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8일 서울 용산구 방위사업청에서 차기전투기 사업 가격입찰에 참여한 각 사 대표단이 보안서약서를 제출하고 있다.
방사청이 입찰 중단을 선언하며 내건 공식적인 이유는 3개 경쟁기종이 모두 가격 상한선인 8조3000억 원을 맞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록히드마틴의 F-35, 보잉의 F-15SE,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EADS)의 유로파이터가 제시한 금액이 모두 이 선을 넘었다는 것. 당초 방사청 측은 아예 사업비를 증액하는 방안을 추진해온 것으로 전해지지만, 기획재정부 등 관계부처가 ‘절대 불가’ 주장을 고수함에 따라 끝내 무산된 바 있다. 이 때문에 방사청 측은 이미 이번 입찰을 진행하는 동안 가격 상한선을 맞추지 못한 기종은 사실상 평가 대상에서 제외할 것이라는 방침을 공식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입찰 진행 과정에 정통한 복수의 소식통들은 이러한 방사청의 공식 발표에 “의구심이 남는 대목이 있다”고 말한다. 일부 기종은 가격을 맞출 여지가 있었지만, 오히려 방사청과 협상을 진행하면서 불가능해진 측면이 있다는 것. 관점에 따라서는 방사청이 이번 입찰을 성사시킬 의지가 없었다거나, 결과적으로 가격경쟁력이 낮은 특정 기종에 유리한 결론이 만들어진 것 아니냐는 의혹도 가능하다는 비판이다.
방사청의 공식 발표에 의구심
상황을 구체적으로 복기하려면 먼저 가격을 결정하는 메커니즘을 살펴봐야 한다. 기종 결정의 첫 번째 수순은 실제로 이 전투기를 운용할 공군이 담당하는 ROC(작전요구성능) 작성이다. 전투기가 이 정도 기능과 성능을 갖춰야 작전에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물론 그 세부 명세가 북한이나 주변국에 알려져서는 안 되므로, ROC는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는 데다 입찰업체들에게조차 문서 형태로는 제공하지 않는다. 사업설명회 자리에서 방사청 측이 구두로 불러주면 업체관계자들이 손으로 받아 적는 최고 수준의 보안관리다.
ROC를 충족하는 세부적인 조건은 기종별로 다를 수밖에 없다. 예컨대 특정 미사일을 장착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속도로 일정 수준 이상의 거리를 날아가야 한다면, 이를 실현하려고 장착 혹은 개조해야 할 시스템도 기종에 따라 다르다. 이 때문에 방사청과 입찰업체들은 기술협상 과정에서 필요한 장착·개조사항을 두고 지난한 밀고 당기기를 한다.
이러한 요구사항에 대해 합의가 이뤄진 뒤 업체들은 방사청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이를 충족할 수 있는 최종가격을 써내는 입찰단계에 돌입한다. 동체와 엔진을 책임지는 주요 업체는 물론, 각 요구사항을 맞추는 데 필요한 하부 시스템 계약자들까지 입찰장에 들어와 개별적으로 가격을 써내면, 이들 수치를 자동 합산해 최종 입찰가격을 매기는 방식이다.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번 FX 3차 사업에서 공군이 제시한 ROC 수준이 매우 낮았다는 사실이다. 속도와 항속거리, 일정 수준 고도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시간 등으로 항목도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것. 반면 방사청이 기술협상 과정에서 각 업체에 요구한 성능과 요구 조건은 이보다 더 까다로운 수준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통상 필수조건과 비필수조건으로 나누는 이러한 요구사항은 도합 수백 개에 달하는 규모. 필수조건은 입찰업체가 반드시 충족해야 하는 사항이고, 비필수조건은 이 가운데 70% 이상을 만족시키면 자격요건을 갖추게 되는 사항이다.
