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북 괴산에서 쑥, 복숭아 등을 키우는 청년 농부 선무영 씨. 이상윤
“얼마 전 옥수수를 수확하는데 일손이 모자라 이웃 할머니들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농약 한 번 안 쳐서 크기가 작고 벌레까지 먹은 옥수수를 보시더니 ‘너 이렇게 농사지을 거면 당장 그만둬라’ 하시더군요.”
선 씨가 싱긋 웃으며 전한 일화다. 다행인 건 그렇게 꾸중 들어가며 거둔 옥수수가 불티나게 팔렸다는 점이다. 한 구매자는 선 씨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내가 늘 그리워하던 옛날 옥수수 맛을 되살려줘 고맙다. 내년에도 꼭 다시 팔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농사지으며 찾은 희망
선 씨가 농약 없이 키운 복숭아도 시장 반응이 괜찮았다. 그는 올해 처음으로 복숭아 농사에 도전했다. 여름 내내 잡초 무성한 과수원에서 땀을 뻘뻘 흘렸다. 동네 어르신들은 오가며 그를 볼 때마다 “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느냐. 다른 과일은 몰라도 복숭아는 무농약 재배가 안 된다”고 혀를 찼다. 하지만 선 씨는 농업에 뛰어들면서 품은 다짐, 즉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은 땅에서 작물을 길러내겠다’는 뜻을 꺾지 않으려 버텼다.“다행히 기대보다 결실이 좋아 내년을 기약할 수 있게 됐어요. 사실 올해 농사로 수익을 많이 올린 건 아니거든요. 쑥·고추·마늘 등등 작물 13종을 키워 번 돈이 4000만 원 수준이에요. 그래도 돈보다 가치 있는 것을 많이 얻었습니다. 앞으로 점점 더 좋아질 거고요.”

선무영 씨가 농장에서 쑥을 채취하고 있다. 이상윤
‘찐촌바이브’라고 이름 붙인 그의 농장에는 쑥 재배에 최적화된 비닐하우스가 있다. 선 씨는 여기서 키운 쑥을 고추밭과 복숭아 과수원 곳곳에도 옮겨 심어 가꾼다. 향긋한 쑥으로 만든 차는 농산물 박람회 등에서 늘 인기 만점이다.
그는 내친 김에 식용으로 쓰기엔 다소 억센 가을 쑥을 활용해 향수도 개발했다. 쑥 증류수와 아로마 오일 등을 섞어 만든 이 제품 이름은 ‘향수라기엔 쑥스럽지만’이다. 선 씨는 “최근 한국 문화와 음식에 관심을 갖는 외국인이 많아진 만큼 쑥 제품 판로가 세계 각국으로 확대되리라 기대한다”고 밝혔다. 쑥을 달여 먹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에게 우리 쑥을 알리고자 쑥차 티백 제조 준비도 마쳤다고 한다. 선 씨는 “내년부터 세계시장을 겨냥한 쑥 제품을 본격 생산할 것”이라며 브랜드 ‘게으른 밭’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줬다. 쑥을 비롯해 그가 판매하는 모든 농산물에 첨부되는 설명서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게으른 밭 이야기-밭은 게을러도 괜찮습니다. 아니, 밭은 게을러야 합니다. 본디 자연은, 땅은, 흙은 사람과는 다른 시간에 삽니다. 흙에게 성실하라, 부지런하라 성내지 않겠습니다. 충분히 시간을 가져라. 게을러도 괜찮다. 오롯이 너의 시간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담담하지만 힘 있는 글을 읽다가 어쩌면 이것은 선 씨가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농부가 되기 전 세상의 시간을 따라잡지 못해 뒤처졌던 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 꿈꾸다 농부로 방향 전환
선 씨는 로스쿨 출신 농부다. 명문대 졸업 후 서울 한 로스쿨에 진학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머잖아 변호사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토할 만큼 공부해도 원하는 성적을 얻기 어려웠다. 변호사시험에 연거푸 두 번 떨어진 뒤 선 씨는 시험공부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2021년 일이다. 생애 처음 맞닥뜨린 좌절 앞에서 그가 한 일은 자신의 꿈에 대한 성찰이었다. “나는 왜 변호사가 되려한 걸까”를 수없이 질문한 끝에 그는 ‘자유’라는 답을 얻었다.“일에만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삶,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 꿈에 변호사 자격이 도움이 되리라 본 거였죠. 이걸 깨닫고 나니 ‘그래 변호사가 되지 않아도 그런 삶을 살면 되잖아’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대안으로 ‘농부의 길’을 택한 데는 일본 언론인 곤도 고타로가 쓴 책 ‘최소한의 밥벌이’가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서 곤도는 ‘원하는 글을 마음껏 쓰되 굶어 죽지 않는 삶’을 목표로 시골행을 택한다. 하루 한 시간씩만 농사지어도 혼자 먹을 쌀 정도는 수확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게 곤도의 계산이었다. 선 씨도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호기심이 생겼다. 농촌진흥청이 발간한 보고서를 보니 고추 생산에 투여되는 노동시간은 파종부터 수확까지 다 따져도 연간 150시간 수준이었다.
“다른 작물의 경우 필요 노동시간이 이보다 더 짧더군요. 지금 제가 옥수수와 복숭아, 쑥부터 고추, 감자, 양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물을 한꺼번에 키울 수 있는 것도 그런 덕분이에요. 농촌에서는 하루 종일 밭에 매달려 있지 않아도 충분히 삶을 꾸릴 수 있습니다. ”
결심을 굳힌 그는 농협중앙회 농협창업농지원센터가 운영하는 ‘청년농부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땅 일구고, 트랙터 운전하고, 비닐하우스 관리하는 법을 배웠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강사들은 영농 기획, 판로 개척, 마케팅 방법도 전수해줬다.

“농촌은 청년에게 무궁무진한 기회의 땅”이라고 말하는 선무영 씨. 이상윤
선 씨는 “급속한 고령화로 머잖아 농촌에서 거대한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며 “지금 농업을 시작하면 다가오는 시대에 경쟁력을 갖추고 앞서갈 수 있다”고 말했다.

















