입이 200만 원 미만인 응답자 가운데는 9.5%만 재수를 했다.
아버지 학력도 자녀의 재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가 박사인 경우 28.8%가 재수를 했고, 최종 학력이 대졸 및 석사인 경우에도 재수 비율이 각각 23.7%, 20.2%였던 반면 아버지 학력이 고졸 미만인 경우 자녀가 재수를 한 비율은 7.5%에 불과했다.
재수생 중 상당수는 ‘또 한 번의 도전’을 통해 명문대-인(in)서울대-수도권대-지거국(지방거점국립대)-지잡대(지방의 잡스러운 대학)-전문대 등으로 이어지는 ‘학벌 사다리’에서 한 칸 위로 올라서고, 빈 자리는 또 다른 이가 채울 것이다. 그렇게 대학 서열은 더욱 공고해진다. 재수조차 하지 못한 채 사다리 아래 칸에 남는 이들은 상실감을 곱씹게 되고, 재수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고 임진창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1975년 11월 열린 ‘한국 사회구조와 재수생 문제’ 토론회에서 “재수생 문제가 안고 있는 개인적, 국가적 손실은 막중하다”며 해결 방법으로 “간판(학력)이 아닌 능력(자격) 본위로 사람을 평가할 것”을 제안했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능력(자격)만 있으면 얼마든지 취직할 수 있으며 승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대학교육만이 상층사회로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아니라는 사회적 인식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게 임 교수 의견이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풀리지 않는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