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학 PD는 왜 죽었을까. 7월 23일 김 PD가 경기 성남시 분당구 한 고시원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뒤 지금까지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사람은 없다.
그의 장례식장엔 장례화환이 빼곡하다 못해 보낸 이의 이름이 적힌 화환 리본이 벽 한쪽을 가득 채웠다. ‘모래시계’ ‘여명의 눈동자’ 등 한국 방송 드라마의 새 지평을 열었던 이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 정도로 컸던 것이다. 그만큼 그의 죽음에 대한 궁금증도 컸다.
김종학 PD의 죽음에 대한 단초를 잘 아는 이 가운데 한 명은 박창식(54·사진) 새누리당 의원이다. 김 PD 장례위원장을 맡았던 박 의원은 김 PD와 20여 년 동안 함께 긴밀하게 일한 사람이다. 김종학 프로덕션 대표를 지낸 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회장이자 비례대표로 제19대 국회의원이 된 그가 언론에 김 PD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이다.
김 PD를 사망 보름 전 만나 차기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는 박 의원은 “일할 때만 독종이고 평소 여린 분이라, 드라마 ‘신의’ 배우에 대한 출연료 미지급에 따른 소송이 부담된 것 같다”며 말문을 열었다. 김 PD는 ‘신의’ 제작 운영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배임, 횡령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왔다.
완벽함 추구로 시대 풍미
▼ 김 PD의 장례위원장을 맡은 걸 보면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
“1987년 이맘때 김 PD를 만났다. 당시 드라마 ‘인간시장’을 찍을 때 나는 MBC 비정규직으로 연출부 일을 시작했다. 조연출 겸 제작 프로듀서로 대본이 나오면 촬영지 고르고, 예산 짜고, 엑스트라 요청하고, 출연료를 정산했다. 그러고 나서 김 PD 밑에서 ‘제5열’ ‘선생님 우리 선생님’ ‘우리 읍내’ ‘여명의 눈동자’를 찍었다. 이후 김 PD가 MBC를 나와 프리랜서로 SBS에서 최고 대우를 받으며 드라마 ‘모래시계’를 만들 때도 함께 일했다. ‘태왕사신기’를 만들고 2009년까지 같은 회사(김종학 프로덕션)에 있었으니 20년 동안 한솥밥을 먹었다.”
▼ 김 PD의 사망 원인을 드라마 외주제작사의 열악한 현실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방송사가 외주제작사에게 온전한 제작비를 주지 않아 외주제작사가 피해를 본다는 거다. 물론 방송사가 외주제작사에게 현실적인 제작비를 줘야 한다. 노력에 따른 보상을 해줘야 한다. 나도 관련법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사인은 아니라고 본다. 드라마 ‘신의’는 신의 문화산업전문회사가 제작한 것이다. 드라마 출연진과 스태프가 임금을 받지 못했다면 그 책임은 신의 문화산업전문회사 경영진에게 있다. 그런데도 회사 구성원인 김 PD가 유명하다는 이유로 공격 대상이 됐고, 소송에 휘말렸다. 법적 책임이 없는 김 PD에게 책임을 지운 것이다. 김 PD는 법정에 가서 그런 부당함을 따질 만한 사람이 못 된다. 안타까우니까 다른 드라마 제작비를 미리 받아 미지급금을 줄 사람이다.”
▼ 김 PD의 작품이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스튜디오에서 카메라 몇 대로 촬영했다. 하지만 김 PD는 스튜디오가 아닌 현장에서 찍었다. 촬영 속도가 느려지고 예산도 늘었지만, 그 덕에 생동감 넘치는 드라마를 만들 수 있었다. 드라마 세트장을 처음 만든 것도 김 PD이고,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세트장을 지은 것도 김 PD일 거다.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 PD 스스로 대역을 한 적도 많다. 삼청교육대 조교 목소리는 김 PD 본인의 목소리다. 심지어 엑스트라에게도 철저했다.”
▼ PD가 완벽을 추구하면 촬영진, 연기자가 불만을 터뜨리지 않나.
