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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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 천재 수학자 라마누잔이 세상에 던진 질문들

[궤도 밖의 과학] 노트 속에 잠들어 있던 수학 정리가 양자역학으로 재탄생

  • 과학 커뮤니케이터 궤도 nasabolt@gmail.com

    입력2021-01-29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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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의 전설적인 천재 수학자 스리니바사 라마누잔을 다룬 영화 ‘무한대를 본 남자’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인도의 전설적인 천재 수학자 스리니바사 라마누잔을 다룬 영화 ‘무한대를 본 남자’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숨겨진 재능은 어떻게 세상을 향해 드러날까. 중국 춘추전국시대에는 ‘백락’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의 직업은 말(馬) 감정사였는데, 특별한 안목을 갖춘 덕에 그가 고르는 말은 백이면 백 모두 명마였다. 하루는 왕의 명을 받고 말을 구하러 길을 나섰다. 백락은 거리에서 소금 수레를 끌고 있는 비쩍 마른 말을 발견했다. 볼품이 없었지만 백락은 그 말이 천리마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봤다. 백락은 소금 장수로부터 그 말을 사 왕에게 바쳤다. 처음엔 비쩍 마른 말을 보고 화를 내던 왕도 며칠 후 말이 본모습을 되찾자 매우 기뻐하며 백락을 칭찬했다고 한다. 

    만약 이 말이 백락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 마구간에서 다른 평범한 말들과 마찬가지로 평생 소금 수레를 끌다 죽었을 것이다. 이처럼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 해도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영원히 꽃을 피우지 못할 수도 있다. 달리는 말뿐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무척 유명해진 미국 할리우드 배우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이 함께 각본을 쓴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두 사람은 제7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고 일약 스타가 됐다. 맷 데이먼이 하버드대 재학 시절 쓴 내용에 살을 붙여 만든 작품으로 ‘윌 헌팅’이라는 수학 천재가 주인공이다. 영화에서 윌은 어린 시절 부친으로부터 학대받으며 자란 청년이다. 정식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매사추세츠공과대에서 청소부로 일한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으로 손꼽히는 곳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교수가 학생들을 위해 복도 칠판에 적어둔 수학 문제를 풀어내며 숨겨진 천재성을 드러낸다. 결국 윌의 존재를 알게 된 교수는 ‘제2의 라마누잔’이 나타났다며 흥분한다. 

    여기서 언급된 라마누잔이 바로 이번 칼럼의 주인공이다. ‘굿 윌 헌팅’은 20세기 최고 천재 수학자로 불리던 스리니바사 라마누잔의 일대기에 영감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비록 영화 속이지만, 윌에게 숀이라는 훌륭한 멘토가 나타나 그의 인생의 등대가 돼줬다. 라마누잔도 마찬가지다. 영국에서 저명한 수학자로 알려진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는 라마누잔의 잠재력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리고 그가 짊어지고 있던 소금 수레를 내려놓고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다리를 마련해줬다. 하디가 없었다면 라마누잔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천재를 알아본 천재

    1887년 인도 오지에서 태어난 라마누잔은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가난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독학으로 수학을 공부했다. 15세 나이에 수학책에 적힌 정리들을 증명하다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수학에만 집중한 나머지 다른 과목은 거들떠보지도 않아 제적을 당하고 만다. 대학이라도 제대로 마쳤다면 수학만 연구하는 게 가능했을지 모르겠으나 그의 처지에선 쉽지 않은 일이었다. 22세 이른 나이에 결혼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하지만 수학을 사랑한 그에게 수학 외 다른 일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 라마누잔은 어느 공무원의 도움으로 조용한 마을의 우체국 회계원이 된다. 그때부터 그는 남몰래 수학적 정리를 만들어 노트에 적어두기 시작한다. 그의 노트를 본 공무원은 고위 관료에게 라마누잔의 천재성을 보고했고, 덕분에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연구도 할 수 있게 됐다. 



    드디어 1911년 인도 한 학회지에 라마누잔의 첫 번째 논문이 실렸다. 하지만 인도 수학자는 대부분 그의 논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원통한 라마누잔은 당시 유명하던 영국 수학자들에게 노트와 함께 편지를 보냈다. 제대로 된 증명도 없이 정리만 나열한 보잘것없는 인도 청년의 노트를 진지하게 생각해준 사람은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천재 수학자 하디는 라마누잔이 적은 조잡한 정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1부터 존재하는 모든 자연수를 더하면 음의 값을 갖는 분수가 나온다는 게 정리의 결론이었다. 양수이자 자연수를 무한대까지 더했는데 어떻게 음수가 나온다는 말인가. 마치 주머니 속에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사탕을 더하면 전부 사라져버린다는 말처럼 들렸지만, 하디는 오래된 난제 중 하나인 리만 가설에 사용된 리만 제타 함수를 응용한 결과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챘다. 

