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화성 연쇄살인 마지막 사건에서 용의자 3명의 유전자 분석 의뢰받아”

유전자 분석 맡았던 이정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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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정 기자

    friend@donga.com

    입력2019-09-29 12: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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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빈(73) 가천대 석좌교수는 국내 법의학계의 대표적 권위자로 꼽힌다. 2011년 정년퇴임 전까지 30여 년간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교수로 재직하며 활발한 법의학 연구와 함께 1000여 구의 사체를 검안했다. 대검찰청 과학수사자문위원, 대한법의학회 회장 등도 역임했다. 1990년 유전자(DNA) 분석 신기술을 국내에 도입한 그는 이듬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열 번째 피해자의 유전자 분석을 맡은 바 있다. 지금도 그의 노트북컴퓨터에는 관련 자료가 보관돼 있다. 9월 25일 오전 서울 강남 한 카페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수사는 당시로서는 진일보한 유전자 분석 기술이 적용된 사례다. 

    “1989년 미국에서 한 일본인 연구자가 소량의 시료로도 유전자를 검사할 수 있는 기술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간단히 말해 ‘MCT118’이라는 유전자를 통해 개인을 특정하는 기법이다. 나도 1990년 7월부터 관련 연구를 시작해 곧 친자 검사에 적용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듬해에는 법의학 적용 가능성에 대해 경찰수사연수원에서 강의했다. 그러자 당시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던 경찰이 열 번째 피해자 몸에서 채취한 용의자의 유전자를 들고 왔다.”
     
    그런데 실제 유전자 분석은 일본에서 이뤄졌다. 

    “검사와 감정은 다르다. 범죄 사건에서는 피해자 몸에서 나온 혈액이나 살점이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제반 여건을 고려한 엄밀한 감정이 필요하다. 당시 일본은 법의학 분야에서 한국보다 앞서 있었다. 그래서 MCT118 검사기법을 고안한 연구자가 있는 일본 한 연구소 측에 피해자 몸에서 얻은 범인의 체액, 그리고 용의자 세 명의 유전자를 보냈다.” 

    그러나 일본에서 돌아온 감정 결과는 ‘불일치’. 범인의 유전자는 1번과 2번 용의자의 것과 달랐다. 3번 용의자에 대해서는 “대조할 시료가 소멸됐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 대목에서 그는 노트북컴퓨터를 켜고 한 건의 자료를 보여줬다. 당시 한국 경찰로부터 받은 일본 측의 유전자 분석 결과였다.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정자세포와 피해자의 상피세포, 그리고 한 용의자의 혈액 유전자를 대조해놓은 것이다. 이 교수는 착잡한 표정으로 “당시 일본 연구소의 검사 방법이 잘못됐다”고 말했다.

    일본 측 잘못으로 진범 유전자 날려

    뭐가 잘못됐나. 

    “MCT118 검사기법이란 말 그대로 인간 유전자 가운데 MCT118이라는 인자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유전자 정보를 계량화·유형화하는 ‘타이핑’ 작업이 필요하다. 물과 시멘트를 섞어 콘크리트 벽돌을 만드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사람마다 이 벽돌의 개수가 다르므로 서로 비교하면 일치 여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 측은 이러한 유형화 과정 없이 범인의 유전자 시료를 그때그때 용의자들의 것과 일대일로 비교했다. 이렇게 하면 시료가 부패·변질될 수 있어 정확성이 떨어지고, 무엇보다 양이 한정된 귀중한 시료를 금방 소진하게 된다.” 

    어렵사리 찾은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무위로 돌아간 셈인가. 

    “당시 확보한 범인의 유전자를 타이핑해 일종의 ‘유전자 자’를 만들어놨다면 사건 해결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타이핑해놓은 결과는 수치화된 자료니까 시료 소진이나 변질·부패 가능성을 염려할 필요도 없다. 이후 일본 연구소로부터 분석 자료를 넘겨받아 추가 유전자 분석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이 범인의 체액을 냉동해 다른 성범죄 사건 용의자들과 비교한다고 했지만, 성과가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범인의 유전자가 모두 소진됐기 때문이다.” 