논란의 소지는 바로 이 대목에서 발생한다. 필수조건과 비필수조건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장착 혹은 개조되는 시스템 규모가 결정되므로, 조건이 많을수록 비용도 함께 증가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옵션이 늘어나면서 구매가격도 함께 증가한다는 뜻이고, 조건이 까다로울수록 상대적으로 가격에서 경쟁력이 있었던 기종이 불리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의미가 된다.
입찰 진행 과정에 정통한 정부 안팎의 관계자들은 “이러한 요구조건 가운데 일부는 ROC에서 제시한 최소요건과는 거리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전의 다른 전투기도입 사업과 비교해봐도 전례가 없을 만큼 높은 요구조건이 따라붙었다는 것. 이들 요구사항이 통상의 경우와 비슷한 ‘보편적’ 수준이었다면, 상한선인 8조3000억 원 안에 가격이 형성되는 기종도 있었으리라는 게 이들의 대체적인 설명이다. 실제로 이번 입찰에서는 상한선을 2000억 원 안팎 ‘살짝’ 넘긴 최종가격을 제출한 업체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기종별 필수·비필수조건을 까다롭게 설정하면서 결과적으로 3개 업체는 모두 상한선 이내의 가격을 제시하지 못했고, 그에 따라 방사청은 입찰 잠정중단을 선언했다. 문제는 이러한 구도가 가격 경쟁력에서 극히 불리한 처지였던 F-35에 유리한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 이번 입찰에서 F-35는 정부 간 계약인 대외군사판매(FMS) 방식이라는 이유로 예상가격만 제시하고 확정 가격을 제시하지 않은 데다, 그나마 미 국방부 산하 국방안보협력국(DSCA)이 의회에 통보한 한국 판매 60대 가격은 108억 달러로 사업비를 크게 초과한 상황이었다.
극히 짧은 시간 안에 일정 추진
다른 한편에서는 방사청이 이번 입찰을 성사시킬 의지가 사실상 없었던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요구조건을 높게 설정한 데는 이번에는 모든 업체를 탈락시키고 예산을 늘려 처음부터 다시 사업을 시작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물론 기획재정부가 예산 증액 불가를 통보한 이후로는 이러한 시나리오가 불가능해졌지만, 필수·비필수조건을 둘러싼 방사청과 각 업체의 협상이 진행되던 시기가 방사청이 사업비 증액을 강력히 희망하던 시점이었음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있다는 시각이다.
이러한 의구심은 극히 짧은 시간 안에 진행된 이번 입찰 일정과 맞물려 한층 증폭된다. 2002년 FX 1차 사업 당시에는 총 9개월에 걸쳐 유찰을 38번 반복한 후에야 우선협상대상이 결정됐지만, 이번 입찰에서 방사청은 불과 3주일 만에 55번 입찰을 진행하는 초단기 일정을 강행했다. 업체 사이에서는 “하부계약자와 가격을 조율할 시간이나 여지없이 가격만 반복해 써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지만, 방사청 측은 이미 사업 일정이 많이 지연됐다며 단기일정을 고수했다. 그러나 결국 입찰이 잠정 중단돼 사업 일정이 훨씬 뒤로 미뤄지게 된 현재 상황에서 보자면, 이는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진행이었다는 비판을 정부 당국자들로부터도 들을 수 있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당초 공군에서 제시한 ROC가 지나치게 수준이 낮았던 게 논란의 시작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사업 초기 이른바 ‘북한 수뇌부를 정밀 타격할 스텔스기’에 대한 요구가 청와대 등 정부 핵심 관계자들을 통해 흘러나오면서, 가장 높은 스텔스 성능을 자랑하는 F-35로 이미 내정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져 나온 바 있다. 이러한 비판에 당혹한 공군은 ‘불필요한 특혜 시비를 피하겠다’는 취지로 스텔스 성능의 주요 기준인 RCS(레이더 탐지율) 등을 대폭 낮춘 ROC를 작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찰에 관여한 한 전문가는 “이번 사업이 목표로 하는 하이엔드(High End)급 전투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낮은 ROC였다”고 촌평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특정 기종에 유리한 성능이 ROC에서 대부분 제거됨에 따라, 원래는 여기서 파생돼야 맞는 필수·비필수조건을 조정할 여지가 지나치게 커졌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결과적으로 ROC에서 요구한 성능과 협상과정에서 방사청이 각 업체에 요구한 기준의 격차나 상관관계가 벌어지면서 필수·비필수조건에 대한 불만과 이견이 