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 중인 환자가 앉아 있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비좁은 노숙인무료진료소. 4평 남짓한 공간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발가락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피부가 찢겨져 나간 30대 남성이 고함을 지르며 진료소 안으로 뛰어들었다. 울부짖는 그를 진료용 의자에 앉히자마자 한쪽 다리가 피범벅이 된 또 다른 남성이 들이닥쳤다. 드라이버로 자신의 무릎을 찍었다는 그는 진료소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을 쳤고, 그 옆에서는 한 알코올 중독자가 위장이 아프다며 ‘뗑깡’을 부렸다. 고혈압 때문에 약을 타러 온 쪽방 거주 40대 여성 등 다른 환자 다섯 명은 요란한 세 환자 ‘덕분에’ 구석으로 몰려 어정쩡하게 서 있었고, 밖에는 5~6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8월2일 오후 2시경 서울역 노숙인무료진료소의 상황이었다.
“기본적으로 4~5명의 환자들은 항상 대기하고 있다. 진료소가 문을 여는 오전 10시나 점심시간 후, 야간진료 때는 15명 이상이 한꺼번에 몰린다. 그러면 안에 들어오지도 못한 채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지금과 같은 응급상황이라도 벌어진 때에는 줄을 선 사람들이 20여명에 이를 때도 있다.” 노숙인무료진료소 장수미 팀장의 이야기다.
대기의자도 4개뿐 … 줄 서서 기다리는 형편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이하 지원센터)가 운영하는 서울역 노숙인무료진료소(이하 진료소)는 4평 남짓하다. 이 비좁은 공간에서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 4명의 상근 직원이 하루 평균 120명, 월 평균 2400명의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다. 그러나 진료소는 4명의 직원만으로도 꽉 찬 느낌을 줬다. 실제로 진료실에는 환자를 눕힐 만한 공간도 없었고, 4인용 대기의자에는 항상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 진료를 마친 후 투약 방식에 대한 설명은 진료소 밖으로 나와 들어야 했다. 진료소에서 만난 50대 중반의 당뇨병 환자 김모 씨는 “공짜로 치료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아파 죽을 것 같은데 오랫동안 줄 서서 기다릴 때는 화가 난다”고 말했다.
불안정한 잠자리와 불규칙한 식생활로 인해 노숙인들의 건강 상태는 매우 좋지 않다. 지원센터 이범승 과장은 “노숙인의 90% 이상이 당뇨나 혈압·간질환 등 만성질환을 앓고 있고, 대부분 알코올 의존 상태가 심각하다”고 했다. 실제로 2005년 3월 서울시에서 한 거리노숙인 합동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자 548명 가운데 64.2%가 알코올 의존 증상을 보이고 있고, 후진국 병이라 할 수 있는 결핵도 조사 대상자 333명의 10%인 32명이 앓고 있는 것으로 판명됐다. 2004년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매년 300~400명의 노숙인이 질병과 외상, 동상 등의 이유로 거리에서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8월3일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관계자들과 노숙인 200여명이 서울역 광장에 모여 ‘서울역 옛 주한미군 여행장병안내소를 노숙인무료진료소로 사용하게 해달라’는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우선 진료실과 대기실이 한 공간에 있어 환자의 사생활이 전혀 보호되지 않는다. 실제로 전염성 질환인 결핵에 걸린 한 노숙인은 진료를 받다가 그 사실이 노숙인 사회에 알려지면서 서울역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이런 형태의 진료는 명백한 실정법(의료법 제19조 비밀누설금지) 위반이지만 해결책은 없는 실정이다. 심지어 원래 진료소에 배당된, 많지도 않은 의료진마저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범승 과장은 “노숙인지원센터에 내과와 정신과 공중보건의 2명이 배정됐으나 진료소 공간이 비좁아 정신과 공보의는 지원센터 본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래서 정신과와의 협진이 필요할 경우 환자를 차에 태워 본부로 데려가 진료받도록 한다. 이는 인력과 시간 낭비가 아닐 수 없다”며 “노숙인을 위한 진료 공간 확충이 시급하다”고 했다.
철도공사 측 “노숙인 시설은 지원 곤란”
이에 지원센터 소장 임영인 신부는 “서울역에 위치한 옛 주한미군 여행장병안내소(TMO)를 노숙인을 위한 진료 공간으로 제공해달라”고 주장했다. 30평 남짓한 이 건물은 주한미군이 장병 여행안내소로 쓰다가 철도청(현 철도공사)으로 반납한 것으로 5년여째 방치돼 있다. 철도공사 측은 이에 대해 “아직 결정된 바가 없고, 또 함부로 결정할 수도 없는 문제”라는 태도다. 하지만 지원센터 기획팀의 이재형 씨는 이 TMO를 노숙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처음에 철도공사 자산개발부 담당자에게 이 이야기를 건네자 이들은 ‘TMO가 들어 있는 서울역사가 문화재로 지정돼 있기 때문에 그 문제는 문화재청에서 다뤄야 한다’고 답변했다. 그래서 문화재청에 알아봤는데,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도 용도는 철도공사가 알아서 할 문제’라고 했다. 다시 담당자를 찾아가 따져 물었더니 ‘아직 확정되진 않았지만 공사 내부에서 사용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무료가 힘들면 지원센터에서 유상임대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제야 ‘장애우나 노인들을 돕는 더 좋은 복지 단체들도 많은데, 노숙인 지원 시설은 곤란하다’고 하더라. 7월1일 이 문제와 관련해 철도공사 사장과 면담하게 해달라는 공식적인 제안서를 넣었지만, 뚜렷한 답변을 듣지 못하고 있다.”
임영인 신부는 “TMO가 철도공사의 소유인 만큼 그 건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전적으로 공사의 권리다. 하지만 서울역 인근에 1000여명의 노숙인이 있다는 현실과 역사(驛舍)가 지닌 공익성을 생각해볼 때 철도공사는 이 건물을 노숙인을 위한 무료진료소 공간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역 노숙인들에게 진료소는 생존권이 달린 문제다. 비좁은 공간, 열악한 시설에서 제대로 진료를 받지 못한 채 노숙인들은 소중한 목숨을 잃어왔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말년에 노숙인으로 전전하다가 역에서 사망했다. 우리 역시 매일같이 톨스토이를 역에서 떠나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