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년 ‘강경대 폭행치사 사건’에 항의하는 민중당 시위에 참여한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오른쪽). 동아DB
5월 3일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선출된 김문수 후보는 2013년 경기도지사 재직 시절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자신이 ‘혁명’을 포기한 결정적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1994년 김영삼(YS) 당시 대통령 측으로부터 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 입당을 권유받았던 시기, 김문수는 서울 구로동에 있던 노동인권회관 소장이었다. 1970년대 군사독재 반대 투쟁에 투신한 이래 1980년대에는 노동운동가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 그였다.
하지만 옛 소련 붕괴와 중국의 개방으로 사회주의 진영의 실체가 알려지자 김문수의 마음은 흔들렸다. 아내 설난영 씨가 1990년대 초 중국에 다녀온 뒤 들려준 실상도 충격적이었다. 그는 앞선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집사람이 중국 화장실을 갔는데 아예 문짝이 없더라는 거다. 더럽고 냄새가 나서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러 번 ‘진짜냐’고 물었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이후 혁명가 김문수는 대한민국 체제 내에서의 개혁을 꿈꾸며 정치에 뛰어들었고, 30여 년의 정치 여정 끝에 6‧3 조기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경북 영천 태생,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오른쪽 두 번째)가 1994년 3월 9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민주자유당 지구당위원장 임명장을 받은 후 악수하고 있다. 동아DB
고교생 때 이미 박정희 전 대통령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나섰다가 무기정학 처분을 받을 정도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보였던 김 후보는 서울대 1학년 때 본격적으로 학생 운동에 투신한다. “대학에 와서 출세하려고 고시 공부에만 몰두할 것이냐”는 선배 심재권 전 의원의 권유로 운동권 써클 ‘후진국사회연구회’에 가입한 게 출발점이었다. 1971년 전국학생시위,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등에 연루된 김 후보는 연거푸 제적을 당한 끝에 20여 년만인 1994년에야 서울대 졸업장을 받았다.
김 후보는 노동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의 제안에 따라 ‘위장취업’ 1세대로 노동 현장에 뛰어든 그는 1980년대 ‘혁명가’로 명성을 날렸다.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 한국노총 금속노조 남서울지역지부 청년부장 등을 지내며 김 후보는 개별 공장 노동자는 물론 노조 조직 전반에서 신뢰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86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지도위원으로서 인천 5·3 민주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수감됐는데, 당시 보안사령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동지였던 심상정 전 의원의 은신처를 끝내 실토하지 않은 일화가 널리 알려졌다. 당시 국가보안법 및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3년‧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은 그는 2년 6개월 옥살이 끝에 1988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했다.
이 시기 김 후보에 대해 심상정 전 의원은 “학생운동의 전설이자 황태자”라고 평한 바 있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경험을 가진 정치인이 보수‧진보 진영 가리지 않고 적잖지만 김 후보 정도의 ‘커리어’를 가진 이는 흔치 않다는 게 중론이다.
3선 국회의원, 재선 경기도지사 역임
김 후보와 아내 설난영 씨의 인연도 젊은 시절 노동운동 동지로서 시작됐다. 전남 순천에서 상경해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설 씨와 김 후보는 1978년 처음 만났고, 1980년 김 후보가 ‘삼청교육대 정화 대상자’로 수배 대상이 된 후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김 후보가 설 씨의 자취방에서 은신한 것이다. 1981년 백년가약을 맺은 이들의 결혼식은 당시 감시하러 온 전경이 하객보다 많은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김 후보는 4월 30일 국민의힘 대선 경선 토론회에서 ‘별의 순간’을 묻는 질문에 “어려움 속에서 아내를 만난 것”이라며 “그보다 더 큰 별의 순간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김 후보가 4월 공저자로 펴낸 책에서 밝힌 신혼 시절 일화 한 가지. 당시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설 씨는 신혼집 단칸방에 낯선 사람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김 후보가 수배 중인 지인에게 신혼집 열쇠를 맡긴 것이었다. 같은 책에서 김 후보는 아들이 태어나면 이름을 ‘동지’로 지을 생각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오랜 세월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김 후보가 현실 정치의 중요성을 절감한 건 1980년대 후반부터로 전해진다. 1987년 대선에서 양김(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분열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하는 것을 목도하고 정치에 참여할 결심을 굳힌 것이다. 그는 1990년 재야 운동권 동료 이우재 전 의원, 이재오 전 의원, ‘영원한 재야’ 고(故)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 등과 함께 민중당 창당에 나선다. 하지만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중당은 1명의 당선인도 내지 못하고 득표율 미달로 정당 등록이 취소돼 해산하고 만다.
이후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 측의 제안을 받고 1994년 민자당에 입당하며 본격 정치를 시작했다. 1996년 15대 총선부터 경기 부천 소사에서 내리 3선을 하는 등 승승장구의 연속이었다. 2006년 경기도지사에 당선됐으며, 2010년 유시민 전 의원을 꺾고 재선에도 성공했다.
‘반(反) 이재명 결집’ 의지 강조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5월 3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5차 전당대회에서 최종 후보로 확정된 뒤 두손을 들어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잠재적 대권주자 반열에 올랐던 그는 2018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 전 시장에 패해 낙선하며 꿈을 접는 듯 했으나, 윤석열 정부 출범 후 다시 중앙 정치 무대에 복귀했다. 2022년 9월 경제사회노동위원장에 임명됐고, 지난해 7월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 이후 정국에서 김 후보는 이른바 ‘꼿꼿문수’로서 보수 지지층 사이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11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계엄 선포 관련 긴급현안질문에서 야당의 공개 사과 요구에 국무위원 대다수가 고개를 숙였지만, 김 후보는 자리에 앉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윤 전 대통령 강성 지지자들이 김 후보에게 집중하면서 탄핵 정국에서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권 차기 주자 선두권에 들었고, 5월 3일 열린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한동훈 전 대표를 꺾고 국민의힘 21대 대선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김 후보는 이날 후보 수락 연설에서 “이재명 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라면 어떤 세력과도 강력한 연대를 구축하겠다”고 밝히는 등 이른바 ‘반(反) 이재명 결집’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김우정 기자
friend@donga.com
안녕하세요. 주간동아 김우정 기자입니다. 정치, 산업, 부동산 등 여러분이 궁금한 모든 이슈를 취재합니다.
재산, 이재명 30억-이준석 14억-김문수 10억 원 순
‘TK 혈투’… 이재명 안동-김문수 영천 출신, 이준석 선대 고향은 칠곡·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