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설계자 또는 건설자를 정치권력을 잡거나 자본 운용을 주도한 이들로 한정하는 한 과거의 대한민국도 오늘의 대한민국도 껍질과 뼈만 남게 된다. 오늘 이 나라의 모습을 ‘괴물’ 형상으로 보는 사람이든, ‘세계 속의 자랑스러운 조국’으로 보고 싶은 사람이든 지금의 한국을 만든 수없는 밑그림과 골격들이 어떻게 그려지고 갖춰졌는지를 먼저 살필 수 있어야 한다.
해방 후 지성사를 살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각 분야가 모양을 잡아나가던 시기, 지식인은 곧 실천가였다. 그들은 자신이 배운 것, 옳다고 믿는 것과 알고 있는 것들을 현실로 만들어내고 싶어 했다. 그 역사를 살펴본다. 20회에 걸친 연재를 시작한다.
근래 몇 년 사이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양분, 대립, 화해 등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산업화와 민주화운동을 오늘의 한국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역할론으로 보고 싶어 하는 이가 적잖은 듯하다. 그렇지만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자체가 현대 한국사회의 기원을 이원론적으로 접근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대한민국을 처음 설계한 이들이 기획한 ‘현대 한국의 상’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분리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이 사실은 앞으로 글을 통해 실증할 것이다.
설계자, 건설자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대개 현대 한국 사회의 경제 성장을 주도한 이들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은 온전히 공화당 정권의 전유물일까. 밑그림을 처음 그린 사람은 누구인가. 70년대 농촌사회를 바꿔나간 ‘새마을운동’은 어디에서 누구의 그림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그것들은 어떻게 변형됐으며 변형의 공적과 과실은 무엇인가.
다른 각도에서 문제 하나를 던져보자. 오늘날 상당수 사람의 통념이기도 한 진보와 좌파, 보수와 우파를 동일시하는 생각은 근거가 있는 것일까. 한국 사회의 진보진영은 모두 좌파인가. 같은 맥락에서 우파는 다 보수진영에 속하는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사회에서 분단의 고착화와 함께 사라졌던 좌파 민족주의가 새롭게 다시 등장한 것은 196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잡지 ‘청맥’을 매개로 등장한 이 그룹은 큰 세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더 명확한 ‘이념’에 기초해 좌파가 어느 정도의 규모로 세력화해 나타난 것은 훨씬 뒤인 8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설계자’의 의미
대한민국을 설계하고 건설한 이들은 정치나 경제를 넘어 매우 폭넓은 영역에 걸쳐 존재하면서 통념보다 훨씬 많은 것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그 결과는 성공적이든 미흡하든 지금 이 나라의 모습에 남아 있다. 이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했는지, 앞으로의 글들이 다룰 문제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이념과 활동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이런 접근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밑바탕을 해명해주지는 못한다. 박헌영과 김일성이라는 좌익 지도자들을 제외해놓고 생각하더라도 일제강점기 우익과 중도파의 지도자들은 실제 대한민국을 설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다.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안창호는 해방 전 사망했고, 여운형과 김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로 암살됐다. 단 한 사람 이승만이 남았으나,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라는 상징성을 제외한다면 이 인물이 오늘날 대한민국 건설에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여전히 논란거리다.
무엇보다 이들 ‘거물급’ 지도자들은 남북한 사회에 ‘커다란’ 이념을 제시한 존재들이지만, 실제 사유의 그물을 짜고 구체적인 설계도를 그리고 일할 사람들의 조직을 만들고 움직인 이들은 더 아랫세대 사람들이다. 조국 해방의 감격을 안고 새롭게 삶의 정향을 잡았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일제강점기 말 ‘학병(學兵)’으로 일본군에 끌려가야 했던 세대도 있고, 조금 더 위로는 대학이나 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일선 현장에 막 진출해 30대 나이로 해방을 맞이한 사람들도 있다. 그 아래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이제 고민하기 시작하는 10대 후반에 민족의 독립을 목도한 이들도 있다.
‘남쪽’을 선택한 사람들
1945년 8·15 해방은 됐으나 엄밀히 말해 ‘독립’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좌우 각각의 구상은 있었지만, 당장의 어떤 설계도도 갖지 못한 상태였고 곧바로 미군정의 통치가 이어졌다. 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분명 독립을 의미했지만, 2년도 채 못 돼 남북 간 전쟁을 치러야 했다. 미·소 냉전(冷戰)을 배경으로 한반도는 ‘열전(熱戰)’에 돌입한 셈인데, 뜨거운 전쟁의 열기가 다소 정리된 50년대 초·중반 무렵 비로소 본격적인 ‘국가 건설’이 시작됐다. 고등교육을 받은 30대 청·장년은 윗세대에 더는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국가 건설의 주체가 되고자 했고, 많은 20대 젊은이도 자신의 삶과 이 나라의 새로운 건설을 분리해 생각지 않았다.
해방이 조선민족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패전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새롭게 건설할 나라의 모습에 대해 어떤 합의된 밑그림도 갖지 못했다. 더구나 식민지 시기 항일투쟁 노선에서 좌우익 간 오랜 대립이 있었고, 그 연장선에서 해방기 좌우익은 각기 다른 나라 만들기의 그림을 제시하고 있었다.

월남 지식인들의 의식 근저에 있는 감각이 ‘반공’이라는 사실도 먼저 언급돼야 한다. 남한 사회에서 ‘반공’이 ‘생리적 감각’으로 고착화된 것이 전쟁 이후였다면, 전쟁 이전 이들이 이미 공산주의와의 ‘전쟁’을 겪었다는 점은 확실히 문제적이다. 그들은 지주, 상공인 집안 자식들이었고, 대개 기독교인이었으며, 신의주학생사건 등 월남 이전에 해방기 북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 간 ‘전쟁’을 충분히 봐온 터였다. 또한 이들 중 많은 수가 사상적으로 일제강점기 평양을 근거지로 했던 도산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에 이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해두는 것도 중요하다. 교육과 계몽을 통해 민족 힘을 기르는 것, 일제강점기 독립 방략으로도 제시됐던 이 모델이 새로운 나라 만들기의 중요한 밑그림 중 하나였음을 이야기해두자.
안창호는 끝내 해방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후예들은 한국 사회 각 방면으로 진출했다. 안창호의 ‘오른팔’이었음에도 일제강점기 말 훼절해 새로운 건국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이광수 같은 인물들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든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의 인물들은 당당히 건국 주체가 되고자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대표적인 인물들만 거론해본다. 장준하, 김준엽, 지명관, 서영훈, 장기려, 선우휘, 김성한, 김붕구, 양호민, 신상초, 강원용, 문익환, 이기백 등이다.

그리고 남쪽 출신이지만 학교를 매개로 이들과 이어졌던 류달영 같은 인물들, 더하여 세대는 훨씬 위지만 ‘우익 진보진영’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던 류영모, 함석헌, 김재준 같은 종교인들, 또한 비교적 아랫세대로 해방을 맞이했지만 오늘날 언론계와 학계에 밑그림 하나를 놓았던 천관우, 정명환 등은 정치·언론·교육·종교·학술·의료·산업 각계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이들이다.
앞으로의 글들은 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을 만든 배경, 이들이 했던 활동들과 생각들을 살펴본다. 종합적으로 이 글들은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한편으로 ‘남쪽을 선택한 지식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학병 세대에 대한 보고서’에 해당한다. 인물들에 대한 열전이면서 세대에 대한 평전이기도 한 이 글들이 어떤 독자에게는 ‘한국 우익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