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무기 도입 리스트
일각에서는 북한군이 산 후면부터 전면까지 굴을 뚫으면 장사정포를 신속히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위협이라는 논리도 편다. 이것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산을 관통하는 굴을 뚫는 데 필요한 엄청난 노력과 비용은 차치하더라도, 지하갱도가 포의 성능에 치명적이라는 문제도 발생한다.
포의 성능은 ‘습기와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습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포탄의 품질이 급격히 떨어져 불발탄이 발생할 공산이 크다. 지하갱도에서 포를 이동하고 보존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은 이유다. 북한군은 어떤 묘수로 이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과연 묘수가 있긴 했을까.
이명박 정부 시기 북한의 대남 군사위협이 가중됐다는 근거로 언론에 자주 부각된 것이 바로 이러한 장사정포의 산 후면 배치였다. 이후 육군과 공군은 각기 무기 도입의 명분으로 이를 활용했다. 공군은 산 전면에서 북한 장사정포를 격파할 수 없으므로 후면까지 은밀하게 침투해 폭격하는 항공작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이를 스텔스기 도입의 당위성으로 연결했다.
당연히 육군이 반론에 나섰다. 한반도의 기상환경은 항공작전을 수행하기 힘든 악천후가 연간 150일에 이르기 때문에 항공력으로는 북한 장사정포를 제압할 수 없고, 반면 육군 포병전력은 기상과 관계없이 작동하기 때문에 첨단 정밀 유도포탄인 XM982 ‘엑스칼리버(Excaliber)’를 도입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스마트폭탄은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로 유도되며 목표지점에서 거의 직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산 후면의 장사정포 진지도 제압이 가능하다는 것. 그런가 하면 청와대는 기존 육군 포병에 GPS 유도폭탄을 장착하는 일명 ‘번개사업’을 대통령 특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착수하기도 했다.
2005년 한미 간 군사임무 전환계획에 따라 북한 장사정포에 대응하는 대화력전 임무가 한미연합사령부에서 한국군으로 이양된 이후 한국군 내부에는 장사정포를 제압하는 전략에 대해 각 군을 모두 만족시키는 통일된 계획이나 의견이 없다. 그러나 마치 없던 장사정포 위협이 새로 나타난 것처럼 여론이 형성되자 합동정밀직격탄(JDAM), 레이저유도폭탄(GBU-24), 중거리 GPS 유도킷 폭탄(KGGB), 다목적정밀유도확산탄, 차기전술유도무기 등 군의 무기체계 소요는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다. 장사정포를 요격할 수 있는 이스라엘제 아이언돔(Iron Dome)을 도입하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육군은 유도탄사령부를 창설해 미사일 전력으로 이를 제압하는 방책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장사정포에 대응하는 무기 소요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북한 장사정포가 대량생산돼 야전에 배치된 게 1970년대부터다. 이미 수명 연한을 초과한 포의 성능이 급속도로 저하되고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왜 갑자기 장사정포 위협이 새로 출현하기라도 한 듯 다시 부각되는지, 그 배경이 아리송하지 않을 수 없다.
1996년 게리 럭 전 주한미군 사령관은 “경제난에 처한 북한은 1990년대 후반이 되면 지상화력이 거의 수명 연한을 초과해 더는 대남 군사 우위를 누릴 수 없을 것”이라며 “재래식 전력의 비교우위가 남아 있는 마지막 시기인 90년대 후반에 대남 군사도발의 ‘기회의 창’이 닫힐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기회의 창이 닫히기 이전에 도발 유혹을 가장 강하게 느끼는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는 게 당시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 장사정포를 비롯한 북한 재래식 화력은 더 강화됐다는 게 한국 국방부의 주장이다. 북한이 아무리 기존 포의 성능 개량과 유지 보수를 통해 수명을 연장했다 해도, 어떻게 이전보다 더 강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여기에 사거리 180km의 300mm 신형 방사포 등장과 산 후면의 갱도진지까지 고려하면 거꾸로 장사정포 위협은 이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2014년 8월 13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열린 긴급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 앞서 박근혜 대통령과 군 수뇌부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천안함 폭침 사건 희생자들에 대해 묵념하고 있다.
기실 국방당국의 이러한 위협 인식은 곧바로 ‘누가 대화력전 임무를 주도하는가’라는 문제로 직결된다. 물론 이는 각 군 간 치열한 무기 소요 경쟁과 관련 깊다. 북한의 위협이 부각되면 될수록 각 군은 더 많은 자원을 끌어오는 명분으로 활용할 수 있으므로, 장사정포 위협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재평가하자는 목소리는 군 당국 어디서도 나오지 않는다.
특히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한국군 군사전략을 주도하는 육군의 영향력이다. 이들의 목소리가 관철되면서 신형 포병전력을 증강하는 작업이 우선과제로 떠올랐다. 그에 따라 육군의 신형 자주포와 다연장포, 중·단거리 미사일 전력이 확충되기 시작하면서 육군의 작전고도가 1만 피트(약 3km) 상공 너머로 점점 더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공역 관리 차원에서 1만 피트 이상의 고도는 공군의 작전영역으로 간주했지만, 이제는 육군의 작전고도가 공군의 그것과 완전히 중첩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또한 육군의 포와 미사일 사정거리가 늘어남에 따라 공군의 작전거리와도 중첩돼 유사시 누가 화력전을 주도할 것인지에 대한 혼란이 최근 수년 사이 내내 증폭돼왔다. 쉽게 말해 자신이 작전을 주도하려다 보니 유니폼만 다른 아군이 장애물로 등장한 셈이다.
합참은 2013년 말 기존의 합동교범에서 ‘공군 작전영역’ ‘지상군 작전영역’이라는 표현을 삭제하고 ‘합동작전영역’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부여한 합동교범을 작성한 바 있다. 육군 신형 무기체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합동교범과 맞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자 육군 측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교범이 수정된 것이다. 이에 대해 공군 예비역 인사들은 “합동작전영역이라는 명칭은 육군과 공군 모두 작전을 할 수 있다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육군이 작전을 주도하고 공군의 역할을 축소한 것”이라고 반발한다.
이 때문에 공군 예비역 관계자들은 “합참의 새로운 교범 제정에 후배 공군 장교들이 동의해주는 바람에 육군에 작전 주도권을 빼앗겼다”면서 이에 항의하기 위해 공군작전사령부를 방문하기도 했다. 육군의 조직 이기주의가 현대전의 결정력이라 할 수 있는 항공력의 발전을 제한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더욱 커졌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렇듯 장사정포 위협을 둘러싼 한국군 내부의 조직 갈등은 남북한 사이 갈등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어떤 평가가 가장 합리적인지, 어떤 대응 방안이 가장 효율적인지 입체적으로 논의하는 노력은 짚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사이 결국 위협이라는 것 자체가 조직의 이익이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인해 부풀려진 것은 아닐까, 세간의 의심은 더욱 고조된다. 북한 장사정포에 얽힌 한국군의 씁쓸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