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강제징용된 아버지가 저금한 돈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일본인 시민운동가 우에다 게이시 씨가 유초은행에 강제징용 피해자 38명의 우편저금 현황 자료(표 참고)를 요청한 결과, 그중 13명의 우편저금이 있다는 답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우편저금을 통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저금을 한 위치가 조회됨에 따라 그들의 근무지와 사망지도 파악됐다. 이는 행방불명된 강제징용 피해자를 찾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민간인이 우편민영화법 등의 규정에 따라 우정성의 서류 업무를 승계한 유초은행으로부터 우편저금의 존재를 공식 확인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여 명에 대한 우편저금 보상 진행
우편저금이란 일제와 전범기업이 상당수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임금에서 강제로 일정 금액을 떼어 우편국에 저금한 것을 말한다. 우편저금은 군인과 군속인들의 저금인 ‘군사 우편저금’, 그리고 대만, 사할린, 쿠릴열도 등 외지에서 저금한 ‘외지 우편저금’, 일본 내 회사가 개인의 임금을 개인에게 주지 않고 저금한 ‘통상 우편저금’으로 나뉘는데, 일제가 전시 동원체제를 가동한 1941년 당시 조선총독부 예산의 절반을 이 자금으로 해결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 가운데 우편저금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6월 23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열린 ‘2012 한일과거청산 시민운동 보고대회’에서 우에다 씨가 4월 27일과 5월 31일 두 차례에 걸쳐 유초은행으로부터 받은 우편저금 현황 자료를 발표하면서 “유초은행을 통해 강제징용 피해자 통장이 후쿠오카 우편저금 사무센터에 수만 개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히자 유족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에다 씨가 본격적으로 이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11년이다. 그는 행방불명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존재에 대한 단서를 찾고 싶다는 유족의 바람을 듣고,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의 고바야시 히사모토 사무국장, 곤조 아즈마 민주당 국회의원 등과 함께 일을 추진했다. 진행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유초은행에 전쟁 피해자의 우편저금이 있는지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수집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 사회에서는 그간 우편저금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다. 우편저금이 알려진 것은 2001년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면서다. 당시 보추협은 강제징용 피해자 20여 명의 우편저금 현황을 당시 우정성에 의뢰해 ‘그들의 우편저금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았다. 이에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은 보상금을 신청했지만 우리 정부, 즉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위원회’(이하 강제동원위원회)는 한일협정 이후 대일민간청구권신고에 관한법률을 집행함으로써 그 사안을 마무리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급기야 유족들은 행정심판을 제기해 2011년 ‘대일민간청구권신고에관한법률이 시행됐지만 군사 우편저금은 미수금이므로 정부가 보상해야 한다’는 결정을 받았다. 이후 우편저금 현황 자료를 확보한 유족 20여 명은 우리 정부로부터 일본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적용, 우편저금 1엔을 2000원으로 환산해 최소 20만 원부터 최고 900만 원까지 지급받았다. 하지만 이 일은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강제동원위원회가 우편저금 현황 실태를 조사한다는 점이다. 강제동원위원회는 강제징용자의 명부와 연락처가 담긴 유수명부를 바탕으로 강제징용자의 한국 이름과 창씨개명한 이름, 부대 근무지, 생년월일을 정리해 일본 정부에 2011년 12월 900여 명, 2012년 4월 3300여 명과 5월 2400여 명에 대한 우편저금 자료를 요청했다.
피해자 행방 찾는 단서
하지만 우리 정부는 현재까지 일본 정부로부터 우편저금 현황에 대해 어떤 자료도 받지 못한 상태다. 이에 대해 권기섭 강제동원위원회 심사 3과장은 “워낙 자료가 방대하다 보니 시일이 걸리고 있을 뿐”이라고 해명하면서 “일본 정부가 교차 확인을 거쳐 오류 부분을 한국 정부에 확인해오는 것만 봐도 분명히 조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면서 그는 “올해 말로 활동이 종료될 것으로 보이는 강제동원위원회가 없어지더라도 이 일을 승계한 부처가 일본 정부로부터 우편저금 현황 자료를 받으면 피해자 유족이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19조에 따르면 ‘위원회의 존속기간이 만료되면 당시의 위원회의 소관 사무는 행정안전부 장관이 이를 승계한다’는 것이 적시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의 이런 미온적인 반응에 유족은 분통을 터뜨린다. 특히 2001년 20여 명의 우편저금 현황을 협회 차원에서 파악한 뒤 줄곧 그 업무를 강제동원위원회가 진행할 것으로 생각해 그 일을 담당하지 않았던 이희자 보추협 대표는 “더는 정부를 믿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면서 “보추협에서라도 적극 조사하겠다”고 말했다.
