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화훼공판장에서 젊은 여성 고객들이 컬러 안개꽃을 구경하고 있다.
꽃다발시장에서 ‘만년 조연’이던 안개꽃이 ‘단독 주연’으로 떠올랐다. 안개꽃은 원래 큰 꽃의 빈틈을 메우는 데 쓰였다. 꽃집에서 장미꽃다발을 사면 장미꽃과 포장지만 계산하고 안개꽃은 따로 값을 매기지 않는 경우도 흔했다. 그만큼 안개꽃은 ‘곁다리 소품’ 정도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올해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안개꽃만 찾는 고객이 늘어나면서 안개꽃 가격도 치솟고 있다. aT(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화훼공판장에 따르면 안개꽃 종류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리는 ‘카시오피아’종의 경매 최고가는 1월 1만650원, 2월 1만5000원, 3월 2만4000원, 4월 2만6400원으로 치솟았다. 평균가는 1월 5204원, 2월 7428원, 3월 1만2863원, 4월 1만143원으로 급등했다. 최고가와 평균가가 3개월 만에 각각 약 2배가 된 것이다.
5월 19일 오전 9시 서울 양재동 aT화훼공판장을 찾았다. 색색으로 물든 안개꽃이 눈에 띄었다. 보라·파랑·연분홍·진분홍·자주·노랑·주황·초록 등 색깔도 다양했다. 한 꽃집 주인은 “요즘 경매에선 자주·연분홍·진분홍·파랑안개꽃이 제일 잘 나간다”며 “원예농장에서 하얀색 안개꽃이 배달되면 식용색소를 탄 물에 꽃을 담가 염색한다”고 말했다. ‘색깔 안개꽃’은 한 단에 1만5000~2만 원, 하얀색 안개꽃은 8000~1만 원에 팔리고 있었다.
‘킨포크 스타일’과 ‘실용성’의 장점
왜 안개꽃이 유행 반열에 올랐을까. 그 배경에는 장기 불황과 맞물린 소비 트렌드가 있다. 먼저 소박함을 추구하는 킨포크(Kinfolk) 스타일의 인기 때문이다. 킨포크의 사전적 의미는 ‘친척, 친족 등 가까운 사람’이란 뜻인데, 2011년 미국에서 탄생한 계간지 이름이기도 하다. 이 잡지는 건강한 먹거리, 느린 생활방식 등을 소개하며 불황에 지친 소비자들의 심신을 달랬다. 킨포크 애독자를 지칭하는 킨포크족(族)이라는 신조어까지 낳으며 출간 3년 만에 발행 부수 7만 부를 넘기도 했다.
이러한 킨포크 스타일 열풍이 안개꽃 유행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서울 대치동 꽃가게 ‘수다팻’의 손은정 대표는 “킨포크 스타일의 핵심은 심플함과 고급스러움이다. 안개꽃은 튀지 않고 소소하기 때문에 킨포크에 열광하는 소비자의 욕구를 채워주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는 안개꽃의 실용성 때문이다. 공급자로선 생육, 배송이 비교적 쉬운 안개꽃이 매력적인 상품이다. 꽃은 물과 온도에 워낙 민감한데 안개꽃의 경우 그나마 관리하기가 편하다는 것이다. 특히 꽃배달 전문업체가 대량으로 배송하는 꽃은 환경 변화를 잘 견디고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안개꽃은 잘 시들지 않고 부피감을 유지할 수 있는 실용적인 재화라는 것이다.
소비자 사이에서는 드라이플라워(말린 꽃) 열풍이 불면서 “안개꽃은 간편하게 말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입소문을 탔다. 별다른 약품 처리를 안 해도 예쁘게 마르고, 물들인 안개꽃은 마른 후 모양이나 색의 변화가 거의 없다. 수명도 일주일 이상 간다. 그만큼 생명력이 강한 꽃이다.
안개꽃은 소박한 분위기 때문에 ‘셀프웨딩’이나 ‘킨포크 스타일’ 인테리어에 종종 활용된다.
“경기가 안 좋으니 소비자들이 생화를 자주 사는 것을 낭비라 생각하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조금만 사서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는 효용성을 추구하는 듯하다. 드라이플라워가 유행하는 이유도 장기간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안개꽃은 드라이플라워를 만드는 데 실용적인 소재로, 말려도 원형을 거의 유지해서 인테리어 소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안개꽃이 유행하면서 DIY(do-it-yourself)문화에 활용되는 새로운 현상도 나타났다. 먼저 예비 신랑신부가 직접 꾸미는 ‘셀프웨딩’ 또는 ‘셀프웨딩 촬영’에 쓰인다. 인테리어용 꽃업체 ‘블루밍앤미’의 하희영 대표는 “‘작은 결혼식’이 확산하면서 조화로 된 웨딩부케로 안개꽃을 찾는 문의가 최근 2~3배 늘었다”고 말했다.
‘컬러 안개꽃’은 위선이라는 시각도
소비자가 직접 꽃을 사서 색을 물들이고 말리는 문화도 확산하고 있다. 인터넷 네이버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등에는 안개꽃을 물들이는 방법과 말린 후 헤어스프레이를 뿌리면 모양이 오래 지속된다는 속설이 떠돌고 있다.
즉 안개꽃 열풍은 소박함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요즘 트렌드의 산물이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원예업자들은 올해 초 예상치 못한 ‘안개꽃 특수’를 누렸다. aT화훼공판장에서 판매된 안개꽃 중 ‘카시오피아’종은 1월 1만564단에서 2월 2만4186단으로 약 2.3배, ‘안드로메다’종은 1월 2754단에서 2월 1만5480단으로 약 5.6배 증가했다. 장미나 카네이션 등 특정 꽃 생산이 기념일을 타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편 ‘물들인 안개꽃’ 열풍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꽃은 생긴 모습 그 자체가 아름답다는 가치관 때문이다. 안개꽃의 자연스러움을 선호하면서 인위적으로 꽃을 물들이는 것은 위선적이라는 주장이다.
손은정 대표는 “일부 꽃가게는 소량의 안개꽃을 물들여 크라프트지(누런 포장지)로 싸서 판매한다. 물들인 안개꽃은 세련돼 보이고, 크라프트지는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은 완전히 모순된 존재다. 꽃을 물들인다는 것은 생물에게 안 좋은 물을 먹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를 보고 마냥 열광하는 것은 마치 성형수술과 화장을 잔뜩 한 사람의 미모만 선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진정한 자연스러움을 사랑한다면 꽃의 원래 모습 자체를 소중하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