    최근 경찰이 발표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이춘재는 이 열 번째 사건의 용의선상에 올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그는 경찰 조사를 받았으나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혈액형 및 족적과 일치하지 않아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갔다. 일본 연구소에 보낸 3명의 용의자 유전자에 그의 것이 포함됐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 시절 유전자 분석 기술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0.05cc 정도의 체액, 옷에 묻은 혈흔 정도로도 유전자 검사가 가능했다. 물론 지금에 비하면 정확도는 현저히 떨어졌다.”

    용의자 3명 분석 의뢰, 이춘재 범인 아닐 가능성? “0%”

    이정빈 가천대 석좌교수가 자신의 노트북컴퓨터에서 ‘화성 연쇄살인 사건’ 관련 자료를 가리키고 있다(왼쪽).
‘화성 연쇄살인 사건’ 유력 용의자 이춘재의 고교 졸업앨범 속 사진과 사건 당시 용의자 몽타주. [김우정 기자, 채널A 화면 캡처]

    이정빈 가천대 석좌교수가 자신의 노트북컴퓨터에서 ‘화성 연쇄살인 사건’ 관련 자료를 가리키고 있다(왼쪽). ‘화성 연쇄살인 사건’ 유력 용의자 이춘재의 고교 졸업앨범 속 사진과 사건 당시 용의자 몽타주. [김우정 기자, 채널A 화면 캡처]

    MCT118 검사기법의 판별 확률은 1000명 중 1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도입 당시에는 높은 정밀도였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차 허점을 드러냈다. 일본에서 이 검사 결과가 유력 증거로 적용된 첫 사례는 1990년 도치기(栃木)현 아시카가(足利)시에서 발생한 여아 살해 사건. 당시 피해자의 옷에서 발견된 범인의 유전자를 MCT118 검사기법으로 식별해 범인을 검거했다. 하지만 이후 최신 기술로 재검사한 결과는 달랐다. 결국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17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끝에 2010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술은 신뢰할 수 있을까. 

    “현재는 신체나 유류품에 묻은 보이지 않는 체액에서도 유전자를 분석해낼 수 있을 정도다. 여기에 필요한 세포도 2~3개면 충분하다. 이번에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이춘재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사건 당시 경찰은 범인의 혈액형을 B형으로 봤다. 그래서 O형인 이춘재는 번번이 수사망을 빠져나갔다. 

    “지금은 드물지만 과거에는 종종 ‘수혈사고’가 발생했다. 환자에게 다른 혈액형의 혈액을 수혈하는 의료사고였다. 그 이유는 우선 혈액이 바뀌는 단순 실수 때문이고, 또 하나는 혈액형 검사에서 실제와 다른 결과가 나오곤 했기 때문이다. 특히 범죄 사건 피해자로부터 채취한 용의자의 체액은 변질되거나 부패돼 실제 혈액형과 다르게 나올 공산이 크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서도 그랬을 개연성이 높다.” 

    이춘재를 찾아낸 국과수의 후배 법의학자들이 자랑스럽겠다. 

    “물론 기술 발전이 주효했지만, 범죄 증거자료를 잘 보존해온 것도 한몫했다. 무엇보다 남은 유류품에서 새 단서를 포착해보자는, 끈기 있는 발상의 전환으로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이 삼박자가 맞아떨어져 오랜 미제 사건을 풀 수 있었다.” 

    이춘재가 범인이 아닐 가능성은. 

    “나와 같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을 찾으려면 수십억 명을 검사해야 한다. 그중에서 한 명이 나올까 말까다. 그런데 한국 인구는 5000만 명에 불과하다. 1991년이 아니라 2019년의 유전자 검사 기술로 용의자를 확인했다면 그가 진범일 확률은 100%라고 봐도 무방하다.”



    김우정 기자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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