“왜 아니겠나. 스태프가 5개를 준비할 수 있다면 김 PD 본인은 7개를 기대하니까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밤을 새워서라도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했다. 나는 김 PD가 동굴이 필요하다고 하면 동굴을 파서 만들어놓고, 삼청교육대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런 세트장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때 고생을 하도 해서인지, 당시 만든 드라마를 다시 볼 마음이 없을 정도다. 다들 김 PD와 독종처럼 일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는 ‘김종학 사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의 작품 회고하는 기회 마련
▼ 김 PD와 함께 일한 방송작가 상당수가 그와 다시 작업하는 걸 꺼린다고 들었다. 실제로 김 PD는 송지나 작가 외 다른 작가와 호흡을 맞춘 경우가 드물지 않나.
“그 작가들이 김 PD와 일하면서 얻은 점도 많을 것이다. 실제로 드라마는 4부를 넘기는 게 고비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어렵고 시청자 반응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PD가 보조작가들을 붙여서 이야기에 살을 더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기존 작가의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데, 그런 일을 계기로 오히려 이를 악물고 대성한 작가도 많다. 반면 송 작가는 김 PD와 일하는 스타일이 잘 맞았던 것 같다.”
▼ 김 PD는 ‘모래시계’가 끝난 뒤 송 작가, 이재현 당시 제일제당 상무와 1995년 제이콤을 만들었다. 이후 독립해 98년 김종학 프로덕션을 만들었지만, 무리하게 우회상장한 뒤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2009년 회사를 나왔다. 박 의원은 언제까지 김 PD와 함께 일했나.
“‘태왕사신기’를 만들 때까지다. 김종학 프로덕션이라는 큰 우산 아래 있으면서 한쪽에서는 내가 드라마 ‘이산’ ‘베토벤 바이러스’ ‘하얀거탑’을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김 PD가 태왕사신기 문화산업전문회사를 만들어 ‘태왕사신기’를 연출했다. 문화산업전문회사는 프로젝트 단위의 투자기구로 방송작가, PD, 국내외 투자자가 펀드를 모아 한 드라마에 투자하고,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수익을 나눈 뒤 해산하는 유한회사다. 태왕사신기 문화산업전문회사가 우리나라 1호 문화산업전문회사다. 그런데 ‘태왕사신기’ 때 투자한 만큼 수익을 얻지 못해 빚이 많아졌다. 게다가 회사 주식이 폭락하자 결국 김 PD가 2009년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났고 나는 남았다.”
▼ 김 PD 추모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어떤 계획을 세웠나.
“김종학 PD상을 제정하거나, 그의 이름을 딴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다. 김 PD와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김종학 사단이 100여 명 되는데, 이들을 주축으로 그의 작품을 회고하는 기회를 마련해도 좋겠다. 후배들이 선배를 잊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의 장례식장엔 장례화환이 빼곡하다 못해 보낸 이의 이름이 적힌 화환 리본이 벽 한쪽을 가득 채웠다. ‘모래시계’ ‘여명의 눈동자’ 등 한국 방송 드라마의 새 지평을 열었던 이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 정도로 컸던 것이다. 그만큼 그의 죽음에 대한 궁금증도 컸다.
김종학 PD의 죽음에 대한 단초를 잘 아는 이 가운데 한 명은 박창식(54·사진) 새누리당 의원이다. 김 PD 장례위원장을 맡았던 박 의원은 김 PD와 20여 년 동안 함께 긴밀하게 일한 사람이다. 김종학 프로덕션 대표를 지낸 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회장이자 비례대표로 제19대 국회의원이 된 그가 언론에 김 PD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이다.
김 PD를 사망 보름 전 만나 차기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는 박 의원은 “일할 때만 독종이고 평소 여린 분이라, 드라마 ‘신의’ 배우에 대한 출연료 미지급에 따른 소송이 부담된 것 같다”며 말문을 열었다. 김 PD는 ‘신의’ 제작 운영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배임, 횡령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왔다.
완벽함 추구로 시대 풍미
▼ 김 PD의 장례위원장을 맡은 걸 보면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
“1987년 이맘때 김 PD를 만났다. 당시 드라마 ‘인간시장’을 찍을 때 나는 MBC 비정규직으로 연출부 일을 시작했다. 조연출 겸 제작 프로듀서로 대본이 나오면 촬영지 고르고, 예산 짜고, 엑스트라 요청하고, 출연료를 정산했다. 그러고 나서 김 PD 밑에서 ‘제5열’ ‘선생님 우리 선생님’ ‘우리 읍내’ ‘여명의 눈동자’를 찍었다. 이후 김 PD가 MBC를 나와 프리랜서로 SBS에서 최고 대우를 받으며 드라마 ‘모래시계’를 만들 때도 함께 일했다. ‘태왕사신기’를 만들고 2009년까지 같은 회사(김종학 프로덕션)에 있었으니 20년 동안 한솥밥을 먹었다.”
