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초음속 전투기 KF-21 보라매. [뉴시스]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미-사우디 관계 악화일로
2022년 7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회담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 3년간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매우 악화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직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을 다시 꺼내 들며 사우디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를 강도 높게 비난하고 나섰다. 또한 사우디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흔히 ‘이란 핵합의’로 불리는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복원도 천명했다. 이란의 핵능력 고도화 판을 깔아줬다는 혹평에도 바이든 행정부가 JCPOA를 재추진한 것이다. 그 결과 이란은 바이든 행정부 3년 동안 우라늄 농축량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급기야 핵탄두 제조 시 필요에 근접한 83.7% 고농축 우라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적대국 이란의 핵무장은 사우디에는 그야말로 재앙이다. 사우디는 미국의 세계 패권 질서를 떠받치는 핵심 축인 1975년 페트로 달러(petrodollar) 체제에 합의한 대신 국가 안전을 보장받았다. 그런 점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대(對)이란 정책은 사우디 입장에선 배신으로 보였다. 특히 2021년 출범 직후 바이든 행정부는 예멘 후티 반군의 미사일·드론 공격을 받고 있는 사우디에서 자국 방공부대를 일방적으로 철수시켰다. 사우디는 패트리엇 미사일이라도 공급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미국은 이마저도 묵살했다. 심각한 안보 위기 속 미국의 행보는 사우디의 분노를 샀다.
미국이 사우디와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간 데는 백악관 외교안보 사령탑에 오른 제이크 설리번의 의중이 크게 작용했다. 힐러리 클린턴의 발탁으로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설리번은 그간 여러 실책을 했다. 그의 머리에서 나온 ‘전략적 인내’ 와중에 북한은 핵보유국으로 자리매김했다. JCPOA 역시 결과적으로 이란의 핵능력 고도화를 야기했다. 설리번이 직접 챙긴 리비아·시리아 관련 정책도 실패했다. 리비아에선 제2차 리비아 내전이 발발했고, 시리아 내전도 격화됐다. 이 틈을 타 러시아와 이란의 영향력이 커졌다.
중국 전투기 구매 고려한 사우디
중국 FC-31 전투기. [위키피디아]
미국과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자 사우디는 중국과 손잡으려 했다. 중국도 사우디를 친중 진영으로 끌어들이고자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지난해 리야드에서 열린 방산전시회에서 사우디는 중국제 스텔스 전투기 FC-31, 고등훈련기 L-15 거래와 관련해 중국 측과 진지한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사우디가 중국제 전투기를 구매하는 것은 무기 하나를 사는 수준을 넘어 엄청난 후폭풍을 부르는 일대 사건이다. 사우디는 미국제 F-15, 유럽제 유로파이터 타이푼·토네이도 IDS 등 전투기 400여 대를 운용하고 있다. 이들 전투기를 지원하는 조기경보통제기, 공중급유기, 방공시스템도 모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표준 규격의 장비로 통일해서 운용 중이다. 이 가운데 노후 F-15 구형 모델 일부와 토네이도 IDS 등 150여 대가 대체 대상으로 거론된다. 중국이 바로 이 시장을 파고든 것이다.
사우디는 2030년까지 무기 구매 예산의 50%를 국산 장비 구매에 쓴다는 ‘비전 2030’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빈 살만 왕세자는 군사산업총국(GAMI)과 사우디아라비아군사산업(SAMI)을 설립해 무기체계 국산화를 꾀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전투기 도입은 무기 국산화의 정점인 핵심 사업이다. 중국은 사우디의 전투기 대체 소요와 무기 국산화를 동시에 충족할 카드로 FC-31 스텔스 전투기 현지 생산을 제안했다.
FC-31 최대 약점 ‘메이드 인 차이나’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 [뉴시스]
문제는 FC-31이 중국제라는 점이다. FC-31은 현재 사우디군이 운용하는 전투기나 지원기, 방공무기와 전혀 호환되지 않는다. ‘윈도우’ 운영체제를 사용하는 컴퓨터와 ‘매킨토시 Mac OS’를 사용하는 컴퓨터 간 소프트웨어 호환이 안 되는 것과 비슷한 격이다. 현대 전투기의 전장 정보 공유는 조종사 간 음성 통신, 다시 말해 아날로그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된 임무 컴퓨터가 전장·표적 정보를 실시간 공유하는 디지털 방식이 도입된 지 오래다.
가령 사우디군의 E-3 조기경보통제기가 레이더로 포착한 표적 정보를 공유하면 나토 표준 데이터링크를 사용하는 F-15SA나 유로파이터 타이푼은 해당 데이터를 받을 수 있다. 반면 연동 자체가 안 되는 중국 FC-31은 데이터 공유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각 무기체계의 소프트웨어 소스코드를 서로 공개해 연동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적대 관계인 미국·유럽과 중국 측이 군사기밀을 서로 공유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당초 F-35 공동개발 파트너였던 튀르키예가 러시아제 S-400을 샀다는 이유로 퇴출된 사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KF-21, ‘5.5세대+급’ 발전 기대감
이런 점을 알고 있음에도 사우디가 FC-31을 구매하려 했다는 것은 무기체계를 나토 표준에서 ‘중국 표준’으로 전부 갈아치울 각오까지 했다는 뜻이다. 현실화될 경우 사우디가 기존 친미 노선을 버리고 완전히 친중 노선으로 갈아탄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국에는 페트로 달러 체제 붕괴와 미국 패권 위기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악화일로였던 사우디와 관계를 복원하면서 당장 파국은 피한 것이다.하지만 미국이 관계 개선을 위해 사우디에 F-35를 판매한다 해도 기술이전과 현지 생산 조건까지 합의해줄 가능성은 적다. F-35 판매 수량도 그리 많지 않을 공산이 크다. 결국 사우디가 비전 2030을 진행하려면 또 다른 해외 파트너와 공동개발을 추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사우디는 영국 주도의 6세대 전투기 사업 GCAP와 프랑스·독일이 이끄는 FCAS 사업에 참여 의사를 타진했지만 모두 거부당했다. 이로써 기술이전과 자국 현지 생산 조건을 유지하면서 나토 표준 전투기를 얻으려는 사우디로선 한국의 KF-21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게 사실상 유일한 해답이다.
현재 KF-21은 4.5세대 전투기다. 하지만 한국은 KF-21을 단계적으로 ‘5.5세대+급’으로 발전시키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사우디는 지난해부터 KF-21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올해 3월 사우디 국방차관이 한국을 찾아 KF-21 생산시설, 국방과학연구소를 둘러보고 차세대 전투기 공동개발을 논의하기도 했다. 현재로선 KF-21이 사우디의 전투기 국산화 사업 파트너 선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셈이다. 사우디가 최근 인도네시아의 이탈로 생긴 KF-21 프로그램 파트너십 공백을 채울 새로운 협력자가 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