“우에다 씨가 유초은행에 확인한 결과, 유초은행은 한국 정부가 1차적으로 의뢰한 900여 명에 대한 자료 조사를 끝내 일본 정부에 제출했다는데, 한국 정부는 그 자료를 받은 바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 그 자료는 도대체 어디에 있나. 그리고 유초은행은 한국 정부가 2차, 3차로 보냈다는 공개 요청서도 받은 적이 없다는데 도대체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나. 이렇게 일이 지연되면 우편저금으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행방을 찾는 유족만 애가 탄다. 정부가 모든 우편저금에 대한 자료를 받기 어렵다면, 우편저금 중 전산화돼 쉽게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군사 우편저금에 대해서라도 먼저 자료를 달라고 요청하라.”
20여 명에 대한 우편저금 보상 진행
우편저금이란 일제와 전범기업이 상당수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임금에서 강제로 일정 금액을 떼어 우편국에 저금한 것을 말한다. 우편저금은 군인과 군속인들의 저금인 ‘군사 우편저금’, 그리고 대만, 사할린, 쿠릴열도 등 외지에서 저금한 ‘외지 우편저금’, 일본 내 회사가 개인의 임금을 개인에게 주지 않고 저금한 ‘통상 우편저금’으로 나뉘는데, 일제가 전시 동원체제를 가동한 1941년 당시 조선총독부 예산의 절반을 이 자금으로 해결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 가운데 우편저금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6월 23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열린 ‘2012 한일과거청산 시민운동 보고대회’에서 우에다 씨가 4월 27일과 5월 31일 두 차례에 걸쳐 유초은행으로부터 받은 우편저금 현황 자료를 발표하면서 “유초은행을 통해 강제징용 피해자 통장이 후쿠오카 우편저금 사무센터에 수만 개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히자 유족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에다 씨가 본격적으로 이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11년이다. 그는 행방불명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존재에 대한 단서를 찾고 싶다는 유족의 바람을 듣고,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의 고바야시 히사모토 사무국장, 곤조 아즈마 민주당 국회의원 등과 함께 일을 추진했다. 진행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유초은행에 전쟁 피해자의 우편저금이 있는지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수집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 사회에서는 그간 우편저금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다. 우편저금이 알려진 것은 2001년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면서다. 당시 보추협은 강제징용 피해자 20여 명의 우편저금 현황을 당시 우정성에 의뢰해 ‘그들의 우편저금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았다. 이에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은 보상금을 신청했지만 우리 정부, 즉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위원회’(이하 강제동원위원회)는 한일협정 이후 대일민간청구권신고에 관한법률을 집행함으로써 그 사안을 마무리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급기야 유족들은 행정심판을 제기해 2011년 ‘대일민간청구권신고에관한법률이 시행됐지만 군사 우편저금은 미수금이므로 정부가 보상해야 한다’는 결정을 받았다. 이후 우편저금 현황 자료를 확보한 유족 20여 명은 우리 정부로부터 일본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적용, 우편저금 1엔을 2000원으로 환산해 최소 20만 원부터 최고 900만 원까지 지급받았다. 하지만 이 일은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강제동원위원회가 우편저금 현황 실태를 조사한다는 점이다. 강제동원위원회는 강제징용자의 명부와 연락처가 담긴 유수명부를 바탕으로 강제징용자의 한국 이름과 창씨개명한 이름, 부대 근무지, 생년월일을 정리해 일본 정부에 2011년 12월 900여 명, 2012년 4월 3300여 명과 5월 2400여 명에 대한 우편저금 자료를 요청했다.
피해자 행방 찾는 단서
우에다 게이시 씨가 유초은행으로부터 일제에 강제징용된 조선인 13명의 우편저금 사실을 확인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올해 말로 활동이 종료될 것으로 보이는 강제동원위원회가 없어지더라도 이 일을 승계한 부처가 일본 정부로부터 우편저금 현황 자료를 받으면 피해자 유족이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19조에 따르면 ‘위원회의 존속기간이 만료되면 당시의 위원회의 소관 사무는 행정안전부 장관이 이를 승계한다’는 것이 적시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의 이런 미온적인 반응에 유족은 분통을 터뜨린다. 특히 2001년 20여 명의 우편저금 현황을 협회 차원에서 파악한 뒤 줄곧 그 업무를 강제동원위원회가 진행할 것으로 생각해 그 일을 담당하지 않았던 이희자 보추협 대표는 “더는 정부를 믿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면서 “보추협에서라도 적극 조사하겠다”고 말했다.
“우에다 씨가 유초은행에 확인한 결과, 유초은행은 한국 정부가 1차적으로 의뢰한 900여 명에 대한 자료 조사를 끝내 일본 정부에 제출했다는데, 한국 정부는 그 자료를 받은 바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 그 자료는 도대체 어디에 있나. 그리고 유초은행은 한국 정부가 2차, 3차로 보냈다는 공개 요청서도 받은 적이 없다는데 도대체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나. 이렇게 일이 지연되면 우편저금으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행방을 찾는 유족만 애가 탄다. 정부가 모든 우편저금에 대한 자료를 받기 어렵다면, 우편저금 중 전산화돼 쉽게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군사 우편저금에 대해서라도 먼저 자료를 달라고 요청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