    그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공동연구자인 존 이든저 리틀우드와 심각하게 고민한 후, 결국 인도의 젊은 천재를 영국으로 초청하기로 했다. 겨우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은 라마누잔은 고작 15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내를 인도에 남겨둔 채 영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인도가 영국 식민지인 시절이다 보니 인도인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했다. 하지만 하디와 리틀우드는 외로운 인도 청년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언제나 독학으로 공부해오던 라마누잔은 가난한 탓에 종이를 아끼느라 직관적인 결과만 적는 것에 익숙했다. 종종 “수학 공식을 신의 계시로 받았다”고 할 정도로 증명의 필요성조차 몰랐지만, 그의 참신한 아이디어와 두 영국 천재의 완벽한 검증 능력 덕분에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즐거운 시절도 잠시,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라마누잔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종교적 이유로 채식주의자였던 그는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지자 영양실조에 걸렸고, 리틀우드가 탄도 계산을 하기 위해 육군에 징집되면서 분위기는 점차 심각해졌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하디는 리틀우드의 공백을 메우고자 더 많은 시간을 라마누잔과 보냈고, 그런 스승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라마누잔은 밤새 연구에 매진했다. 결국 영국에 온 지 3년 만에 몸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된 라마누잔은 폐결핵으로 쓰러졌다. 요양원에서 2년을 더 버티다 무너질 대로 무너진 상황에서 인도로 돌아왔다. 고국에 온 후 죽어가면서까지 수학에 몰두한 라마누잔은 진척 상황을 끊임없이 하디에게 편지로 알렸다. 죽기 나흘 전까지도 수학 공식을 쓰다 1920년 4월 26일 고국의 한적한 곳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라마누잔의 노트가 세상에 던진 질문들

    라마누잔이 찾아낸 수많은 공식은 수학뿐 아니라, 블랙홀이나 양자역학 등 현대 물리학 연구에도 활용되고 있다. [네이버 영화]

    라마누잔이 찾아낸 수많은 공식은 수학뿐 아니라, 블랙홀이나 양자역학 등 현대 물리학 연구에도 활용되고 있다. [네이버 영화]

    누군가 하디에게 물었다. “당신이 남긴 업적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했다. “라마누잔을 발견한 일이다”라고. 일찌감치 인도의 천재 수학자를 알아본 그는 라마누잔의 천재성을 세상에 알리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디는 당시 병상에 있던 라마누잔을 영국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는 영국왕립학회 회원으로 입적시키고자 갖은 노력을 했다. 그 덕에 라마누잔은 명예로운 최초 인도인 회원이 됐다. 영국에 머물던 5년 동안 라마누잔은 20여 편의 논문을 출간했다. 그가 살던 곳에서는 수백 개가 넘는 수학적 정리가 기록된 낱장의 종이들이 발견됐다. 이 종이들은 훗날 미국 대학 교수에 의해 발견돼 ‘라마누잔의 잃어버린 노트’라는 제목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2014년 수상한 만줄 바르가바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그의 노트에 쓰여 있는 한 줄 한 줄이 마치 보물상자와 같다고 칭찬했다. 실제로 수십 년간 여러 수학자가 라마누잔의 노트에 적힌 추측을 증명하며 우수한 논문들을 탄생시켰다. 그가 찾아낸 수많은 공식은 수학뿐 아니라, 블랙홀이나 양자역학 등 현대 물리학 연구에도 활용되고 있다. 

    라마누잔이 얼마나 뛰어난 수학자였는지를 이야기할 때 늘 나오는 일화가 있다. 병세로 요양원에 머무르던 라마누잔을 찾아온 하디가 “방금 타고 온 택시 번호가 1729였다”고 말하자 라마누잔은 바로 “1729는 두 가지 방법으로 두 세제곱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는 자연수 중 가장 작은 숫자”라고 대답했다. 역사에 남아 있는 전설적인 두 수학자의 대화는 잡담조차 유익하다. 영화 ‘굿 윌 헌팅’이 라마누잔과 하디의 이야기로부터 모티프를 얻었다면, 아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도 등장했다. 바로 2016년 개봉한 ‘무한대를 본 남자’다. 2007년 영국에서는 ‘사라지는 숫자’라는 제목의 연극까지 나왔다. 

    33세에 요절한 천재 수학자의 인생과 그를 발견해낸 위대한 수학자의 직감에 대중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진흙 속에서도 진리의 꽃은 핀다. 누군가 그 꽃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줄 수 있다면 말이다.

    궤도_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감시센터와 연세대 우주비행제어연구실에서 근무했다. ‘궤도’라는 예명으로 팟캐스트 ‘과장창’, 유튜브 ‘안될과학’과 ‘투머치사이언스’를 진행 중이며, 저서로는 ‘궤도의 과학 허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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