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위 출석 당일 날아온 문자메시지
KBS ‘진실과 미래위원회’(진미위) 조사에 응하지 않은 혐의 등으로 진미위에 의해 인사위원회에 회부됐던 4명이 서울남부지방법원의 결정으로 인사위에 출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연락받은 문자메시지(지난해 9월 18일).
외환은 내우에 의해 일어났다. KBS에는 노조가 3개 있다. 기술직 중심의 제1노조, 기자와 PD가 중심이 된 제2노조(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규모가 가장 작은 제3노조(KBS공영노동조합·공영노조)다. 제2노조는 경영진과 마찬가지로 정상화(적폐청산)에 적극적이고, 보수 성향인 공영노조는 이에 반발했다. 진미위 사태는 제2노조+경영진과 공영노조의 다툼으로 번졌는데, 열세일 것 같던 공영노조가 지난해 의미 있는 반전을 이끌어냈다.
박근혜 정부 시절 KBS 보도국장, 시사제작국장, 편집주간, 취재주간을 각각 맡은 4명은 당시 회사 인사위원회(인사위)로부터 2018년 9월 18일 출석해달라는 통보를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당일 회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인사위원회 담당자입니다. 오늘 중앙인사위원회는 연기되었습니다. 추후 일정에 관해서는 별도로 안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 ◯◯◯드림’
이 문자메시지는 하루 전 서울남부지방법원(남부지원)이 공영노조가 진미위의 설치와 운영을 중지해달라면서 낸 가처분 신청을 받아줬기 때문에 날아온 것이었다. 원래 이들은 회사 인사위에 출석해 진미위가 인사위에 통보한 문제에 대해 소명했어야 한다. 출석하지 않거나 출석해도 제대로 소명하지 못하면 해고 같은 중징계 통보를 받을 개연성이 높았다.
4명의 공통점은 ‘친정권’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2016년 초 KBS에서는 제2노조가 주축인 기자협회가 박근혜 정부 시절의 보도 비리를 밝히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이 4명을 포함한 130여 명의 기자는 ‘KBS기자협회의 정상화를 촉구하는 모임’을 만들고 제2노조의 움직임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KBS 기자들이 양분된 것이다.
양분된 KBS 기자들
양승동 사장(왼쪽)과 성창경 공영노조위원장. [사진 제공 ·KBS, 뉴시스]
이를 위해 진미위 설치와 운영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다. 이 규정 제9조에 ‘관계자의 출석과 답변을 요구할 수 있다’, 제13조에 ‘조사에 불응한 자 등에 대해서는 사장에게 징계를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진미위는 2018년 중순부터 관련자를 불러 조사에 들어갔다. 출석 요구를 받은 이들은 후배인 조사역 앞에서 그들이 내렸던 지시와 결정에 대해 조사받게 된 것이다.
이들은 2016년 발표한 성명서 초안을 e메일로 주고받으며 수정해 최종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2년 전 일인지라 누구에게 무슨 내용을 보냈는지 기억하기 어려웠는데, 조사역들은 비교적 상세한 내용까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e메일 내용을 알고 있다는 투로 질문한 조사역도 있었다고 한다.
그 시기 MBC에서도 보수 성향의 일부 고참 기자가 MBC 정상화위원회로부터 박근혜 정부 시절 그들이 내린 지시 등과 관련해 조사받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회사와 MBC 정상화위원회 측이 자신들의 e메일을 열어봤다고 판단해 관계자를 고발했다. 진미위 조사를 받은 KBS의 일부 고참 기자도 회사와 진미위가 자신들의 e메일을 열어봤다고 판단해 고발을 결심했다.
이들은 공영노조와 함께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회사와 진미위 관계자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그러자 KBS 측은 공영노조가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며 성창경 공영노조위원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남부지방검찰청에 고소하는 것으로 맞섰다.
당시 전 보도국장 등은 진미위로부터 여러 차례 출석 요구를 받았음에도 일절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진미위는 규정 제13조를 근거로 조사를 거부한 2명을 포함한 4명에 대해 징계 절차를 밟을 것을 회사 측에 요구했다. 성 위원장은 김기수 변호사와 상의해 남부지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가처분 신청을 냈다.
회사+진미위 vs 공영노조 맞고소
2018년 10월 2일 KBS가 직원들의 e메일을 열람했는지 살펴보고자 나온 수사관들. 그러나 이들은 수사에 필요한 자료를 압수하지 않고 사측이 제공하는 자료만 받아 가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이에 대해 남부지원은 ‘공공감사에 관한 법 위반 문제는 감사 권한을 가진 KBS 감사가 제기해야지 근로자가 할 수는 없다. 방송법 위반 문제도 KBS의 이사와 감사들이 제기해야지 근로자가 할 수 없다’며 판단 보류를 했다. 사실상 기각한 것이다. 그러나 근로기준법 위반 문제는 근로자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보고 다음과 같은 요지로 판단했다.
‘근로기준법은 노사 합의로 회사 규정을 만들 것을 요구한다. 근로자의 절반 이상이 가입한 노조나 근로자의 절반 이상과 합의해 만들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진미위의 규정은 인사 문제를 다루는 것이니 회사 규정으로 볼 수 있는데, 근로기준법이 요구하는 이 사항을 지키지 않았다.’