나오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특정 기종 내정설이 공공연히 운위되는 부실한 사업관리가 결과적으로 다시 한 번 사업 진행의 발목을 잡게 된 셈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방사청 측은 “대한민국 정부가 구매자인데, 우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성능을 각 업체에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며 “지나치게 까다로웠다거나 과도했다는 시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를 업체가 아니라 구매자가 결정해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는 것. 이번 입찰을 성사시킬 의지가 부족했다거나 가격경쟁력이 약한 특정 기종을 배려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1, 2차 사업에 비해 기술조건이 강화됐다면 그간 고성능 전투기를 운용하며 느낀 작전상의 경험과 한계가 반영된 결과일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7월 18일 차기전투기 사업의 재추진 방안과 관련해 새누리당과 국방부의 당정협의가 열린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김관진(오른쪽에서 두 번째) 국방부 장관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번 사안의 핵심 이슈인 필수·비필수조건은 전투기 성능을 가늠할 수 있는 주요 잣대인 까닭에 엄격한 보안관리를 받는다. ‘주간동아’가 논란의 정당성 여부를 가릴 수 있는 필수·비필수조건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사항을 공개하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방사청은 각 업체와의 협상 과정에서 이에 대해서는 언론에 언급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았고, 이에 따라 입찰업체들은 ‘주간동아’의 취재 요청에 대해 모두 난색을 표하며 원론적인 견해만 반복했다.
그러나 사업이 끝난 후에도 이러한 태도를 유지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입찰의 진행과 결과에 대해 이미 일부 업체들은 공공연히 반발하는 데다, 기종 선정이 마무리된 후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겠다는 의사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2002년 FX 1차 사업 당시 1단계 평가에서 1위를 하고도 2단계 평가에서 탈락한 프랑스 다소사가 국내 법원에 사업중지 가처분신청을 제출하는 등 홍역을 치른 바 있다. 유사한 사후 논란이 이번에도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문제의 필수·비필수조건은 이러한 논쟁을 촉발하게 될 ‘숨어 있는 뇌관’인 셈이다.
당초 방사청은 7월 17일 방위사업추진위원회를 열어 이후 사업진행 방향을 논의한다는 계획이었지만, 19일 대통령 보고를 거친 후인 25일로 위원회 개최를 연기한 바 있다. 7월 11일자 ‘내일신문’은 애초 유력하게 추진했던 예산증액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국방부가 최근 들어 아예 사업을 둘로 나누어 20대를 먼저 구매하고 40대는 2년가량 시간을 두고 구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할구매 계획 역시 개발 일정이 지연되는 F-35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비판이 나오면서 갈 길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 더욱이 이 경우에도 총사업비는 8조3000억 원을 1조~2조 원 이상 넘을 수밖에 없어 예산부처의 반발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듯 사업 자체가 총체적인 혼돈 속에 접어들면서 차기전투기 도입 일정 자체가 하염없이 지체된다는 사실이다. 사업비 증액이나 분할구매 방안 모두 국회를 다시 통과해야 하는 데다, 재공고나 신규공고 등 처음부터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 전문가들은 이러한 혼선이 이어질 경우 최대 1~2년이 더 걸릴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거듭되는 지연에 공군 관계자들은 “F-4, F-5 등 노후기종 전투기 상당수의 도태시점이 이미 지났다”며 “대북 억제력에 차질이 생길까 염려스럽다”는 견해를 쏟아낸다. 청와대와 국방부, 방사청의 고심이 과연 전화위복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불안감이 가중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