▼ 김 PD의 사망 원인을 드라마 외주제작사의 열악한 현실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고(故) 김종학 PD의 빈소가 7월 23일 오후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에 마련됐다. 고 김종학 PD가 남긴 화제의 드라마 ‘모래시계’ ‘여명의 눈동자’ ‘태왕사신기’(오른쪽 위부터).
▼ 김 PD의 작품이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스튜디오에서 카메라 몇 대로 촬영했다. 하지만 김 PD는 스튜디오가 아닌 현장에서 찍었다. 촬영 속도가 느려지고 예산도 늘었지만, 그 덕에 생동감 넘치는 드라마를 만들 수 있었다. 드라마 세트장을 처음 만든 것도 김 PD이고,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세트장을 지은 것도 김 PD일 거다.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 PD 스스로 대역을 한 적도 많다. 삼청교육대 조교 목소리는 김 PD 본인의 목소리다. 심지어 엑스트라에게도 철저했다.”
▼ PD가 완벽을 추구하면 촬영진, 연기자가 불만을 터뜨리지 않나.
“왜 아니겠나. 스태프가 5개를 준비할 수 있다면 김 PD 본인은 7개를 기대하니까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밤을 새워서라도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했다. 나는 김 PD가 동굴이 필요하다고 하면 동굴을 파서 만들어놓고, 삼청교육대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런 세트장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때 고생을 하도 해서인지, 당시 만든 드라마를 다시 볼 마음이 없을 정도다. 다들 김 PD와 독종처럼 일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는 ‘김종학 사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의 작품 회고하는 기회 마련
▼ 김 PD와 함께 일한 방송작가 상당수가 그와 다시 작업하는 걸 꺼린다고 들었다. 실제로 김 PD는 송지나 작가 외 다른 작가와 호흡을 맞춘 경우가 드물지 않나.
“그 작가들이 김 PD와 일하면서 얻은 점도 많을 것이다. 실제로 드라마는 4부를 넘기는 게 고비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어렵고 시청자 반응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PD가 보조작가들을 붙여서 이야기에 살을 더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기존 작가의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데, 그런 일을 계기로 오히려 이를 악물고 대성한 작가도 많다. 반면 송 작가는 김 PD와 일하는 스타일이 잘 맞았던 것 같다.”
▼ 김 PD는 ‘모래시계’가 끝난 뒤 송 작가, 이재현 당시 제일제당 상무와 1995년 제이콤을 만들었다. 이후 독립해 98년 김종학 프로덕션을 만들었지만, 무리하게 우회상장한 뒤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2009년 회사를 나왔다. 박 의원은 언제까지 김 PD와 함께 일했나.
“‘태왕사신기’를 만들 때까지다. 김종학 프로덕션이라는 큰 우산 아래 있으면서 한쪽에서는 내가 드라마 ‘이산’ ‘베토벤 바이러스’ ‘하얀거탑’을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김 PD가 태왕사신기 문화산업전문회사를 만들어 ‘태왕사신기’를 연출했다. 문화산업전문회사는 프로젝트 단위의 투자기구로 방송작가, PD, 국내외 투자자가 펀드를 모아 한 드라마에 투자하고,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수익을 나눈 뒤 해산하는 유한회사다. 태왕사신기 문화산업전문회사가 우리나라 1호 문화산업전문회사다. 그런데 ‘태왕사신기’ 때 투자한 만큼 수익을 얻지 못해 빚이 많아졌다. 게다가 회사 주식이 폭락하자 결국 김 PD가 2009년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났고 나는 남았다.”
▼ 김 PD 추모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어떤 계획을 세웠나.
“김종학 PD상을 제정하거나, 그의 이름을 딴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다. 김 PD와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김종학 사단이 100여 명 되는데, 이들을 주축으로 그의 작품을 회고하는 기회를 마련해도 좋겠다. 후배들이 선배를 잊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