이 결정 덕분에 4명에 대한 인사위가 열리기 직전 취소됐다. 얼마 뒤 영등포경찰서는 공영노조가 고발한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검찰은 회사가 직원 e메일을 열어봤는지 살펴보는 데 필요한 회사 서버를 압수수색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공영노조 측은 사측이 성 위원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한 것을 활용했다. 성 위원장이 허위 사실을 유포해 회사 명예를 훼손했는지 판단하려면 회사가 e메일을 열어봤는지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남부지원에 직원 e메일에 대한 로그인 자료를 증거로 보전해달라고 요구한 것. 이를 남부지원이 받아들여 영장을 발부했다. 그러나 강제집행을 하지 않고, 공영노조와 회사 측 변호사가 입회한 가운데, KBS 측이 제출한 자료만 받았다. 영등포경찰서는 성 위원장이 회사 명예를 훼손했는지 판단할 수 없다는 의견을 보냈고, 검찰은 이를 받아들여 무혐의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영등포경찰서는 회사와 진미위 측이 직원 e메일을 열어봤는지에 대한 수사(통신비밀보호법 위번 건)도 계속하고 있었는데, 회사 측은 수사를 이끄는 영등포경찰서 수사팀장이 성 위원장과 동향(부산)이라는 이유로 기피 신청을 냈다. 경찰이 수사팀장을 교체하자 진미위도 수사에 응했다. 영등포경찰서는 진미위 조사역 등이 사용하는 모든 노트북컴퓨터를 압수하지 않고, 진미위 조사역 들의 컴퓨터 로그인 기록 등이 담긴 전산자료를 받아갔다. 그리고 진미위가 직원 e메일을 열어보지 않았다는 의견을 보내자, 검찰도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회사+진미위’ 대 ‘공영노조’의 맞고소 사건이 그렇게 일단락될 때 펼쳐진 것이 KBS 측의 항고로 이뤄진 가처분 신청에 대한 항고심이다. 사측은 조사에 불응한 4명에 대한 진미위의 징계 요구 부분은 항고하지 않았다. 항고심은 진미위 규정 다툼에 한정돼 진행됐다.
이때 고용노동부 남부지청이 양 사장을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으니 항고심 결정에 대한 세간의 이목은 집중됐다. 만약 항고심도 기각된다면 진미위 활동은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근로기준법을 토대로 만든 회사의 인사 규정은 일반적으로 ‘부서장은 사장에게 문제가 있는 직원에 대한 징계를 요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이를 ‘부서장의 징계 요구권’이라고 하는데, 진미위 규정 제10조에는 ‘징계 권고’를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항고심은 이 같은 규정을 근거로 “권고는 요구보다 약한 표현이니 징계 권고는 징계 요구로 볼 수 없다”며 회사 측 손을 들어줬다.
게이트 키핑에 실패한 KBS 보도
제10조에 ‘징계 권고’, 제13조에 ‘징계 요구’라는 단어를 담고 있는 KBS ‘진실과 미래위원회’ 규정.
그렇다면 4명에 대한 사측의 징계는 어떻게 될까. 윤성도 진미위 부단장은 “그 문제는 인사위를 운용하는 회사 측이 결정할 부분이다. 4명에 대해서는 항고하지 않았고 인사위도 열린 바 없으니 그 선에서 처리되지 않겠느냐”라는 의견을 내놨다.
그러나 성 위원장은 재항고 뜻을 밝혔다. 그는 “법원이 진미위 규정 제10조의 징계 권고만 근거로 들었을 뿐, 조사에 불응한 자에 대해 징계를 요구할 수 있다는 제13조는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특정 직원을 진미위가 조사하고 징계하려 한 것이 징계 요구가 아니라면, 뭐가 징계 요구냐”고 말했다.
KBS 진미위는 결국 4명의 인사위 회부 사건으로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그 이상의 인사 조치는 못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우외환을 겪는 사이 KBS는 보도기관으로서 중심을 잃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KBS 1TV ‘뉴스9’에 고(故) 장자연 씨의 리스트를 직접 봤다고 주장한 윤지오 씨,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과 관련됐다는 여성 이모 씨를 출연시켜 장시간 인터뷰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윤씨는 ‘장자연 리스트’를 직접 보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고, 김 전 차관이 나온 동영상 속 여성이 자신이라고 했던 이씨는 최근 검찰 조사에서 그 동영상을 찍는 자리에는 없었다며 말을 바꿨다. KBS 보도가 게이트 키핑(Gate Keeping)에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한 언론인은 지금은 우파 일각에서 KBS 수신료 납부 거부를 언급하지만 이대로 가면 더 확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KBS 개혁을 바라는 세력은 KBS가 전(前) 정권의 나팔수나 기관지 역할을 한 것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 정부에서 KBS는 유사한 보도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생각해봐야 한다. 영부인 김정숙 여사를 김정은 여사라고 했던 MBN과 문재인 대통령 사진 밑에 인공기를 넣었던 연합뉴스TV의 책임자는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KBS는 명백한 오보를 한 건에 대해서도 징계가 없었다. 보수 언론을 비판했던 언론단체들이 침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