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장례식장엔 장례화환이 빼곡하다 못해 보낸 이의 이름이 적힌 화환 리본이 벽 한쪽을 가득 채웠다. ‘모래시계’ ‘여명의 눈동자’ 등 한국 방송 드라마의 새 지평을 열었던 이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 정도로 컸던 것이다. 그만큼 그의 죽음에 대한 궁금증도 컸다.
김종학 PD의 죽음에 대한 단초를 잘 아는 이 가운데 한 명은 박창식(54·사진) 새누리당 의원이다. 김 PD 장례위원장을 맡았던 박 의원은 김 PD와 20여 년 동안 함께 긴밀하게 일한 사람이다. 김종학 프로덕션 대표를 지낸 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회장이자 비례대표로 제19대 국회의원이 된 그가 언론에 김 PD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이다.
김 PD를 사망 보름 전 만나 차기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는 박 의원은 “일할 때만 독종이고 평소 여린 분이라, 드라마 ‘신의’ 배우에 대한 출연료 미지급에 따른 소송이 부담된 것 같다”며 말문을 열었다. 김 PD는 ‘신의’ 제작 운영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배임, 횡령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왔다.
완벽함 추구로 시대 풍미
▼ 김 PD의 장례위원장을 맡은 걸 보면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
“1987년 이맘때 김 PD를 만났다. 당시 드라마 ‘인간시장’을 찍을 때 나는 MBC 비정규직으로 연출부 일을 시작했다. 조연출 겸 제작 프로듀서로 대본이 나오면 촬영지 고르고, 예산 짜고, 엑스트라 요청하고, 출연료를 정산했다. 그러고 나서 김 PD 밑에서 ‘제5열’ ‘선생님 우리 선생님’ ‘우리 읍내’ ‘여명의 눈동자’를 찍었다. 이후 김 PD가 MBC를 나와 프리랜서로 SBS에서 최고 대우를 받으며 드라마 ‘모래시계’를 만들 때도 함께 일했다. ‘태왕사신기’를 만들고 2009년까지 같은 회사(김종학 프로덕션)에 있었으니 20년 동안 한솥밥을 먹었다.”
▼ 김 PD의 사망 원인을 드라마 외주제작사의 열악한 현실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고(故) 김종학 PD의 빈소가 7월 23일 오후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에 마련됐다. 고 김종학 PD가 남긴 화제의 드라마 ‘모래시계’ ‘여명의 눈동자’ ‘태왕사신기’(오른쪽 위부터).
▼ 김 PD의 작품이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스튜디오에서 카메라 몇 대로 촬영했다. 하지만 김 PD는 스튜디오가 아닌 현장에서 찍었다. 촬영 속도가 느려지고 예산도 늘었지만, 그 덕에 생동감 넘치는 드라마를 만들 수 있었다. 드라마 세트장을 처음 만든 것도 김 PD이고,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세트장을 지은 것도 김 PD일 거다.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 PD 스스로 대역을 한 적도 많다. 삼청교육대 조교 목소리는 김 PD 본인의 목소리다. 심지어 엑스트라에게도 철저했다.”
▼ PD가 완벽을 추구하면 촬영진, 연기자가 불만을 터뜨리지 않나.
“왜 아니겠나. 스태프가 5개를 준비할 수 있다면 김 PD 본인은 7개를 기대하니까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밤을 새워서라도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했다. 나는 김 PD가 동굴이 필요하다고 하면 동굴을 파서 만들어놓고, 삼청교육대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런 세트장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때 고생을 하도 해서인지, 당시 만든 드라마를 다시 볼 마음이 없을 정도다. 다들 김 PD와 독종처럼 일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는 ‘김종학 사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의 작품 회고하는 기회 마련
▼ 김 PD와 함께 일한 방송작가 상당수가 그와 다시 작업하는 걸 꺼린다고 들었다. 실제로 김 PD는 송지나 작가 외 다른 작가와 호흡을 맞춘 경우가 드물지 않나.
“그 작가들이 김 PD와 일하면서 얻은 점도 많을 것이다. 실제로 드라마는 4부를 넘기는 게 고비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어렵고 시청자 반응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PD가 보조작가들을 붙여서 이야기에 살을 더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기존 작가의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데, 그런 일을 계기로 오히려 이를 악물고 대성한 작가도 많다. 반면 송 작가는 김 PD와 일하는 스타일이 잘 맞았던 것 같다.”
▼ 김 PD는 ‘모래시계’가 끝난 뒤 송 작가, 이재현 당시 제일제당 상무와 1995년 제이콤을 만들었다. 이후 독립해 98년 김종학 프로덕션을 만들었지만, 무리하게 우회상장한 뒤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2009년 회사를 나왔다. 박 의원은 언제까지 김 PD와 함께 일했나.
“‘태왕사신기’를 만들 때까지다. 김종학 프로덕션이라는 큰 우산 아래 있으면서 한쪽에서는 내가 드라마 ‘이산’ ‘베토벤 바이러스’ ‘하얀거탑’을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김 PD가 태왕사신기 문화산업전문회사를 만들어 ‘태왕사신기’를 연출했다. 문화산업전문회사는 프로젝트 단위의 투자기구로 방송작가, PD, 국내외 투자자가 펀드를 모아 한 드라마에 투자하고,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수익을 나눈 뒤 해산하는 유한회사다. 태왕사신기 문화산업전문회사가 우리나라 1호 문화산업전문회사다. 그런데 ‘태왕사신기’ 때 투자한 만큼 수익을 얻지 못해 빚이 많아졌다. 게다가 회사 주식이 폭락하자 결국 김 PD가 2009년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났고 나는 남았다.”
▼ 김 PD 추모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어떤 계획을 세웠나.
“김종학 PD상을 제정하거나, 그의 이름을 딴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다. 김 PD와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김종학 사단이 100여 명 되는데, 이들을 주축으로 그의 작품을 회고하는 기회를 마련해도 좋겠다. 후배들이 선배를 잊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